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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체계가 직조하는 혐오

[인권의 살갗]이분법과 동일성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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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채지민 기자

“되게 여성스러워요. 진짜 여자 같아요.”

한 트랜스젠더(MTF)당사자가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트랜스젠더인 그녀를 격려하려는 선의로 한 말 같았다고 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여성이 무엇인지 짐작가능하다. 아마도 머리가 길고 상냥한 말투를 하고, 치마나 블라우스 등의 옷을 입은 사람일 것이다.

 

성별 규범

도대체 ‘여성스럽다’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흔히 특정한 ‘성격·외양·복장’을 ‘여성스럽다’고 일컫는데,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도 여성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뚝뚝한 성격의 거친 말투를 구사하는 여성도 있고, 바지나 운동복만을 입는 여성도 있으며 머리가 짧은 여성들도 많다. 저런 식의 여성 규정은 젠더화된 사회가 만든 ‘성별 규범’이며 그에 기반한 편견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편견도 여성(또는 남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 성별규범과 맞닿아 있다. ‘여성은 어떠해야 해, 남성은 어떠해야 해’라는 규범은 평생 우리의 몸과 생활양식을 통제한다. 게다가 성별 규범은 ‘성별을 자연화’시킨다. 자연화란 ‘원래 여성(또는 남성)은 그렇다’는 일종의 신화다. 자연화는 사회가 만든 ‘정상성의 기준’을 사회구성원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성별을 정하는 것은 개인이 정할 몫이지, 타인이나 국가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 아니다.

성별에 대한 자연화는 성별을 생물학적인 신체로 한정하는 사고와 교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물학적 신체로 여성을 규정한다고 ‘누가 여성인지’ 분명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사람의 성기나 호르몬, 염색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중 하나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남성이 다수다. 간성(intersex)처럼 성기가 두 개인 경우도 있고, 호르몬이 외부 성기와 상반되는 호르몬이 많은 사람도 있다. XY염색체지만 이른바 여성호르몬이라고 일컫는 에스트로겐 등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도 있다. 생물학적 기준이란 이렇게 공백이 많다. 생물학적 어떤 특성으로 성별을 한정하려는 순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무수하게 배제시킨다. 트랜스젠더가 아니어도 배제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들은 N개의 사람만큼 N개의 성별이 있다고 말한다.

 

성별이분체계와 성별화된 공간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최근 트랜스젠더여성이 숙명여대에 입학하려다 ‘당신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비난과 혐오 때문에 입학을 포기했고, 성전환수술을 한 육군하사는 계속 복무를 원했지만 군대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학교와 군대로부터 ‘여성’이 아닌 존재 아니, ‘여성도 아니고 시민도 아닌 존재’로 평가되었다. 그녀들의 권리는 쉽게 박탈됐다. 헌법에 명시된 직업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빼앗겼다. 우리는 ‘성별’을 누가 정하는지, 우리 사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제대로 따져 물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 ‘성별’에 대한 치열한 사고가 필요하다.

트랜스젠더 군인과 여대생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성별화된 사회임을 자각하게 해줬다. 문화만이 아니라 공간과 직업도 이분법적인 성별로 나눠 있다. 우리 사회가 ‘특정성별을 위한 공간’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즉 군대는 남성의 공간이고, 여대는 생물학적 여성의 공간으로 구조화됐다. 이들은 이러한 사회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트랜스젠더 군인의 존재는 ‘군대는 남성의 공간’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낸다. ‘여성스런 남성’과 ‘여성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사람’도 군대 생활을 이미 했고, 여러 여성들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군대는 이제 ‘특정 남성’만의 공간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은 성별(여성)의 기준이 맞는가 질문을 던진다. 사회가 이분법적인 성별로 구조화됐기에 만들어진 공간의 구획과 직업의 구획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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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채지민 기자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가부장사회는 유무형의 제도와 관행으로 성별(여성/남성)을 두 개로 구분해 왔다. 그렇게 구분해서 역할(권력)을 배분하며 (억압과 차별의) 질서를 유지했다. 남성들에게 정치적·사회적·문화적·경제적 권력을 집중적으로 주었다. 그 결과 여성들이 차별받고 2등 시민으로 취급받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 즉 보통투표권이 매우 늦게 주어졌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시민권의 상징인 투표권조차도 이러한데 다른 권리는 어떻겠는가. 실제 한국 100대 자산가나 국회의원, 장관 중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 비중만 살펴봐도 성별 권력 차가 극심하다는 건 분명하다. 며칠 전 고용노동부가 조사한 결과에도, 같은 직종이나 기업 내 성별임금격차는 심각했다. 특히 제조업과 교육서비스 영역의 경우,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50%밖에 안 됐다.

 

이분법의 함정과 동일성의 신화 그리고 혐오

트랜스젠더여성의 여대 입학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누가 여성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신체가 아닌 사람은 ‘진짜 여성’이 아니므로, 생물학적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일부 여성들이 비난했다.

성별이분법이 체계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수많은 ‘다른 여성들’을 보지 못한다.

성별은 두 개라는 편견에 갇혀, 익숙해진 ‘특정 여성’만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여성들은 불평등을 낳은 성별 권력체제에 싸우면서, 당사자인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구체화하면서 차별의 실체를 알렸다. 이분화된 사회에서 다수를 이루는 생물학적 신체를 가진 여성들만을 가시화시키기 때문이다. 지정성별(생물학적 성별)과 본인이 인식하는(정한) 성별과 다른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은 혐오와 낙인 속에서 덜 가시화돼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분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무너뜨려야 할 적과 동지를 오인하게 된다.

또한 트랜스젠더여성(MTF)은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은 동일성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동일한 신체와 권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여성이라는 착각 말이다.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며 싸우지만, 그녀들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여성은 동일한 신체와 권력과 경험’을 가졌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상상일 뿐이다. 남성 권력에 대항하는 여성이 동일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성별이분법적 체계가 만든 편견이다. 그렇게 여성에 대한 억압은 ‘모든 여성과 약자’에 대한 억압임에도, ‘모든’을 삭제하고 특정 여성의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여성 개개인은 각각 다른 위치와 다른 정체성을 지녔다. 동일성의 강조가 차이를 무력화시키는, 삭제시키는 폭력이 발생한다.

혐오의 감정이 그렇듯, ‘낯섦’은 쉽게 타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가 낯섦을 풍부함과 새로움으로 받아들인다면, 혐오가 아니라 환대로 그들을 맞이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것이 들어오면 오염되어 위험할 것이라고 상상하고 혐오의 감정으로 넘어간다. 저들이 없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여성은 동일하다는 상상에 있기에, 다른 여성들인 트랜스젠더여성은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동일성은 현실이 아니기에, 동일성에 가깝거나 먼 존재들을 줄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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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채지민 기자

‘진짜여성-덜 진짜여성-가짜 여성’ 등으로 위계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렇게 이분법적 성별권력 관계의 위계와 동일성의 신화는 새로운 위계와 혐오를 직조한다. 수많은 피지배집단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트랜스젠더는 타자화되고 여성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애초 여성을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하거나, 동일성을 강요하지않는다면 타자화와 혐오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가부장적 권력이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신체 차이)때문이 아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배제는 가부장적 남성권력이라는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여성들 간의 경합을 강조할 뿐이다. 여성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이유는, 이분법적 성별 규범과 이러한 규범을 근거로 개인에게 사회와 국가가 제도화된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본인이 정한 성별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고 비난하고 혐오하지 않는 사회가 안전하다.

이는 장애인은 개인의 신체손상이나 기능의 저하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사고의 차이가 있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드는 비장애인중심의 사회,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는 가부장적 권력체제에 저항하되, 이분법과 동일성에 빠지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녀들의 용기에 힘입어

숙대에 합격했던 트랜스젠더와 성전환수술을 받고 군대에 복무하려고 했던 트랜스젠더 두 사람은 용기를 내어 ‘성별이분법이 잘못됐다’고 우리를 깨우쳐 줬다. 그 용기 덕에 우리는 여성의 기준에 대해, 억압적 성별 규범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으며, 동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여성의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자유와 안전은 다양한 몸과 다양한 삶이 인정될 때 보장되며, 그러할 때 모두를 억압하는 이분법적 성별체계와 성별 규범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용기에 힘입어,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회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길 기대해 본다.

 

 
작성자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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