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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우리 집에 놀러오시세

학대 피해 장애인,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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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노인은 신기한 게 많다. 가을 산의 알록달록한 단풍 못지않게 그녀는 사람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깊은 밤 집집마다 불 켜진 아파트도 그녀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30년 이상 이어진 고된 노동으로 허리가 낫같이 휜 노인은 그녀의 딸과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있다.

‘죽어뿌지’를 입버릇처럼, 혹은 추임새처럼 써대던 노인은 이제 새집 들어가니 “아까부이 못 죽어뿌지”라고 하고 껄껄껄 웃는다. 한 프로그램의 취재로 경북의 한 농가에서 30년 이상 이어지던 모녀의 참혹한 일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 두 모녀는 새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 집에 놀러 오시세”라고 손짓하며.

 

“사람이 버글버글 하대”

“주왕산 갔을 때 온갖 것 다 있대. 버섯도 나고. 사람이 버글버글 하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몸집이 작은 꼬부랑 노인은 올 10월 처음 주왕산에 가보았다. 서툰 지팡이질도 사람들의 부축도 편하지 않아 영순 씨는 늘 그래왔던 대로 한 쪽 허벅지를 짚은 채산등성을 천천히 올랐다. 몇 걸음 가다가 한숨 돌리고 다시 몇 걸음 가다가 한숨을 돌렸다. 힘에 겨워 결국 폭포까지는 보지 못했으나 처음 “난 안갑니더”라며 한사코 손을 내젓던 그녀는 그렇게 가을 산의 정취에 흠뻑 젖었다. 나들이 복장은 예외 없이 꽃분홍색 조끼차림이었다. 어쩌면 처음 구입해봤을지도 모를 손수 고른 옷이었다. 바야흐로 약 40여 년 전에도 그녀는 큰 고개를 넘었다. 포항에서 경북 내륙의 한 마을로 오기 위해 넘은 큰 산등성이었다. 그리고 그 때 영순 씨의 곁에는 그녀처럼 가난하고 남루한 차림의 어린 아이 셋과 남편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차는 없고 걸어 넘어 왔제. 짐은 있었어요? 짐이 있어야 들고 오지. 짐도 없고. 보따리 쪼맨한 거 들고 오고. 아이들 뭐 먹이셨어요? 옛날에는 묵을 게 있었나. 아무것도 없제. 그때는 젖도 없고. 짜면 쪼매 나오고. 야(순애 씨)는 OOO(마을명) 집에서 낳았제.”

그녀가 그렇게 고개를 넘어 경북의 한 마을에 정착해 낳은 딸이 뇌전증장애에 지적장애가 있는 중복장애인 순애 씨였다. 주왕산에서도 순애 씨는 영순 씨를 앞질러 오색 단풍의 정취에 먼저 취했을까. 그 마을로 유입된 후 지적장애인 영순 씨는 한 농가에서 약 30년간 노동 착취를 당해왔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그녀의 허리는 누런 벼이삭처럼 맥없이 꼬부라졌다.

 

“엄마는 오십 세살, 저는 스물세 살이요”

“엄마는 오십 세살, 저는 스물세 살이요.” 순애 씨(가명. 41세)는 본인과 영순 씨의 나이를 그렇게 일러주었다. 해가 바뀌어도 나이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영순 씨(가명. 64세)는 아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두 모녀는, 특히 영순 씨는 실제 나이보다 열 살쯤은 많아보였다. 오래 노동의 흔적이었다.

두 모녀를 만나기 위해 내려가는 기차에서 기자는 세상이 좁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올 초 기자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한 프로에서 두 모녀의 방송을 보았다. 경북의 한 농가에서 30년간 학대당했던 모녀의 참혹한 일상이 전해지고 있었다. 방송에서 모녀는, 특히 영순 씨는 고된 농사일을 했고, 폐가나 다름없는 집에서 방치된 삶을 살았다. 한겨울임에도 집에는 온기가 없었고, 냄비에는 된장만 풀고 말았을 뿐인 멀건 정체모를 국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모녀는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고, 순애 씨가 간혹 반찬값을 요구하면 2만 원 정도를 쥐어주고 말았다.

“우리, 마을에 있을 때, 엄마가 꼬치(고추)따러 갔을 때, 나는 약 치러 가고, 줄 땡기고 했어요. 우리가 쌀이 없을 때 뒤(가해자의 거처)로 가서 ‘돈 좀 주소. 우리 반찬 없는데예’ 하니까 이만 원을 줬어요.”

순애 씨는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해자는 뇌전증장애인으로 등록된 순애 씨의 수급비를 수시로 횡령했고, 대신 모녀의 생필품 일부를 지원하거나 약을 타다 주는 등의 최소한의 돌봄을 했다. 해당 프로 제작팀의 요청으로 경북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경북발달장애인지원센터, 경북장애인권익옹호기관, 지자체와 지역 경찰서 등 여러 기관이 함께 방문하여 당사자 모녀 및 가해자를 면담하고 현장회의를 거쳐 방문 당일 긴급 분리돼 모녀는 인권침해피해장애인쉼터로 입소했다. 그리고 10월의 마지막 주 해당 쉼터에 도착했을 때 순애 씨는 자립 훈련 차원에서 주어진 설거지 임무를 막 끝낸 참이었고, 영순 씨는 눈에 익은 분홍색 조끼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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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떨려서 큰일이다”

영순 씨는 종종 순애 씨의 손 떨림에 대해 근심을 털어놓고는 했다. 인터뷰 초반, 평소에도 경직된 표정과 자세의 순애 씨가 낯선 기자의 등장 때문인지 손 떨림이 계속됐는데 시간이 무르익으며 증상은 서서히 완화되었다. 긴장감이 해소됐던 건 학대에서 분리된 시점부터 함께한 경북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의 채현경 간사와 인권침해피해장애인쉼터의 이지희 과장이 동석해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와 너스레로 편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몇 시간에 걸친 사투리 중에 기자가 아마 놓친 것도 적지 않을 것임을 시인한다.

“내사 좋지만 야(순애)가 자꾸 손을 떨어서. 어떤 때는 구불르고(구르고) 자빠지고.” 얼마 뒤 입주할 아파트에도 불구하고 영순 씨가 마냥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순애 씨의 뇌전증장애 증상 때문이었다. 순애 씨가 본인 스스로 제어할 수없는 증상들을 영순 씨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지청구를 듣는 순애 씨도 그러나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순애 씨는 꽤 꼼꼼한 성격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영순 씨에게 이래저래 잔소리를 늘어놓는 눈치였다. 쉼터에서 일러준 예절, 예를 들어 ‘입을 가리고 재채기를 해야 한다’ 등을 순애 씨는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때그때 영순 씨에게 주의를 주었다. 최근에 영순 씨는 쉼터에 방문한 활동가들을 ‘남자다’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또 잔소리를 들었다. “엄마, 선생님한테 남자다카지 마라. 선생님인데 그럼 안된데이.” 기자와 채 간사는 연신 순애 씨에게 그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꼭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깍듯하고 예의바른 순애 씨를 이해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영순 씨와 순애 씨가 아웅다웅 하는 것을 두고 채 간사는 ‘둘이 그래서 진정한 모녀다’라고 정의 내렸다. 가해자에게 분리되기 전까지 호적상 동거인으로 돼있던 두 모녀는 최근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의 지원을 통해 유전자검사를 받아 생물학적 모녀로 인정받았다. 가족관계 등록을 위해 법률구조공단의 지원을 받아 가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어쩌면 더 확실할지 모를 증거는 높은 데서 살다 혹시 딸이 ‘구불르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영순 씨가 아파트 1층을 고집하고, 상추 보다 맛있다는 처음 맛본 대게를 앞에다 두고도 연신 살을 발라 손을 떠는 딸에게 먹이려고 했던 모정이 아니었을까.

 

“거 가이께 좋데요. 파랗게 좋데요”

“어머니가 좋아요? 영순 씨가 좋아요?” 어떤 호칭이 좋냐는 질문에 영순 씨는 일말의 지체도 없이 후자를 택하고는 웃었다. 그때부터 기자는 어머니 대신 영순 씨로 불렀다. 영순 씨는 호불호가 확실한 요새 유행하는 말로 ‘사이다’같은 사람이다. 최초 모녀를 취재했던 해당 프로에는 쉼터 입소 한 달 후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장면은 바닷가에서 촬영됐는데 영순 씨가 본 최초의 바다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날이 흐렸고 바람도 불었다. 아무래도 방송사 측은 좀 더 극적인 장면이 필요했을 법 한데 영순 씨가 허리도 아프고 날씨가 궂어 바닷가로 나가는 게 영 싫었던 모양이다.

쉼터에 입소 후 좋고 싫음의 의사전달을 분명히 하게 했던 훈련이 통했는지 이리 저리 설득해도 영순 씨가 끝끝내 “안 나갑니더”라고 하는 통에 난색을 표하던 방송사 측은 결국 바닷가에서 순애 씨 모습만 덩그러니 담았다. 이후 식당으로 이동해 대게를 먹는 장면도 등장한다. 처음 맛보는 대게였는데 순애 씨는 여태껏 영순 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상추’라고 알고 있었지만 영순 씨에게 상추보다 더 맛있는 건 그 날 이후로 대게였다. 그리고 그 날 영순 씨는 진달래 같은 꽃분홍색 조끼도 구입했다. 모녀와 동행했던 채 간사는 보온성 좋은 옷을 추천했던 모양인데 구경 끝에 영순 씨가 ‘난 이거 고분(고운) 거’ 라고 가리킨 게 그 분홍 조끼였다. 다음날 다행히 날이 개었고, 그때는 영순 씨가 먼저 나서서 바다를 보러 가고자 했다. “처음 가봤어요. 거 가이께 좋데요. 파랗게 좋데요.” 영순 씨는 바다만큼 사람 구경도, 차를 타는 것도 좋아한다. 허리가 낫같이 휘어지도록 평생 논밭만 일구던 그녀가 난생처음 본, 집집마다 불이 켜진 아파트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그녀는 “불 바래이. 저 불 바래이”(불 좀 봐봐)하며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모녀는 미지급임금 채권을 변제받은 금액으로 인근 지역의 한 소형 아파트를 구입했고 11월 입주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영순 씨는 직접 제 눈으로 구입하고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아무리 은행에 보관된 돈이 있다고 일러줘도 자신을 빈털터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순 씨는 집들이도 고개를 젓는다. 채 간사가 아파트로 이사 후 그동안 인연이 있었던 활동가들과 집들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 거절하는 영순 씨에게 비용은 어차피 센터에서 지원할 거라고 하니 “남 대는 건 싫어요”하며 한사코 싫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다과를 남에게만 권할 줄만 알고, 자기주장이 꽤 확실하고, 남의 신세 짓는 것도 싫어하는 그녀지만 오직 한 가지에만 강한 물욕을 보였다. 그것은 핸드폰이다. 그녀는 인터뷰 동안 “난 이것만 있으면 돼요”라며 서너 차례 피력하고 멋쩍은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핸드폰을 갖고 싶어 했던 이유는 오직 단 한사람 때문이었다. “딸내미 있는데 전화를 해보고 싶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니더. 순애가 번호를 압니더. 둘째 딸.” 영순 씨는 순애 씨의 바로 위의 언니 경자(가명)씨에게 큰 애착을 보였다. 영순 씨는 5명의 아이들을 양육했는데 그중 세 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진술했다. 순애 씨와 이미 하늘로 떠난 순애 씨의 남동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경자 씨 일지도 모른다. 경자 씨는 실제로 모녀가 농장에서 생활할 때 종종 들렀고,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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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오시세, 맛있는 거 해줄게예”

돈도 없고 누구 신세 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 집들이를 할 수 없다는 영순 씨에 비해 초대에 후한 쪽은 순애 씨였다. “꼭 놀러오시세, 맛있는 거 해줄게예. 라면도 끓여줄게. 오뎅도 해줄게예. 김밥도 해줄게예.” 하지만 사실 김밥은 쉼터에서 준비된 재료를 말았던 정도였다. 자립 후에도 모녀에게는 훈련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쉼터 이 과장은 연세를 고려해 특히 영순 씨는 요리 보다 반찬서비스를 통해 혼자서도 차려 드실 있도록 훈련을 도울 계획이라고 전했다.

경북 모녀 농장 학대 사건은 사례 연계 초기부터 경북 도내의 장애인학대 대응 유관 기관들이 개입, 자립, 사후 모니터링까지 표본적인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좋은 케이스였다. 그리고 모녀의 자립 후에도 그 유관 기관들이 계속 네트워크 하면서 장기적으로 사후 관리가 지원될 예정이다. 다행인 점은 순애 씨가 인지력이 꽤 좋다는 사실이다. 순애 씨는 중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인지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 강직된 표정과 자세였고 손을 떨기도 했지만 그녀가 기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은 도화지에는 놀랄 만큼 반듯하고 예쁜 글씨가 채워져 있었다.

순애 씨는 즉석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를 한 곡 뽑았는데 아무도 몰라 구전가요로 추정되는 그 노래를 정확한 박자와 음정으로 불러냈다. 알고 보니 순애 씨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흥이 많은 아가씨였다. 어디서나 흥이 많은 성격 때문에 순애 씨가 한동안 쓰고 다니던 가발은 제 자리를 곧잘 이탈하기도 했다. 그 가발은 해당 프로에서 선물해준 것으로 머리가 숭숭 빠진 순애 씨의 머리를 방송 이후에도 한동안 덮고 있었다.

탈모는 학대의 명징한 증거 같기도 했다. 순애 씨는 자신의 외모를 숨기려 하지 않았지만 방송을 시청하던 기자조차 가발로 인한 극적인 변화를 반색했었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영순 씨는 연신 순애 씨에게 “가발 내삐리라”고 핀잔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순애 씨는 쉼터에 온 이후 자연스레 머리가 자랐고 가발은 그녀의 가방에 무용지물로 놓여있다. 영순 씨에게 왜 줄곧 그것을 내버리라고 했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서울로 돌아가면 나의 엄마가 어쩐지 들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순애 씨는 저녁 식사 전 목욕을 하러 들어갔고, 영순 씨와 격한 포옹을 하고 쉼터를 나왔다. 경북의 날씨는 내내 궂었지만 느리고 안락한 무궁화 열차 밖으로 보이던 10월의 아침 풍경과 순애 씨의 정직한 받아쓰기와 영순 씨의 분홍 조끼가알 수 없는 온기를 이어주었다고 그래서 따뜻한 여행이었다고 전한다.

작성자글. 김은정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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