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면 열린다? 두드려야 열린다! > 세상, 한 걸음


두드리면 열린다? 두드려야 열린다!

[사람사는 이야기] 굿잡자립생활센터 소장 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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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요즘 일정이 너무 바쁘시던데, 오늘 시간은 괜찮으세요?”
“오늘은 프리(free ;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함께걸음>이 온다고 해서 일부러 오후 일정을 ‘프리’하게 해놨습니다.”

간만에 듣는 반가운 대답이다. 매번 한정된 시간 안에 인사와 인터뷰, 촬영과 주변정리까지 단번에 해결해야 했던 스트레스를 벗어나도 좋을 희소식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쁘게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넉넉한 시간을 기대한다는 건 늘 혼자만의 희망사항으로 끝나버린다. 취재를 위해 주어지는 건 길어야 1시간 내외가 대부분이고, 그 짧은 시간 안에 표지 이미지 촬영을 포함한 모든 작업이 ‘어떻게든’ 마무리돼야 한다. 그런데 이건 정말 간만에 듣는 희소식이 아닌가. ‘프리’라니!

사실 ‘사람사는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은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떤 장애를 언제 어떻게 갖게 됐는지,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걸로 대화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다른 언론매체라면 아주 짧게 언급하거나 아예 ‘노코멘트(대답하지 않겠음)’로 거절하겠지만, <함께걸음>의 마이크 앞에서는 모든 주인공들이 스스럼없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털어놓는다. 일상 속에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걷어냈음이 훤히 드러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대화가 진행되는 중간마다, 주인공 입에서는 아주 작은 감탄사가 갑자기 흘러나오곤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도 잊은 채 지내왔던 오래 전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런 작은 감탄사가 한두 차례 반복된 다음부터는, 자신의 심정적 울타리 안에 가려두었던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어느 매체를 통해서도 발언한 적이 없었다는 진솔한 독백과 고백은, 그러한 작은 감탄사들을 통해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는 셈이다. 물론 이번 12월호 역시 마찬가지 만남이 된다.

지우고 싶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

김재익 - 사단법인 해냄복지회 굿잡(Good Job)자립생활센터 소장, 직업재활학회 이사, 대구대학교 부설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개인을 소개하는 명함 속 직책만 보더라도, 이 사회 안에서 정말 바쁘게 활동하실 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1시간 40분 정도 진행된 대화의 자리에서, 10분도 못 참고 울려대는 건 그의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계시다는 건 알고 찾아갔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증상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아 보였다. 서 있는 자세까지는 가능한데, 발걸음을 옮기는 게 무척 힘겨워 보였기 때문이다. 직원의 도움으로 소파에 앉은 이후 모든 대화는 편하고 자연스럽게 진행됐지만, 걸어서 이동하는 건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는 모습이었다.

“저는 뇌병변장애 1급입니다. 태어나고 두 달 있다가 열병을 앓아가지고, 뇌가 충격을 받아서 그때부터 장애를 입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다른 형제분들은 장애가 없으신지, 별다른 계산 같은 걸 헤아리지 않고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김재익 씨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한숨이 뒤따랐다. 순간 ‘아차!’ 하는 낭패감이 떠올랐다. 언급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진 거구나….

“누님이 장애가 있습니다. 같은 뇌병변인데… 증상이 좀 심하죠. 이건 제가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건데, 자립생활하면서 나중에 체험홈을 통해 누나한테 자립생활의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지금 시설에 계신데 연세가 많으세요. 누님을 지역사회에 나오게끔 여건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많은 인터뷰를 해봤지만…, 이건 정말 제가 처음으로 밝히며 말씀드리는 겁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솔직히 난감했다. 대화의 시작점부터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다는 건, 질문자의 진행이 잘못됐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해부터 구하고자 했는데, 오히려 김재익 씨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함께걸음>인데요. 뭘….” 하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이젠 이런 얘기를 해야 할 때가 됐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전화위복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본인의 뜻이 정말 그렇다면, 어중간했던 몇 초 동안의 고민을 뒤로 지우며 질문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기한테 장애가 있다는 걸 부모님 역시 처음에는 모르셨을 텐데, 언제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셨는지를 물으니까 3년 정도 지난 후라고 알고 있단다. 3살 전후로 한쪽 다리가 이상하게 떨리고 반응이 좀 늦어서, 그때 처음으로 병원 진단을 받았고 5살 때 첫 수술을 하게 됐는데, 그때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다리 각도가 약간 들려 있다고 해서 그 힘줄을 늘이기 위한 다리 뒤꿈치 수술을 한다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하고 나니까 다리 여덟 군데를 다 잡아 째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한 군데만 한다고 해놓고 막상 수술을 하고 나니까, 다리 전체를 완전히 난도질해놓았다는 것이죠. 난리가 났죠. 다리를 째서 벌려가지고 다리 안에 나무를 박아놔서 두 달 동안 가슴까지 오는 깁스를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줄 알았대요. 제가 나중에 철학과를 가서 철학을 전공했습니다만, 그때부터 ‘아, 삶이라는 게 이렇게 고통스럽구나. 굉장히 힘든 것이구나.’ 그래서 우울증이 생겼고, 성격이 굉장히 소극적으로 변하게 됐습니다.”

그 어린 시절인데도 그런 생각이 진짜로 떠올랐냐고 물으니까, 정말 심각할 정도로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어두워진 표정, 이어지는 한숨, 거기에 천장 여기저기로 옮기는 시선은 그의 심정이 그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있음을 의미했다.

“지금 같은 경우에도 그 정도의 수술을 한다면, 네 번이나 다섯 번 정도 나눠서 해야 될 거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한 번에 다 해버린 거예요. 그 병원이 처음으로 뇌병변장애의 다리 들림 현상을 접하면서, 장애가 나을지 안 나을지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들의 실험용으로 수술을 진행한 거죠. 제가 실험용이 돼서 그때 다리를 완전히 망치게 된 거예요. 그 전까지 이렇게까지는 심하지 않았다던데….”

의료진이 상당한 전문가들이고 제대로 한다며 떠들고 다녀서, 그 얘기가 맞다는 생각에 수술을 진행했던 거란다. 결과적으로 그 수술이 몸을 망치게 만든 계기가 됐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해져서 대인적인 공포에 시달리며 불안증으로 고통 받는 나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단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중구 보수동에서 살았다는 기억, ‘헌책방 골목’이라고 떠오르는 당시 그의 추억 안에는 모든 게 충격과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이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더 심해졌어요. 더 심해졌고…. 그 전에는 자전거도 타고 여자 친구도 있어서 같이 다니고 했는데….”

당연히 이어져야 할 질문이겠지만, 병원 측에서는 어떻게 반응했냐고 물었다. 역시나 당연한 결과로 ‘모르쇠’로 일관했던 모양이다. 그 시점은 1960년대가 1970년대로 전환되던 시점, 소비자 권리나 환자의 권익보호 같은 건 아예 국가적 관심조차 없던 시절 아닌가. 더욱이 ‘장애’라는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백지상태였다고 해야 할 상황이었다. 억울함을 당하고도 호소할 방법조차 없던 시기에, 김재익 씨는 심한 표현으로 묘사한다면 ‘마루타’의 대상으로 피해를 당했던 셈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 후유증이 10년 가까이 이어졌어요. 처음 1년 반은 아예 누워서 꼼짝을 못했거든요. 지금도 수술자국이 아주 큽니다. 여기 가랑이부터 시작해서 뒤꿈치까지 왼쪽 다리에 4군데, 오른쪽 다리에 4군데 있어요. 그 후유증 때문에 경련이 일어나고 몸이 뻣뻣해지고, 그래서 1년에 절반은 누운 채로 지내야 하는 와상(臥床)생활을 해야 했거든요.”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 것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업을 하시던 부모님은, 장애를 가진 자식이 부끄러워 학교를 못 가게 하셨단다. 중증이던 누님은 그나마 서울의 모 병원 재활원에 있게 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안 좋았던’ 김재익 씨는 집에 갇혀 있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사업을 하셨던 까닭에 집은 항상 손님들 출입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방에 가둬 문을 잠가놓고 화장실도 못 가면서, 용변마저 방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단다.

“방에서 용변을 보던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제가 12살까지 학교를 못 갔어요.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에 못 다녔던 거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학교를 다닙니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그 이유가 당시에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고… 그 영향이 아주 클 겁니다.”

지금은 늦게나마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전공은 직업재활이고 장애인고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단다. 어린 시절의 얘기가 나오니까, 김재익 씨 마음이 많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당시 집에 들락거리던 소매업자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9살 때부터 생활시설에 들어가서 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됐다고 한다. 그 시설에 있으면서도 초반에는 학교 자체를 다니지 못하는 채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하루에 1시간씩 찾아와서 공부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의 영향으로 공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했다.

“12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3년 동안 월반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15살 때 학교로 처음 가서 졸업을 하게 됐죠.”

이 대목에선 그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소년 김재익은 당시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초등학교 졸업식장에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났단다. 빨리 중학교를 가고 싶어서 그랬는데, 학교의 애들은 일방적으로 놀려대기만 했다고 한다. ‘저 바보는 학교도 안 간다’고, ‘공부도 안 하던 저 바보 같은 애가 어떻게 졸업식장에 나타난 거냐’고. 그런데 김재익 씨가 그 졸업식장에서 받은 상은 ‘학교장상’이었단다. 성적이 가장 우수함을 의미하는 최고의 상인 것이다.

“졸업할 때 복수를 제대로 했지. 애들이 깜짝 놀랐거든. 나를 놀리던 애들이 더 놀라는 거야. ‘와아!’ 하면서.”
존칭으로 대화하던 그의 표현이 갑자기 평상어로 바뀌었다는 건, 그 시절의 자신감과 복수에 대한 쾌감이 절절하게 느껴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부산 대현동에 있는 대현초등학교라고, 거기 선생님이 3년 반 동안 저를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은 어디 계신지도 몰라요. 꼭 한번 찾고 싶은 분인데, 그 선생님 사진만 제가 가지고 있는데… 정말로 뵙고 싶네요. 원래는 월반을 안 시켜주는 제도였는데, 그 선생님 덕분에 열심히 해서 월반을 하게 됐거든요.”

빨리 졸업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라고, 그렇게 격려와 조언을 전해주신 고마운 선생님이 계셨던 모양이다. 그 선생님 덕분에 초등학교를 나오게 됐고,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를 가서 힘겹게나마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한다. 부모님께서도 ‘얘가 공부 좀 할 수 있겠구나’ 하며 인정을 해주셨고, 그때부터는 공부하는 생활을 밀어주기 시작하셨단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비장애 중심으로 갖춰진 학교 시스템에 있었다는 게 장벽으로 남겨진다.

12시간을 꼬박 앉아 있어야 하는 학교생활에서 제일 힘든 점은 다름 아닌 필기였단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있고 조그만 노트북을 휴대할 수도 있고 그 이외의 여러 편의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복사기마저 없던 시절이라서 애써 칠판의 내용을 적으려 하면 없어지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했단다. 선생님이 수업 진행을 위해, 필기내용을 그때그때마다 계속 지워가며 새로 썼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도 중학교 때는 필기 때문에 고생은 안 했단다. 친구들한테 밥 한 끼 사면 필기를 대신 도와주곤 했는데, 먹지를 밑에 깔고 적어주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고등학교는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까 분위기가 달랐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공책을 안 빌려주는 건 보통이고, 필기 자체를 못 따라가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다니겠다 싶어 자퇴를 하게 됐어요. 그 시기에 사춘기가 심하게 왔는데 심한 대인공포증…, 그건 당시의 저 자신에게 정말로 심각했어요. ‘내가 뭐가 될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말인가.’ 그런 심각한 갈등에 빠져 도저히 학교를 못 다니게 됐죠. 수업 내용은 아예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래서 선생님께 딱 1년만 쉬겠다고 하니까, 선생님은 1년을 쉬면 다신 공부를 못할 거라고, 절대 쉬지 말고 계속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하라며 만류하셨단다. 하지만 고교생 김재익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저는 쉬겠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접고 나서 손에 잡았던 건 바로 프로이트의 책이었단다. 자신의 병을 스스로 치료하고 싶었기에 잠재의식이라는 걸 알고 싶었고, 무의식의 세계에 있던 것들이 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장래 진로든 뭐든 뒤죽박죽이었던 자신의 삶 전체를 뒤집어보고 싶었다는 뜻이 된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때는 정치적으로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신군부가 등장하는 혼돈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내면적인 어떤 방어기제가 밀려들기 시작해서, 도저히 학교도 못 다니겠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기만 하고… 지금 보면 정신질환 비슷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집에다 얘기를 했어요.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당연히 절대반대가 뒤따랐죠. 절대로 안 된다고…. 하지만 저는 차라리 병원이라도 가고 싶었어요. 그걸 억제하느라고, 그 방어기제를 견디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상당히 힘들었어요. 이런 면도 제가 처음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걸 극복하는 데만 5,6년이 걸렸거든요.”

그런 절대적 한계상황을 뚫고 나갈 돌파구, 다시 말해 정신적 도피처는 프로이트로 시작된 독서였던 모양이다. 프로이트를 계속 접하다 보니까 인문사회과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졌고, 스스로 장애가 심하다 보니까 대인관계가 형성이 안 되며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 모든 면을 성찰하게 됐다는 것이다.

철학에 진지한 흥미를 느낄 무렵, 교육방송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하던 철학 강의가 결국 그의 눈과 귀를 휘어잡게 됐단다. 칸트가 어떻고 데카르트가 이렇고 하는 그 강의에 몰입하며, 그는 녹화를 해놓고 모든 내용을 외울 만큼 반복하며 듣는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철학 공부를 굉장히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저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한테 빠져들었죠. 한마디로 니체한테 미쳤습니다. 아주 솔직한 그의 언어, 인간적이고 인간의 힘을 최우선 강조하는 그의 철학에 매료가 됐죠. 형이상학적인 것을 논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 자체의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가장 강해질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그의 사상…. 결과적으로 그의 철학이 제가 살아가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세상으로 눈을 돌리다

검정고시를 통해 들어간 대학에서 김재익 씨는 철학과를 전공했고, 니체한테 몇 년 동안 빠져들어서 졸업할 때도 니체로 논문을 썼단다. 대학원 진학도 역시 철학이 전공이었다고 한다. 철학이 중심테마로 등장했기 때문일까? 대화의 자리는 일순간 토론의 장으로 돌변했다. K.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과 니체의 종교관이 등장하고, 니체의 철학을 무신론으로 단정 짓는 일반적인 시선을 비판하는 그의 평가가 다양한 논리로 뒤따랐다.

“니체 철학의 여러 핵심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디오니소스신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를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신이기도 하죠. 그때부터 저는 음악이라는 걸 듣게 됐고, 술도 좋아하게 됐습니다. 정열적이고 폭발적인 인생의 참다운 환희, 진지한 인간 그 자체의 본질적 삶을 요구하는 그의 철학에 매료되고 그 철학을 추구하면서, 그때부터 제 성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굉장히 소극적이었는데, 대인기피도 없어지면서 친구들이 굉장히 많아지게 됐죠.”

그렇게 말한 뒤 더 할 얘기가 있다는 듯 2, 3초 머뭇거리던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때부터 연애도 많이 했죠.” 곧장 이어진 건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렇게 세상 속에서 자신감을 얻게 된 그는, 대학 졸업반이 될 무렵 아주 진지한 이성과의 만남도 갖게 됐단다. 그가 허심탄회하게 언급한 세세한 내용까지 여기에 기록할 필요는 없겠지만, 서로 대화와 마음이 통했던 당시의 그 ‘이성’은 김재익 씨와 사귀는 동안 ‘김재익’이라는 존재를 단 한 번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단다. 장애운동을 해야겠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이 앞에서 다가오면, 저는 그 장애인을 피해 다녔어요.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난 장애인이 아니야. 난 저런 사람하고 만나기 싫어!’ 이런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거든요. 그만큼 장애를 가진 이들을 혐오했던 거예요.”

상당히 민감할 수 있는 대목이 난데없이 등장했다. 스스로 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장애인들을 혐오했다는 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반강제적으로 지내야 했던 시설생활의 기억이, 그의 삶을 지속적으로 어둡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게 답으로 제시된다.

너무나 어려운 고통 속의 나날이었단다.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외부의 높은 사람들(그 내부에서는 '귀중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한다)이 오면 옷을 깨끗하게 입히고, 밥상에 고기 좀 얹어주며 웃음을 짓게 만들고…. 그때 봤던 비리들 또한 잊혀지지 않는단다. 좋은 물품들이 시설에 들어오면 원장이라는 사람이 다 챙겨가고, 남은 게 없는 상태에서 인권 자체도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던 기억.

“저는 그 당시부터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요. 시설이라는 곳이 워낙 인권 자체가 없는 곳이다 보니까, 장애인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안주하려는 생각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거…. 그때 정말로 느꼈어요. 인간은 적응력이 참 뛰어난데,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시설에 대해 비판도 못하는 장애인들과 나는 다르다고 판단하게 됐던 것이죠. 그 생각이 참 잘못됐다는 걸 지금은 물론 알지만, 당시에는 그 장애인들을 설득시키고 교육시키면서 현실을 이해하게 만드는 노력마저 없는 현실 자체가 너무 답답했어요. 그래서 저는 ‘나는 너희랑 달라. 나는 다른 생각을 하니까.’ 이런 사고방식에 저 혼자 몰입하게 됐던 거죠.”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가 아주 못된 장애인였단다. 스스로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자신의 장애를 받아주던 이성과의 관계마저 안 좋아지면서 자살시도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자살시도 이후에는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고 했다.

딱 한마디로 물었다. ‘어떻게?’ 대답 역시 딱 한마디로 이어졌다. ‘장애운동을 해야겠다.’ 그 당시에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를 주제로 논문을 적어놓았던 걸 지금도 가지고 있단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차별하면서, 인간을 비하시키는 건 사회구조에서 온다는 것. 그렇기에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

왜 차별하는가

외면하며 지내던 종교에 귀의하면서 신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됐고,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운동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마저 없던 시절이라면 아주 예전 상황이 된다. 열악한 상황뿐인 현실 속에서, 그는 각종 단체를 만들고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의무고용제 같은 법 쟁취를 위해 당시 집권당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의 본격적 활동에 몰입하게 됐단다.

“당시 활동은 다 기록으로 남겨져 있을 겁니다. 참배움터라든지, 장애인권익실천회라든지, 그때의 활동은 모두 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언론에 남겨져 있을 거예요.”

   
▲ ⓒ채지민 객원기자
그렇게 사회적인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지만, 현실의 벽은 또 다른 데 있었다. 철학과 출신의 장애인한테는 취업의 문이 꽁꽁 닫혀 있었던 것이다.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나왔는데도, 부산에서만 50군데 넘는 이력서를 내며 시도했던 결론은 한마디로 ‘Nothing!’ 그러니까 하나도 없다는 암담한 결론뿐이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졌다. 당시에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직장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물으니까 특수교사가 되고 싶었단다. 그래서 사회복지 관련 학과가 당시까지 없었던 부산 대신, 대구의 모 대학교를 찾아가서 담당 교수를 3번이나 연이어 면담한 뒤에, 마침 그 대학에 신설된 직업재활학과에서 두 번째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직업재활학과 석사과정을 94년도에 입학했죠. 학교 근처에 반지하 방 하나를 구해서 지냈는데, 그 공간이 완전한 아지트가 되어버렸어요. 친구들하고 술 마시는 장소가 됐던 거예요. 거의 1년을 꼬박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몰려와서, 하루에 소주 한 박스를 소비하는 공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밝혀진다. ‘아지트’라는 표현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만큼, 당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국 각지의 장애운동과 시민운동을 하던 젊은 면면들이 거의 전부 다 그 아지트에서 인연을 맺게 됐다는 점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현재의 핵심 활동가들은 거의 모두 그 아지트 출신이 되는 셈이다.

어릴 때부터 폐쇄적이고 대인기피증으로 시달렸던 그의 성격은, 그렇게 한 걸음씩 외향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내가 나 혼자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내게는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필요하다.”는 그의 독백처럼, 청년 김재익의 인생은 그 시점을 전후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석사를 수료하고 참 희한한 일이 있었어요. 고용촉진공단에서 장애인 선발 모집이 있었는데, 그게 저의 인생을 뒤바꾸게 만든 계기가 됐죠. 필요한 모든 서류와 공부했던 모든 자료들을 전부 다 제출하라고 해서 다 냈어요. 저하고 같이 공부했던 시각장애 친구와 둘이서 최종심사까지 올라갔죠. 결과적으로 그 친구가 합격하고 저는 떨어졌어요. 솔직하게 중증장애를 가진 뇌병변이라서 떨어뜨렸다고 하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제가 탈락한 이유를 물으니까 나이가 많아서 떨어졌다는 거예요. 우습죠. 그 친구와 저는 동갑이었거든요.”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당시의 그 사건이 떠올랐다. 장애인 차별에다가 나이 제한이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진 이중차별이라 해서 언론에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주인공이 바로 김재익 씨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짧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김재익 소장님 얘기입니까?” 대답 역시 짧고 간단했다. “네, 그게 저의 얘기예요.”

당시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청와대에 항의민원까지 넣었고, 그 민원 때문에 장애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여러 공무원들이 불가피하게 십자가를 짊어지게 됐던 모양이다. 공무원 선발과 장애인 등용에 있어서 ‘나이제한철폐’라는 대목은 이렇게 싹을 맺게 된 것이고, 장애인을 탈락시키는 국가기관에 철퇴를 내렸던 것 역시 ‘김재익’이라는 인물이 부지불식간에 그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한두 해 지난 뒤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실망과 좌절로 폐인이 되어버린 저한테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는 문의가 들어온 거죠. 그래서 저야 어차피 제도권의 피해를 짊어져야 할 현실이 됐고, 저의 장애 후배들이라도 나이를 이유로 해서 등용에서 탈락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되겠다 싶어 인터뷰에 응했어요. 그래서 그 일간지에 저의 인터뷰 기사가 크게 올라왔는데, 그 신문 기사를 진지하게 읽은 분이 따로 계시더라고요.”

나는 내 소명(召命)으로 살아간다

기회는 늘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단, 준비하고 있던 사람한테만 찾아든다는 것도 예외가 없는 일이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순식간에 스쳐지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김재익 씨한테 던져진 ‘판도라의 상자’는, 오랜 시간 준비하며 지냈던 보답을 전하기 위해 찾아든 선물상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IMF의 환란을 잠재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바로 유종근 전 전북지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유 지사가 김재익 씨를 지목하면서 연락을 전해왔다고 한다.

“기사를 읽고 나서 그 분이 저를 도지사 집무실까지 특별히 불러주셨어요. 제가 장애를 가진 몸으로 대학원을 나오고 직업재활학을 전공했으니까 됐다는 거예요. 지사님은 두 가지를 생각하셨답니다. 지사님 본인의 동생한테 장애가 있고, 아들도 장애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말씀하시더라고요. 동생분이 뇌병변장애인데, 캐나다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뇌병변장애가 있다 해도 충분히 공부하며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사님 스스로 확신하고 계셨다는 것이죠.

또 한 가지는 동서화합의 차원에서 저를 채용하고 싶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도립 복지관에 전격적으로 발탁을 할 테니까, 또한 자신이 모든 걸 변호해줄 테니까 열심히 해달라는 당부의 말씀까지 전해주셨습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드는 법이다. 국가기관의 공개 모집에서 억울하게 차별을 받아 폐인이 될 정도로 상처가 컸던 그가, 하루아침에 전라북도 도립장애인종합복지관의 직업재활상담사로 부활하는 쾌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2002년 10월부터 첫 직장 생활은 그렇게 시작이 된다. 하루에 20명 이상의 장애인들과 상담을 진행할 정도로, 그는 정말 열심히 상담사 활동을 진행했다고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상담을 하면서 저는 컨슈머(consumer), 그러니까 ‘소비자’라는 말을 장애인들한테 썼어요. 직업재활상담사들 중에선 제가 처음으로 썼을 거예요. 장애인들이 상담을 위해 찾아오면,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었죠. ‘우리의 평가로는 이런 결론이 나왔으니까 이것을 해라’ 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 선호하는 분야를 우리가 개발해서 각각의 특징을 알려준 뒤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권을 가진 소비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죠.”

앉아서 기다리는 상담이 아닌, 김재익 씨는 찾아가는 상담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소비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진로상담이 주를 이루었단다. 그래서 지금도 진로상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며 지낸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그렇게 전주에서 활동하다가 정부기관에서 직업재활에 관련된 공모가 있었기에 직접 응모를 하게 됐고, 그 공모사업에 통과가 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롭게 서울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그의 삶에서는 직업재활사업과 자립생활운동, 활동보조파견 같은 장애인 중심의 활동이 주된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여러 센터를 거치며 일을 했던 그는 결국 스스로 직장을 뒤로 하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용장려금 부정비리가 너무 만연해 있는 거예요. 일도 안 하는 사람들을 올려놓고 서류만 일을 한 것처럼 만들어 공금을 전용하고, 또 돈을 넣다가 뺏다가 반복하면서 활동량을 늘이기만 하고. 물론 워낙 어렵다 보니까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전문적인 직업재활사로서 이걸 쇄신해야겠다고 시도를 하다가…, 한마디로 쫓겨난 셈이 되겠죠. 적당히 타협하며 눈을 감았더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방황을 이어가다가, 민주노동당 강남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빌려 본격적인 장애인 직업재활과 권익을 위한 활동을 새롭게 전개하게 됐단다. 그것이 바로 ‘굿잡’의 탄생인 셈인데 왜 하필 장애운동의 활동지역을 서울 강남구로 선택했냐고 물으니까, 망해도 크게 망하고 성공해도 크게 성공하자는, 남자로 태어나서 죽는 것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도전의식이 앞섰단다.

제안서를 만들어 구청에 출입하기를 수십 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애인 한 명은 그렇게 사무실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면서도 자립생활센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올해 들어 구청의 지원으로 독립적인 사무실 공간을 무상으로 기증 받기에 이르렀단다. ‘굿잡자립생활센터’는 그렇게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모진 고생을 겪으며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저는 장애인 여러분들께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원하는 일이나 이룩하고자 하는 분야가 있다면, 자신의 의견과 전문성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간단한 예로, 저는 구청에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실적이나 제안 내용을 책자 형식으로 꼼꼼하게 만들어서 갔거든요. 건의서와 함께 사업실적과 구상을 구체적이고 깨끗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인데, 이렇게 사무 공간을 무상 지원받게 된 것도, 또한 올해 해냄복지회를 만들게 된 것도 그렇게 정리하는 습관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화의 자리를 정리하면서 그가 남긴 한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저는 두드리면 열린다고 생각을 해요. 아무리 중증이라도 신이 그를 만들 때 뭔가 달란트(talent ; 각자 타고난 재능과 소명)를 줬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일을 통한 고용, 일을 통한 복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제가 해야 할 소명이 있다면 그 고용과 복지를 모든 장애인들에게 나누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겠죠. 더욱 더 열심히 하는 ‘굿잡’이 되겠습니다.”

‘굿잡(good job)’이 물론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의미하겠지만, 일상의 회화로는 “Good job!” 즉, “잘했어!” “멋져!” “좋았어!” 등의 유쾌한 긍정과 칭찬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어권 영화를 보다 보면 흔히 들리는 말이 아닌가. 어두웠던 지난 기억을 딛고 일어서서, 장애인의 고용과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김재익 씨의 내일에 큰 기대와 희망을 걸어본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을 수많은 직업재활상담사와 활동가들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모두가 열심히 뛰고 움직이며 노력한 만큼, 그 열매는 우리 모두가 공유할 소중한 결실이 될 게 아닌가. 이번 글 마무리는 모두가 함께 외치는 한마디로 새겨놓는 게 좋을 것 같다. 서로에게 외쳐 보자. 여러분, 우리 모두 - “Good Job!”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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