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선 안 될 사각지대가 있다 > 보도자료


잊어선 안 될 사각지대가 있다

고성 속초 대형산불 1년 – 위기 앞의 청각장애인

본문

 
  16780_16969_3128.jpg  
 
 
▲ 대형화재 발생 50일이 넘도록 화마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국도 이정표의 모습. 이보다 시급한 복구가 훨씬 많아 산적해 있음을 의미한다. (고성과 속초 사이 7번 국도)

밤늦게까지 뉴스특보로 전해지는 강원도 화재 소식은 말 그대로 생지옥을 연상케 했습니다. 전국의 소방차 총출동이 지시됐다고 했고, 탈출에 나선 속초시민들의 긴장된 모습은 재난영화가 아닌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동이 튼 뒤에야 소방헬기들이 모두 투입됐다는 소식을 뒤로하며, 운전대를 잡고 속초로 내달렸습니다. 사상최악의 재난을 눈으로 목격하게 됐다는, 그 참상들을 직접 기록하겠다는 다짐은 무겁다 못해 비장감마저 맴돌았습니다.

국내 최장 길이(10,965m)인 인제양양터널만 지나면, 그렇게 백두대간을 통과하면 눈앞에 펼쳐질 대참사 생각에 침마저 마를 지경이었는데, 아! 터널에서 나왔는데도, 양양분기점을 돌아서 속초나들목에 도착할 때까지 어디에서도 연기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밤과 새벽 사이에 얼마나 처절한 사투가 그 광범위한 현장에서 벌어졌는가를, 매캐한 냄새만 진동하는 속초와 고성은 보여줬습니다. 경기고잔, 경기반월, 충북제천, 경북, 광주, 울산…, 제가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많은 전국의 소방차들을 한 지역에서 볼 일이 또 있을까요? 먼발치에서 봤기 때문에 ‘설마’ 했는데, 다음날 언론을 살펴보니 제가 봤던 그 소방차는 (땅끝마을) 전남해남 소속이 맞았습니다. 속초의료원 입원환자 등 145명 전원 무사 대피, 체험학습을 왔던 평택의 중학생 199명 전원 무사 탈출…. 이건 기적이라 불러야 하지만,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모든 이들이 일궈낸 국가재난 극복기가 분명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한 가지 상념만 떠올랐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 ‘즉각 탈출하라’ 한마디만 했다면, 그렇게 전원 밖으로 탈출하고 그들을 구조할 구조선과 헬기들이 적시에 배치됐다면, 그래서 ‘탈출 과정에서 경미한 부상자 몇 명이 발생했지만 전원 무사히 구조됨’ 정도의 소식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우리는 노란리본 자체를 만날 일도 없었고 그런 침몰사고가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고 지냈겠죠. 분노할 일도, 슬퍼할 일도, 기억하고 또 기억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전국에서 총 872대가 달려와 생사의 사투를 벌인 뒤, 고속도로 길을 따라 묵묵히 되돌아가던 소방차들 속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영웅은 바로 그들입니다.

  16780_16961_226.jpg  
 

사진 설명 : 리조트 숙소에서 긴급 탈출한 평택 현화중 학생들을 태운 7대의 버스 중 1대가 전소됐고, 화재 발생과 동시에 밖으로 뛰어내린 학생들은 나머지 버스에 나눠 타서 새벽에 평택의 학교로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수학여행에 들떠 있었을, 다가오는 화마의 공포에 온 몸을 떨었을 그 학생들이 타고 있다가 전소된 버스의 내부 모습입니다.

- <함께걸음> 2019년 5월호 ‘사진 한마디 - 잊지 않아야 할 얼굴들’ 원고 전문

 

왼쪽 면에 인용한 2019년 봄의 기사 내용과 같이, 고성과 속초를 휩쓸었던 대형산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코로나19의 공포로 인해,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보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고, 같은 위험에는 매번 방치되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대형산불이라는 위험, 신종바이러스의 공포, 거기에 앞으로 어떤 재난이 얼마만큼의 규모로 닥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머물러 있다. 그 한가운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저녁에 대형산불 발생, 아침에야 등장한 수어통역사

강원도 고성과 속초의 화재가 국가적 재난 수준으로 확대되던 2019년 4월 4일 밤, 긴급히 뉴스속보를 편성한 각 방송사들의 화면에서 보이지 않았던 건 수어통역이었다. 재난방송을 책임지고 있는 KBS마저도 수어통역은 다음날 아침에야 시작됐고, MBC와 SBS는 훨씬 늦게 수어통역사가 방송화면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장애유형을 가진 이들도 긴급한 대피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어통역이 없는 상태에서 청각장애당사자들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상황을 속초시수어통역센터 전영미 팀장은 아래와 같이 기억한다.

“4일 저녁 8시경 휴대전화 긴급대피 안내문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됐고, 화재 소식과 함께 직접 화재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빨간 불빛이 번져가는 게 눈에 보였고, 가스통들이 연이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올 때는 무서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화재 발생 두 시간 정도 지난 후부터 강풍을 타고 탄내가 저희 집까지 날아와 그 냄새를 맡게 됐을 때, 온 몸으로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저희 집은 속초해변 근처로, 화재발생지역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그 냄새가 몰려오는 것에 공포감이 급습했다.”

해당관청의 연락이나 대피지시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화재발생 2시간 뒤의 안내문자가 전부였다고 한다.

“사무실 직원들의 단톡방에서 서로 분담해, 각 통역사별로 이용자들에게 영상전화를 했다. 산불 소식을 전하고 어서 대피할 것을 안내했다. 뉴스속보에서 수어통역사가 나와 알려주는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회원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워가면서, 회원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16780_16968_2658.jpg  
 
 
▲ 멀리서 본 겉모습은 멀쩡하게 푸르른 나무의 모습이지만, 가까이 가서 확인한 나무의 안쪽은 숯이 된 상태로 완전히 불타버린 채 남아 있다. (속초시 영랑호 서쪽 지역)

수어통역사들의 발 빠른 대응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장애당사자들은 없었지만, 한 빌딩에 입주해 있던 속초농아인교회가 전소됐다는 소식이 이들에겐 가장 현실적인 피해상황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등록 현황(2018년)에 따르면 속초시엔 4,936명, 고성군엔 2,325명의 장애당사자들이 살고 있다.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나 안내문자는 전달된다. 하지만 전동휠체어 사용자가 접근가능한 대피시설이 있는지, 배리어프리의 이동편의시설이 있는지 여부는 안내되지 않는다. 청각장애를 가진 농인들의 경우는 문장 이해력이 없는 이들에게 방송자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어통역이 없는 뉴스속보 대신, 휴대전화 화면에 집중해야 하느라 상황파악이 더욱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요구는 권리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

“재난이 났을 때 청각장애인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치명적이다. 야간의 주택화재에서 청각장애인이 희생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미리 대처를 못하거나, 대처한다 해도 너무 늦어버린 상태가 돼서 피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고성 속초 대형산불 당시 정부가 발표하는 정보를 제때에 확인할 수 없어,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극도의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는 현재의 코로나19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보가 불안정하니 다들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보건소는 물론 동네 병원에 가도 소통할 방법이 없다. 감염우려 때문에 수어통역사들의 동행통역도 안 되고 있다. 약국에서 약을 사먹는 것으로 몸의 이상을 참고 해결한다는 의견들이 많이 들어온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의 김철환 활동가는 그나마 다행인 게, 이전 정부보다는 훨씬 빠르게 대응하는 현 정부의 대처라고 평가했다. 여러 차례 긴급히 진정과 민원을 냈는데, 많은 부분들이 받아들여져서 현장에 반영됐다고 한다. 지난 2월 28일자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영애 위원장의 명의로 발표한 긴급성명이 대표적이다. 당시까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등의 정부 공식 브리핑에서 수어통역사의 수어통역을 방송화면 안에 넣지 않고, 브리핑을 진행하는 인물한테만 초점을 맞추는 화면 구성이 계속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긴급성명에서 ‘국가는 일상에서 정보접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여러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가 재난 관련 정보를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편의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명시하고, 재난상황에서의 정보는 개인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될 수 있음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 성명 발표 이후에야 비로소 각 방송화면에 수어통역사들의 모습이 화면에 담기기 시작했다.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서비스가 있다 해도, 공적인 전달체계만으로는 지역의 장애인들에게 충분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서비스는 직접 요구하지 않으면 받기 어려울 경우가 많다. 자신의 어려움을 외부로 알리지 않으면, 누구든 그 어려움을 모르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애유형과 관계없이 신체적 제한을 가진 입장이라면, 자신의 상황을 먼저 밝히고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미리 살펴봐야 한다.”

고성과 속초의 대형산불, 포항지진, 코로나19가 최근과 현재의 재난이라면, 메르스와 신종플루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 거기에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대형사고는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사건과 사고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만반의 준비는 갖춰져 있을까? 고성 속초의 대형산불만 예로 든다면, 1년 전과 무엇이 얼마만큼 바뀌어 있을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보건복지부의 담당기관, 행정안전부의 담당기관, 속초시와 고성군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막 초대형산불이 재발했다. 그렇다면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6780_16970_3335.jpg  
 
 
▲ 지역 주민들과 외지 관광객들에게 맛집으로 유명했던 한 음식점 주방의 모습. ‘앞 접시’들이 모두 파손된 채 한데 쌓여 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기자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연월일 : 2007년6월26일  |  발행인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성재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성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태곤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정보공유라이선스 2.0:영리금지ㆍ개작금지'를 따릅니다. banner_temperary.gif
Copyright © 2020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