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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도 실패할 권리가 있다"

[사람사는 이야기] 자립생활 운동가 김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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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가 내린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비를 맞아야 대화가 진행되는 공간인가 보다.
국회의원회관에 있던 때도, KBS 본관 로비에 있었을 때도, 이번에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자리를 잡을 때도, 비는 약속된 만남인 양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오면 나름 운치가 있고, 대화 분위기도 훨씬 부드럽게 진행될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람사는 이야기’는 <함께걸음>의 표지 촬영과 연결되어 있기에 가급적 맑은 날씨이기를 내심 기대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역시 비를 피해서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과정이, 인터뷰의 시작과 끝으로 연결됐다.

주인공과 만나기로 한 자리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공원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촬영할까 돌아보는 사이에, 하늘은 이미 먹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징크스라는 건가? 몇 분 채 지나지도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조금 늦게 도착한 주인공과는 예외 없이 비를 맞으며 인사를 나눠야 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김준우 -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교육국장.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고, 맑은 눈빛으로 날씨 얘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를 피하며 공원 한쪽에 잠시 머무르다가, 인근의 사무실에서 먼저 대화를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자리를 함께 옮겼다.

실내로 이동한 뒤 촬영 준비를 하면서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는데, 김준우 씨의 표정과 몸짓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당당하기만 했다. 보름 전 처음 소개를 받아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인데도, 표정이나 눈빛에 여유 같은 게 넘쳐흘렀다는 것.

75년생에 93년산

당시의 그 기억을 떠올리며, 첫 질문으로 장애를 언제 갖게 됐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상식의 틀을 깨는 한마디였다.

“저는 93년산이거든요. 75년생 93년산이라고 해요. 정확히 말하면 93년 11월산이에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갸우뚱하자, 김준우 씨의 부연설명이 뒤따른다.

“태어난 건 1975년인데, 장애를 얻은 건 1993년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요약하며 말씀드리곤 합니다.”

그러니까 ‘75년생 93년산’이라는 건 ‘75년생(生)에 93년산(産)’, 즉 93년에 장애를 갖게 됐다는 의미란다. 대화의 시작부터 한 방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장애를 그렇게 속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제가 수능 1세대인데… 수능을 친 다음날 교통사고가 났어요.”
떠올리기는 싫겠지만 당시 상황을 얘기해 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으니까, 너무 오래 전 일이라며 얼마든지 편하게 말할 수 있단다.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앞에서 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어요. 저는 차의 앞 유리에 머리를 박으면서 목이 부러졌고요. 뒤에 탔던 친구는 차의 뒤쪽으로 날아가서 천만다행으로 괜찮았죠.”

경추 3번과 4번 골절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목 아래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완전 마비 상태로 지낸단다. 어깨만 살짝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무런 감각도 없는 몸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 이전의 김준우라는 학생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으니까,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답한다. 평범한 학생이 무슨 오토바이를 탔냐고 되물으려니까, 그의 입에서 먼저 설명이 이어진다.

“오토바이는 통학(通學)용이었어요. (고향인 경북 대구의) 학교가 한 시간 넘게 걸리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거리라서 오토바이로 다녔던 거죠. 고등학생이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냐 하면서, 거의 대부분 폭주족을 연상하시던데….”

자신이 폭주족 같은 부류가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변론해야겠단다.
폭주족의 전제조건 세 가지라는 게 있는데, 자신은 하나도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째로 헬멧을 안 쓰는 게 그들 나름의 규칙(?)인데 자신은 썼었고, 오토바이 면허가 없어야 하는데 자신은 면허가 있었단다. 세 번째로 시끄러운 소음을 유발하기 위해 불법적인 개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오토바이를 탔었다고 한다.

“그 세 가지 조건에 하나도 해당이 안 되기 때문에, 저는 폭주족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고 제 심정을 말씀드리곤 하죠. 헬멧을 안 썼다면 차 앞 유리에 부딪치는 순간 박살이 났을 거예요. 다른 데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목뼈만 부러진 것이니까요. 헬멧을 썼기 때문에, 그나마 머리 하나는 건지게 됐거든요.”

    ▲ ⓒ채지민 객원기자 교통사고로 인해 찾아온 전신마비, 그렇게 시작된 장애인으로의 삶

그렇게 말을 하며 껄껄 웃는다. 자신의 장애 발생 상황을 얘기하면서 웃음이 동반될 수 있다는 거…, 그건 흔히 경험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런 상황을 극복해가는 피나는 재활의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웃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표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준우 씨는 그런 과정을 이겨낸 인물이리라는 확신이 그때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장애 시절의 삶은 그냥 평범한 가정에 부모님과 형님과 여동생, 그렇게 2남 1녀의 가운데 위치로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중3시절에 아버지가 심한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그렇게 계속 누워 계시는 모습을 생활 속에 접하면서, 자신이 장애를 갖기 이전에 이미 집안에는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되고 있었단다.

“그런데 제가 고3 때 사고가 났잖아요. 사고를 당한 뒤 대구에서 1년가량 병원 생활을 했고, 서울 신촌세브란스에 와서 재활치료를 받고 나니 1년 반 정도가 지난 뒤에야 퇴원을 하게 됐어요. 집에는 절대 못 가겠더라고요. 왜냐하면 한 집안에 장애인 한 명 있는 것도 비극인데, 두 명이 있게 되면 가족들이 다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니까요.”

이미 비장애 시절에 아버지 상황을 목격했고, 그 남은 식구들의 삶도 다 경험했다 하지 않았던가. 김준우 씨는 집에 간다는 것이 자신한테나 가족들한테나 둘 다 못할 짓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한다. 그래서 집에 가지 않는 전제로 알아본 게 시설이었단다.

가족 생각해 선택한 곳이 ‘시설’. 그러나...

“아, 나는 집에 안 간다. 집에 가면 둘 다 죽는다. 그러니까 나 혼자 죽자…. 그래서 시설을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무데도 없더라고요.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능력이 없어야 하는데, 부모 형제가 다 있는데다가 입소 조건마저도 만 18세 이하였어요. 제가 스무 살이 넘은 입장이었기에 갈 수 있는 데가 없어서, 아는 사람을 통해 경북 고령에 있는 시설로 어렵게 들어가게 됐어요. 시설에 들어간다는 것도 소위 ‘빽’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렇게 어렵게 수소문한 뒤 시설로 들어가기는 했는데….”

그런데 김준우 씨는 시설에서 한 달 만에 나왔단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제 나는 시설에 있다 죽는다.’ ‘나는 이제 안 나온다.’ ‘내가 나올 때는 죽어서 나오는 거다.’ 하며, 굳은 결심으로 친구들과의 연(緣)까지 다 끊으면서 시설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첫날 밤 엄청 울면서 이런 생각 하나만 떠올렸단다. 내가 왜 이런 데 들어와 있나….

“사실 시설이라는 곳이 의식주는 다 해결돼요. 밥 잘 나오고 기본적인 게 해결되긴 하는데, 사람이라는 동물이 의식주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제일 힘들게 노력했던 것이 ‘아무 생각 안 하고 지내자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생각을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니까요. 뭘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던 거죠. 그때 제 나이 스무 살인데 공부도 하고 싶고 나름대로의 꿈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거기서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생각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김준우 씨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생각이 떠오르는 존재라고. 그걸 지우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했는데, 몇 주 정도 지나고 나니까 자신의 하루 생활은 먹고 자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모습으로 뒤바뀐 상태였단다.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스스로 가장 힘들게 노력했던 건데도, 일순간 아무 생각 없이 하루가 돌아간다는 걸 깨닫게 됐다는 것, 그 시점에서 매몰찬 새 결심이 내려지게 됐다고 한다.

“아, 내가 이런 삶에 적응되어버리고 만다면 인간 김준우는 없어진다. 그런 생각에 지배되기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더 적응되어버리기 전에, 이 시설에서 나가자는 결정을 내리게 됐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사고(思考)하면 살 수 없는 장애인생활시설, 그곳을 박차고 나오다

정말 한 달 만에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냐고 물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됐다고 답을 한다. 결단을 내린 다음 시설에서 나올 때… 그 안에 함께 있던 친구들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단다. 거기에 있는 친구들은 갈 데가 없거나 부모가 없거나 일방적으로 버려진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갈 곳(집)을 정해놓고 나온다는 게 그들 앞에선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저한테는 저의 장애가 최고의, 최악의 장애였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는 또 다른 장애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시설 안의 친구들은 중복장애인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뇌성마비에 시각장애와 같은…. 저는 그런 현실 앞에서 아주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나도 진지하게 신경을 써야겠다. 왜냐하면 저의 집안은 고혈압 집안이었거든요. 저의 몸 상태에서 언어장애가 온다거나 뇌가 어떻게 된다면 끝장이니까요. 그래서 집에 온 다음에도 활동을 많이 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김준우 씨가 장애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단다.
일반적으로 중도장애를 갖게 된 이들은 장애를 수용하기까지 4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첫 단계가 부정(否定), 그 다음이 분노, 다음으로 체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게 수용이라는 단계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첫 수술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의사가 대뜸 한다는 말이 ‘너는 평생 침대에 누워서 살아야 된다.’라는 한마디였단다. 덧붙이며 ‘현대의학으로도 더 할 게 없다.’는 최종 선고가 뒤따랐다고 한다.

수술은 어떤 수술이 어떻게 진행됐냐고 물으니까, 목뼈 두 칸이 완전히 으스러졌기에 부러진 걸 일단 빼내고 나서 한 칸은 인공뼈를, 또 한 칸은 골반뼈를 잘라서 끼워 넣는 대수술로 진행이 됐단다. 그래서 지금 엑스레이를 찍어도, 쇠나 철사 같은 걸로 이어놓은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단다.

“의사가 그렇게 얘기할 때,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반발을 했으니까요. 비장애 시절에 저는 운동을 상당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물리치료를 열심히 하다 보면 좋아질 것이다 하며, 의사의 말을 애써 무시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며 참았는데도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두 번째 단계인 분노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당시가 1994년이었는데, 북한에서 ‘누구의 심장이 멈추었다!’라는 현대사의 전환점이 등장하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상황전개가 벌어지기에, ‘그래, 좋다. 다 같이 죽자!’ 하는 분노에 휩싸이게 됐었단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분노는 머릿속으로만 진행하다가 접어두는 나날로 이어졌다는 얘기가 실감나게, 또한 안타깝게 연결됐다.

“그런 단계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망이나 분노의 모습을 보여 주긴 싫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오면 겉으로는 웃으면서 얘기하고 나서, 밤에 혼자 우는 게 일상적인 나날이었죠. 곁에 있던 사람들 모두 잠든 다음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우는데…, 그런데 눈물은 흘리면 그만인데 콧물은 제가 닦을 수가 없잖아요. 그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밤새 울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짓다가, 그렇게 분노를 계속 쌓아가며 삭혀가는… 그런 기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체념의 단계인데, 그때부터는 죽으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작심하면서 실행까지 옮기게 됐다는 고백이 심각하게 이어졌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면 차라리 죽자. 더 이상 남겨진 희망이 뭐가 있는가. 그런데 고2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던 교회 생활이 바탕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집중적으로 원망의 화살(?)이 날아갔던 모양이다.

그 분노의 표현은 단 한 가지였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지금 나를 죽이던지, 아니면 손이라도 움직이게 해주던지, 그 둘 중에 하나는 이뤄지게 해줘야 할 게 아닌가. 도대체 이 상태로 나보고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 속에 생존을 이어가기만 했다는 의미이다.

김준우 씨는 죽고 싶었던 당시의 상황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회고했다. 죽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속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나날도 길게 언급했고, 죽기 위해 실제로 감행했던 자살시도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되짚었다. 10분이 넘는 그 독백 내용을 다 기록해놓기는 했지만, 그 실제 내용을 이 지면에 옮겨 적는 건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다. ‘그럴 만큼 힘들었다.’는 마지막 그의 한마디로 그 모든 걸 대체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하면 죽을까?’ 그것 하나만 몰두하다가, 죽음 자체도 나의 의지대로 안 된다는 걸 최종 확인한 다음부터는 생각이 바뀌게 됐어요.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찾는 과정으로 인생의 관점이 바뀐 것이죠. 그러는 동안 1년 정도 이런 기도만 했습니다. ‘제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죠?’ 그게 생과 사의 갈림길 다음에 찾아든 화두였습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골수조차 기증할 수 없는 사회적 차별 경험하다

그러다가 어느 5월의 TV 방송을 보면서, 어린이 새 생명 프로그램 같은 걸 확인한 다음 결론을 내렸단다. 내게 남아 있는 건 몸뚱어리 하나다. 그래, 맞다. 이것이다. 내 몸을 기증해서 신장이나 골수 기증 같은 걸 할 수 있겠다.

“정말 엄청 기뻤어요. 제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런 방송을 보고 확신을 가지면서 장기기증센터에 전화를 했죠. ‘내가 이러이러한 상태인데 이런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거기에선 바로 결정이 안 되고, 직원회의를 한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엄청 기뻤던’ 것만큼, 정말 ‘엄청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전해진 그들의 대답은 김준우 씨의 어깨 힘을 빠지게 만드는 내용뿐이었단다. 지금까지 중증장애인이 기증한 사례가 없었고, 한 달 정도 입원을 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 것이고, 장애인으로서 몸이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등등.

그런 좌절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누군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려 보지 않겠느냐고. 그런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나름대로 찾던 인생의 길을 잠시 뒤로 하며 그림을 시도하게 됐단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욕망을 다시 떠올리게 돼서 방송통신대학교 학생이 되고, 자신의 미래 꿈이 무엇인지를 결정짓는 계기가 비로소 등장하게 됐다는 고백이 뒤를 이었다.

“상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걸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상담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 대학은 매일 가야 하는데 자원봉사자를 구하기도 힘들고, 매일 나갈 힘도 없고 그런 체력도 안 되고…. 그래서 방송대를 지원했어요. 거기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죠.”

물론 원하던 대로 다 이루어진 건 아니다. 자원봉사자 1명을 구하기 위해 수십 통의 전화를 해야 했고, 구한 다음에도 일일이 확인 전화를 해야만 했단다. 늦게 오거나 깜박했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란다.

방송대 시험을 보던 날 오전 9시 반에 오기로 했던 자원봉사자가 오지 않아서 전화를 했더니, 그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다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랴부랴 시험장에 찾아가기는 했는데, 시험 끝나기 10분 전에 입실했기에 시험지마저 보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던 상황도 있었단다.

“아,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던 와중에, 서울에서 중증장애를 대상으로 하는 동료상담교육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상담교육이려니 하며 올라갔는데, 거기에서 자립생활이라는 걸 얘기하더라고요. ‘자립생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라는 확신이 딱 떠올랐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줄기 빛을 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수도권, 특히 수도 서울 편중의 대한민국 시스템에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립생활이라는 목표를 향해, 그 당시 무궁화호 기차를 4시간 타고 올라와서 강의와 토론을 거치고 나면 힘을 얻으며 속이 후련했단다. 그런데 그 아이템을 가지고 지역으로 돌아가서 느낀 그대로 강변을 하면, ‘그건 꿈이다.’ ‘우리나라에선 절대 불가능한 얘기다.’라는 대답만 듣게 되며 힘이 있는 대로 빠졌다고 한다.

“당시 정립회관에서 ‘자립생활리더연수’라는 6개월짜리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것이 저의 길이었습니다. 1년 가까이 가족들을 향해 끊임없이 설득했어요. 집을 나가면 죽는다는 식의 가족 걱정을 뒤로 하며, 저는 저의 각오와 진심을 밝혔죠. ‘내가 원치 않는 삶을 10년 사느니, 내가 원하는 삶을 1년이라도 살다가 죽고 싶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포기하듯 결국 승낙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2003년 5월 말에 모든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원치 않는 10년 사느니 원하는 1년 살겠다!”

일본까지 갔다 오는 연수를 모두 마칠 시점이 되고 나니, 당장 급한 건 자립생활을 실행할 집이 없다는 사실이었단다. 서울의 집값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준비한 자금에 맞게 찾아다니다 발견하는 집이라고는 거의 대부분 반지하였다고 한다. 휠체어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물 말이다.

도저히 맞지 않는 조건 속에 갈등하다가, 여기저기에서 부채 비슷하게 끌어 모아 88장애인올림픽의 선수촌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서울 문정동의 시영아파트에 안착하게 됐단다. 이후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3개월 자원봉사를 마친 뒤 정식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됐다 한다.

적게나마 봉급을 받게 되고, 동료상담가의 자격으로 장애인 상담 및 교육, 더불어 사무실 업무도 담당하면서 이 사회의 입성을 성공적으로 시작하게 됐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3년 가까이 직업으로써 일을 했죠. 그런데 중증장애인으로서 일을 한다는 건 정말 많이 힘들더라고요. 가장 바쁠 때는 일주일 정도 야근을 하고, 새벽 두 시에 들어가는 경우도 잦았어요. 생전 처음 코피라는 것도 흘려 봤죠. 방송대 공부와 일을 병행한다는 게 너무 힘든 과정이었거든요.”

2004년에 방송대를 졸업한 뒤 상담 하나로 전공을 정하기엔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지는 것 같아, 사회복지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단다. 마침 미국에서 자립생활을 전공하고 돌아온 모 교수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 교수가 재직하는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에 2006년 입학하게 됐다 한다.

주경야독의 담금질 기간을 보내면서 자립생활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논문도 그 주제로 작성해서 올해 초 수석졸업이라는 영광과 함께 석사학위를 받게 됐단다. 대학원 시절에도 3명이 받던 장학금을 그 역시 받았다 하니, 얼마나 열심히 전공을 파고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지금 김준우 씨는 그의 학위논문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프로그램 개발 및 효과성 평가’를 기본으로 하여 방송 활동을 하고 있고, 각 지역의 센터 프로그램을 실제 진행하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교육국장의 직책을 맡아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죽기 살기로 시작한 공부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가슴 속에는 어떤 미래가 설계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1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은지를 물었다.

“저한테는 자립생활센터를 직접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거든요. 실제 자립생활을 하고 있고, 직업적인 실무 경험도 충분히 쌓았잖아요. 제가 자립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은 말을 했어요. ‘왜 힘들게 이런 생활을 하냐? 집에서 편안하게 살지.’ 당시에도 그랬지만, 저는 지금도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게 저의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비장애인의 인생 사이클은 대부분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를 나와서 직장에 다니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사는 것 - 그게 보통의, 평범한 이들의 일반적인 삶의 공식이다.

거기에서 김준우 씨의 반론이 제기된다. 장애인에게 가장 힘든 게 바로 그런 인생 사이클이라는 것이다. 비장애인들한테는 가장 평범한데 장애인들한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공식이며, 그런 인생 사이클로 사는 장애인이 있다면 그 사람만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상의 틀이 너무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것.

“제가 자립생활을 고수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비장애인들에게 평범한 공식이라면, 장애인들에게도 그게 평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장애인들도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제가 자립생활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을 모두에게 하는 겁니다. 자립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세 가지 있죠. ‘자기 선택’, ‘자기 결정’, ‘자기 책임’. 모두 당연한 말인데도, 왜 굳이 이런 세 가지 단어를 중요시하는 걸까요?”

바로 장애인에게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란다. 어디에서 살지, 무엇을 먹을지, 어느 학교를 다닐지, 누구와 살지, 그런 모든 일상과 삶의 선택을 장애인 스스로 내릴 수 없다는 게 우리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사회적인 지원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대목은 저절로 경청하게 될 만한 내용이었다.

“그동안 장애인의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만 취급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 가족들한테 부담을 지웠던 것이잖아요. 가족 구성원들이 장애라는 짐을 모두 함께 짊어지며, 심지어 풍비박산(風飛雹散 : 사방으로 날아 흩어짐)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죠. 장애인들한테 ‘이 사회에 적응을 해라!’라는 말 자체가 틀린 겁니다.

자립생활에서 강조하는 건 ‘장애인에게 맞게 이 사회를 변화시켜라!’이죠. 사회 환경을 장애인에게 맞게 고치고 만들라는 겁니다. 자립생활을 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사회에 요구하고 개선책을 밝혀야 합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장애인도 실패할 자유가 있다”

김준우 씨는 자기 혼자 살아가려고 자립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란다.
자신과 같은 어떤 중증장애인이라도 자립생활을 원한다면 누구나, 누구든지 할 수가 있는 시스템으로 사회를 만들겠다는 운동적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밝지 않은 상황이다. 경증장애의 경우는 독립적인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중증장애는 도전보다 난관을 먼저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가 자립생활을 하면서 좋아하게 된 말이 있어요. ‘장애인도 위험에 노출될 권리가 있다.’ 더불어 비슷한 뜻으로 ‘장애인도 실패할 자유가 있다.’ - 저는 그 두 말을 가슴에 담고 삽니다. 지금까지는 예를 들어 비가 온다 하면 식구들이 못 나가게 하잖아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게 하고, 가족들은 언제나 장애인의 외출을 막는 역할을 담당해 왔죠.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당연히 하는 거잖아요. 비가와도 일이나 약속이 있으면 나가는 게 당연한데, 장애인들한테는 왜 그게 안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이 사회가 뺏어간 장애인들의 권리라 한다.
바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자유’, 또한 ‘실패할 수 있는 자유’. 자립생활의 목적 역시 그것이란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 실패는 또 다른 경험 중의 하나라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며 실패할 기회나 시도조차 없는 상황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게, 바로 장애인들이 빼앗기고 있는 그들의 기본 권리라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길을 잘 모른다고들 말을 많이 하죠. 당연한 얘기예요. 혼자서 스스로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누가 인도해 주면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 게 전부였죠. 보통의 비장애인들이 길을 잘 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길을 잃어 보기도 하고, 잘못 들어서는 실패도 해 보면서, ‘아, 이쪽 길이 아닌가 보다.’ 하며 하나씩 익혀갔던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회는 장애인들한테 그런 기회를 안 줬어요. 그래서 장애인들을 어린아이 취급하게 되고 완전한 성인으로 안 보게 됐던 것이었죠.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도 없게 만든 건 바로 이 사회입니다. 사회적인 잣대로 장애인이 장애인으로서 살고 규정되는 것이지, 장애가 원래 나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역시… ‘교육국장’이라는 직함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고, 흔한 말로 ‘받아 적으면서 밑줄을 그어야 하는’ 핵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의 가슴 속엔 어떤 생활신조 같은 게 담겨 있을까. 좌우명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를 물었다.

“비슷비슷한 의미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저의 휴대전화 첫 화면에는 ‘진실은 통한다.’는 말이 찍혀 있어요.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해도 진실을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반드시 통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또 한 가지는 ‘믿음대로 된다.’입니다. 제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 또한 믿음의 결과일 거예요.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을 꿈꾸어 왔을 때마다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을 가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김준우 씨는 말한다. 중도장애인들이 자기 비하와 회의(懷疑)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안타깝다고. 장애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단다.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이기에, 개인적인 감정과 좌절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다. 장애는 어떤 환경에 있는가에 따라 장애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있으면 장애를 느끼지만,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 있다면 장애가 아닌 삶이 된다. 차이는 바로 사회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저는 저의 장애를 하나님의 뜻이고, 필연적인 것이며, 숙명이자 삶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제가 가장 심하게 좌절하고 있던 시절에 하나님한테 이런 절규를 계속 했었죠. ‘제발 손이라도 하나 쓸 수 있게 해달라!’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만약에 손을 쓸 수 있었다면… 그 손이 저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죽음 이외엔 아무런 대안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은 저의 손을 못 쓰게 하신 게 아니라, 제 손으로부터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제 손을 꼭 붙잡고 계셨던 겁니다. 진실과 그 믿음이 저로 하여금 장애를 수용하고 극복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김준우 씨가 처음 꺼냈던 첫 마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75년생 93년산’이라 했던 그 표현…. 자신의 장애를 달관했다고 할까? 아니면 초월했다고나 할까.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렇게 많은 의미를 함축적(含蓄的)으로 담고 있는 한 마디를 접하게 된 건 제법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세상에 던지는 냉소, 더불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반어법의 역설로 뒤집어버리는 무게감이 동시에 전해진다는 것 - 그건 세상을 직접 부딪쳐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라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93년산’이라 했던 그의 인생에서 완성이라는 이름이 정해질 미래를 기대해 본다. 완성의 그날에는 ‘2011년 달성’과 같은 수식어가 그 표현에 추가되지 않을까?

원고를 마감하며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 하나가 불현듯 떠오른다. 록(Rock) 음악이라도 하는 음악인처럼, 아니면 깊은 인생의 도(道)를 찾는 구도자 모습처럼 머리를 길렀는데, 왜 머리를 기르는지를 묻는다는 걸 깜박 잊었다. <함께걸음> 9월호가 나오면 그를 만나서 남아 있는 이 궁금증을 풀어야겠다. 머리는 왜 기르는 거냐고.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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