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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사람을 갇히게 하는 질문, 자유롭게 하는 질문

인권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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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어떻게 샀나요? 한약은 어떻게 먹었나요?”

질문만 보면 평범하다. 맥락을 모르면 친절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노트북을 사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묻는 친구의 질문 같기도 하다. 한약을 먹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는지 묻는 걱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질문의 목적과 질문자와 응답자의 관계를 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 위 질문은 구청직원이 장애인에게 부정수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던진 것이다. 뇌병변장애인 A 씨가 인천 계양구청 직원에게 들은 말이라고 한다. 며칠 전 그가 사생활침해와 장애인 비하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구청직원은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행정기관의 역할이 감시인지 되묻게 된다.

구청직원의 질문은 수급을 받는 장애인은 노트북을 쓰거나 한약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렸다. 구청직원은 가난한 장애인이 노트북을 어떻게 사며, 어떻게 비싼 한약을 먹을 수 있냐고 생각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는 답해야 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한약은 아파서 병원에서 지었을 뿐이고 컴퓨터 이용해야 할 때마다 피시방 찾아가는 것이 힘들어 노트북을 구했다. 돈을 다달이 아껴 각각 따로 구매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질문을 받으면서 들었을 그의 모욕감을 생각하니 몸서리쳐진다.

 

잘못된 질문은 앞을 가로막는다

질문이 없는 세상은 평온하지만 갇힌 세상이다. 변화도 이끌 수 없다. 그래서 인권운동을 하면서 많이 나누는 이야기 중 하나가 ‘질문’이다. 답만을 외우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질문을 떠올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항의하는 것이자 상식을 깨는 일이기도 하다. 상식이란 이름의 주류질서, 규범은 사회적 소수자를 옭아매곤 하니까. 그렇다 보니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은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무작정 질문을 던진다고 되는 건 아니다. 모든 질문이 좋은 것은 아니다. 잘못된 질문은 오히려 앞을 가로막고 소통의 어려움을 낳는다. 질문의 형식이 아닌 질문의 내용과 목적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때로 질문은 폭력이 된다. 차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질문의 형식을 띤 추궁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생이 단정하지 못하게 옷이 그게 뭐니?”라는 식 말이다.

필자도 질문의 형식을 띤 추궁을 받은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장에서 20년 만에 만난 사촌언니는 내 옷에 꽂힌 노란리본 배지를 보고 물었다. “그거 왜 달고 있는 거야?” 평범한 질문. 그러나 사실 세월호의 노란 리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노란리본의 의미를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그의 표정과 말투는 ‘세월호가 끝난 지 언젠데 아직도 그걸 달고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냐고 따진 것이다. 그래도 난 침착하게 설명했다.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세월호 참사가 이어진 거고 그래서 승객들이 억울하게 희생됐잖아요.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월호와 희생자들을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달고 있어요”라고. 내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자 언니는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알았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했다는 건 소통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일 것이다. 사촌언니는 차분하게 주장을 펼치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서로 다른 관점을 이야기하며 나눌 준비가 안 된 것일 수도 있다. 질문은 ‘대화’를 잇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막을 수’도 있다. 편견에 갇혀 상대를 편견에 가두려고 하는 질문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다른 상상력을 던져주지도 않는다. 그저 질문자와 응답자 간에 넘을 수 없는 선을 확인할 뿐.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의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

앞서 말한 “학생이 단정하지 못하게 옷이 그게 뭐니?”라는 질문을 한 사람은 학생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전제(편견)가 있다. 그와 더 대화하려면 질문을 되돌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다른 상상, 다른 생각, 소통이 열릴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왜 학생은 단정하게만 옷을 입어야 해?”

질문하되 서로를 옭아매고 주류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질문보다 그것을 깨는 질문을 해보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질문 말이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왜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같은 과학적 질문 말고도 상식을 깨는 질문은 많다. 세상을 바꾼 질문과 행동 말이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시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 전용 칸에 앉았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미국은 흑백 분리정책에 따라 버스에 백인과 흑인의 전용 칸이 따로 존재했고 흑인 칸은 매우 적었다. 만석이 돼도 흑인은 백인 좌석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질문했다. “왜 흑인과 백인은 좌석이 구분되나요?” 로자는 흑인 전용 칸이 꽉 차 백인 칸에 앉았으나 결국 강제로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버스 안 타기 운동’으로 이어졌고 대대적인 흑인 민권운동으로 발전했다. 흑인을 옭아맸던 인종분리정책에 던진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질문이 아닐까.

 

질문의 권력

그리고 인천구청 직원의 부당한 질문이 위치 한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질문의 권력’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질문이 ‘권력에 대해’ 의문(이의)을 제기하는 것인가, 질문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인가. ‘질문하는 자와 응답하는 자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두 관계가 역전될 수 없다면 질문자의 위치가 곧 권력이다.

고정된 관계는 질문의 성격을 예상하게 한다. 항상 질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한다. 강자가 약자를 추궁할 때 그러하기도 하고, 강자는 상대방에게 언제나 아무 질문이나 할 수 있다고 여기곤 한다. 구청 직원은 질문할 수 있고, 수급자인 장애인은 답변만 해야 한다. ‘부정수급 조사’라는 틀에 갇히는 한, 조사자와 응답자는 역전될 수 없다. 구청직원은 수급자인 장애인에게 ‘부정수급 조사’라는 이름으로 모든 질문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업무수행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상대의 위치(권력)의 차이를 생각했더라면 어떤 질문은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달 전 여군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어떻게 옷을 벗겼는지’ 물었다고 한다. 2차 가해다. 아무리 군사법원이라지만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다. 심지어는 나중에 상황 재현도 요구했다고 한다. 재판부가 당사자의 동의를 얻었다고 말하지만 판결을 내리는 재판부가 요구한 질문이 부당하더라도 그 권력을 거부했을 때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기에 그녀는 대답하고 재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재판부는 1심을 뒤엎고 가해자들을 무죄로 석방했다. 재판부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너무나 명백하다. 폭력에 해당하는 질문도 던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내린 결론은 이미 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법원 판사들은 여군이 성폭행 진술을 믿지 않아서 2차 가해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질문자의 위치성을 돌아본다면 질문의 내용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위치가 상대와의 관계에서 권력자라면 질문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적어도 질문의 내용을 더 신중하게 만들 것이다. 꼭 질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질문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사전에 응답자에게도 질문할 기회를 주고 거부할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질문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질문이 선(善)은 아니다. 질문의 내용과 목적, 질문자의 위치를 성찰한 질문일 때, 질문은 우리에게 ‘편견’이 아닌 ‘자유’를 줄 것이다.

작성자글.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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