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때문에? 이제 나는 그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 세상, 한 걸음


장애 때문에? 이제 나는 그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사는 이야기] 강현석 중증장애인지역생활지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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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한 사람의 이미지는 어떻게 결정이 될까? 사회적 통념과 그 가치기준은 갈수록 첨단으로 치닫는 게, 21세기 10년차의 현주소라는 건 분명하다. 인터넷 어쩌고 하는 언급은 이미 과거의 얘기가 됐고, ‘아이폰’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소통의 수단은 불특정 다수의 대화 속도가 빛의 속도인 양 빠르고 직접적이며 광범위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대세에 본격적으로 따를 것인지, 그런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끌 것인지, 또한 세상의 변혁을 자신의 미래 삶으로 적극 활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앞으로의 생존여부를 결정짓기라도 하는 양, 숨 막힐 정도의 속도 전쟁이 현재의 세상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한 질문 하나가 뒤따라야 한다. 당신은 거기에 적극 따르며 동참할 것인가? 또한 그렇게 동참하는 것만이 진정 ‘제대로 사는’ 인생이라 판단내리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여기에서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해 보겠다. ‘한 사람의 이미지는 어떻게 결정이 될까?’ 외모? 대외적으로 드러낼 만한 재산소유의 여부? 아니면 현재의 사회적 지위? 그런 건 다 필요 없다는 답을 얻게 된 것이 이번 취재의 결론이다. 만남을 위해 아직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많은 부분을 미리 파악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짧은 전화 통화의 목소리 하나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주고받던 일상적 통화에 익숙하던 입장에서, 정말 정중하고 호의가 넘치는 목소리를 듣게 됐다. ‘한 사람의 이미지는 어떻게 결정이 될까?’ 답은 분명하다. 진심을 담은 목소리나 눈빛, 그런 진솔한 마음들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아주 많은 부분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 -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평소 인식 못하며 지나쳤던,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의 위대함’을 깨닫게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미리 평가하게 된다.

맞는 신발이 없게 됐다는 것

디지털 세상에 젖어드는 걸 가능한 한 거부하는 개인적 습성 탓인지, 차량 안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게 없다. 지도책을 펼쳐놓고 찾아가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어디 어디’로 오면 된다고 했다. 가는 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출발 전에 그 위치를 찾으며 지도책 내용에 따라 종이 1장 가득히 메모를 했다. 그리고 왕복거리 421.7km였던 목적지를 단번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1장의 A4지, 그 복잡한 암호(?) 같은 내용을 들여다보던 오늘의 주인공은 ‘파안대소’로 첫 만남의 인사를 대신했다.

목적지인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른 첫 생각은 가건물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수도 서울만 하더라도, 몇 군데 단체를 제외하곤 ‘열악하다’는 표현이 먼저 떠오를 상황 안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듯 가건물 현장은 평소 익숙했던 부분이라서 담담한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내부의 풍경은 예상을 벗어나는 움직임들로 가득했다. 여러 사무실 공간 전체가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의 분주한 모습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는 것!

“저희 센터에서 하는 일은 우선 활동보조인서비스를 담당하고 있고요. 저녁에는 센터 부설의 장애인야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에는 무료급식을 실시하고 있고, 사회적 기업의 전 단계인 예비적 사회적 기업으로 전북챔프교실을 시작했어요. 챔프는 챔피언교실이라는 뜻이죠. 장애아동이나 성인들이 재활을 목적으로 스포츠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스포츠 자체도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거라서, 전문 강사를 파견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영이면 수영, 탁구라면 탁구 강습을 강사가 직접 가서 지도하는 사업인 것이죠.”

거기에 더해서 사회복지시설에 있는 생활인들의 인권이 많은 사회적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기에, 그들의 인권구제활동과 인권홍보활동을 위한 전북시설생활인인권연대를 지역에 제안했고, 그 단체가 결성되어 현재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체의 장애인 인권 활동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조직, 그 중심에 오늘의 주인공 강현석 씨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센터 소속의 상근자가 11명,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 12명, 소속된 활동보조인이 94명 내외, 거기에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가 20명이나 되는 각각의 조직이 그 센터 안에서 움직이고 있단다. 규모가 상당히 크다고 느껴졌기에, 이 모든 걸 어떻게 운영하느냐 물으니까 국비지원이 올해 비로소 시작됐다고 한다. 전국의 20군데 자립생활센터를 지원한다는 보건복지부의 국비지원이 올해 처음으로 이뤄졌다는 건데, ‘올해 처음’이라는 표현에서 생각이 멈춰졌다. 이 정도의 인원을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국가 차원의 지원이 없었다는 건 그동안의 어려움을 되씹게 만드는 반증이 아닌가.

내부 소개를 마친 뒤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낮 시간 유일하게 빈 공간이었던 야학 교실로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속 편하게 묻고 답하기를 시작했다. 3살 때까지는 뜀박질을 할 정도로 잘 걸었던 아이였고, 아버지께서 운동화를 구입해 신겨 주셨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단다. 그랬던 아이한테 갑자기 고열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더니, 급성맹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한여름에 발생하고 진행됐던 그 수술자국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데, 아마도 그때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침투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게 집안의 의견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제가 살던 지역이 김제 백산면의 농촌 지역이었는데, 부모님들이 농사철이라 여름에 다들 바쁘시잖아요. 그때 고열에 계속 낮잠을 자던 저를 보름 가까이 방치하셨던 모양이에요. 그 정도 고열이 지속되다가 의식이 없을 정도가 되니까 심각한 상황이 됐고, 뒤늦게 병원으로 다시 달려가니까 소아마비 판정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화를 나누던 과정 중에 나름의 의문점이 떠올랐다. 3살짜리 아이가 급성맹장염이 걸린다? 더불어 그 수술 이후에 소아마비 판정이 나왔다는 건, 수술 중에 침투한 바이러스 때문일 수 있다? - 그래서 이 글을 정리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해당 전문의한테 이런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따로 문의해 보았다. 답변은 의외였다. 3살짜리도 당연히 맹장염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수술 도중에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침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소견이 뒤따랐다.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기본적으로 enterovirus, 즉 구강(口腔)인 입 내부를 통해 침투하는 바이러스라는 것이다.

소아마비 환자들은 4세 이하에서 발생하는 게 95%라는 거, 잠복기가 6주에서 8주 정도 진행된다는 거, 더불어 대부분의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심한 감기 정도의 증상으로 지나간다는 거, 그래서 과거 옛 시절의 어른들은 감기인 줄 알고 병원에 가지 않은 채 치료시기를 놓쳐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감염환자의 1%내지 2%가 실제 소아마비 증상으로 진행되는데, 감염된 신경이 어느 부위로 확대되느냐 여부에 따라 예외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강현석 씨는 일반적인 소아마비 증상에서 조금 더 진행된 상태였다. 오른쪽 팔에도 마비증상이 있고, 상체의 우측이 불편하게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농업 관련 직장 일을 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여기저기로 이사를 자주 다녔고, 도시지역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야 처음으로 재활치료 비슷한 걸 받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다리 자세가 굳어지기 전에 치료를 받았다면 목발이라도 잡는 게 가능했을 텐데, 강현석 씨는 목발을 사용했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더불어 신발을 신으며 발 모양을 고정시킨 적이 없어서, 결국 발목 아래가 안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버렸단다. 조금 전에 ‘아버지가 운동화를 사주셔서’라고 했던 표현이 유독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 어린 시절 이후로는 ‘신발’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졌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는 못내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외롭다는 거… ‘외톨이’라는 생각

“교육열은 옛날에도 강했잖아요. 그런데 아버님이 오히려 저를 학교 보내지 말자고 제안하셨어요. 제 생각에는 아마 그 당시 사회전반적인 인식들이 장애인들은 공부하기도 어렵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취업이라든지 직업 같은 걸로 사회에 공헌할 기회마저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잖아요. 그리고 집 밖에 나오기도 어려운…. 그리고 한 가정에 장애를 가진 자식이 있다 하면 쉬쉬거리고, 마치 집안에 잘못된 치부라도 있는 것처럼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당시 좋은 대학을 나왔던 만큼, 세상의 교육열이라는 분위기를 잘 알고 계셨을 게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의견을 말씀하셨다는 건, 1966년생인 강현석 씨가 살았던 당시 사회상과 세상의 왜곡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 반기(?)를 든 건 바로 어머님이셨다고 한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성인이 된 다음에는 더 살기가 어렵다. 이런 애를 더 가르쳐야 한다. 머리로 풀어갈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님은 아버님이 밥상 앞에 앉으실 때마다, 계속 그 얘기를 꺼내면서 세뇌 아닌 세뇌를 시키셨단다. 결과는 어머님의 승리!

뒤늦게 일반학교에 들어가서 월반을 거듭하며, 또래들과 함께 수업을 받게끔 속력을 냈단다. 물론 학교를 다니던 과정의 애로사항은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어머님이 학교 근처에 집을 마련해서 직접 업고 등하교를 시켜주셨지만, 상대적으로 체격이 컸던 아들을 5학년 이후로는 더 이상 업을 수가 없게 되셨단다. 대안으로 등장한 인물이 학교 수위아저씨였던 모양이다. 필요한 오토바이를 사주는 대가로 아들의 등하교를 대신 책임져줄 것을 부탁했고, 소년 강현석의 등하교는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그 아저씨의 도움으로 해결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업고 다니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그 아저씨의 신체적인 무리가 뒤따랐고, 더 이상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 등장한 해결사는 바로 친구들이었단다. 집에서 학교까지, 교문에서 교실까지, 다시 교문과 집까지 데려오고 데려가는 일을 담당했던 고마운 친구들 덕분에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지금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한 친구와 지금도 연결이 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럼요!” 하는 강현석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치 고등학생 당시의 표정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건 외부에 드러난 부분이었고, 내적으로는 심각한 가슴앓이가 격렬하게 진행됐던 모양이다. 말 그대로 사춘기 시절이 아니었던가.

“다른 것보다도 제일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저씨의 도움으로 등하교를 하긴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가고 끝남과 동시에 귀가하는 걸로 고정됐잖아요. 그 시간 이외에는 집에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는 거…. 학교에서도 시간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이런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죠. 집에 가면 따로 놀 만한 또래가 없어서 외로움이 많았던 것 같아요. 형제는 있었지만 형제하고는 또 다른 것이잖아요. 외톨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지냈습니다.”

그 외로움과 함께 엄습했던 건 두려움이었단다. 자신의 두 눈으로는 다른 장애인을 한 명도 못 봤다는 것. 학교를 가도 장애를 가진 사람은 저 혼자였고, 집에 있어도 혼자였고, 방송 같은 데를 봐도 장애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왜 나만 이럴까?’ 하는 생각에 파묻혀 지냈다고 한다. ‘왜 나만 이럴까. 왜 나한테만 이런 삶의 고통이 주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 혼자만…?’ 거기에 대한 한(恨)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비관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나날만 이어졌단다.

결국 자의식이 폭발하게 됐고, 중학교 2학년 때 자살을 기도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됐다고 한다.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했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가 자의식의 뇌관에 불을 붙인 셈이 된다. 남들은 뭐가 되고 싶다는 게 참 많았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걸 실현시킬 자신감도 없었고 외롭다는, 혼자밖에 없다는 상실감이 운명론적인 죽음을 불러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神)이 존재한다면, 소년 강현석의 이름을 그때 불러주셨을 게 분명한 일이다. 그 죽음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부터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는 것!

“또 다른 운명이나 인생이 있다면,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이번 인생은 대충 마무리하고 그 다음 인생을 화려하게, 제 뜻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제 운명과 제 인생은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는 거였죠.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죽어버리면 더 억울한 일이라는, 그래서 오히려 반대가 돼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사로잡게 됐어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런 마음이 최고조로 강렬해졌던 것 같아요. 삶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거, 그 소중한 삶에 정말 최고의 희망과 행복을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는 거, 희망과 행복을 갖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건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늪에 빠질 때는 빠지는 걸 모른다

이후로 그는 사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갔단다. 텅 빈 집 마당에 비가 내리면, 바닥에 빗방울들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방울들이 이내 사라지는 모습 같은 걸 몇 시간이고 쳐다봤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생각을 더해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게 중요한 일과가 됐다는 얘기이다. 또한 공부를 좀 하는 입장이었기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야겠다는 희망 하나로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가족이나 주변 분들이 ‘너는 이런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권유 비슷한 걸 전하기 시작했단다.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아요. 하나는 한의사가 돼라. 또 한 가지는 사주팔자 같은 걸 해봐라 하는 것이었죠. 앉아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머리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권하신 거예요. 그때도 사주팔자를 보는 건 정말 죽기보다 싫었고, 그래서 한의사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고2 때 철이 좀 들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한의사가 목표로 정해졌고, 곧 고3이 되니까요.”

진지한 목표가 생겼고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지만, 그에게 예상치도 못했던 충격이 닥쳐왔다. 그가 가진 장애증상으로는 한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최소한 목발로 설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두 팔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의대 진학이 ‘그나마’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학교 선생님한테 수소문을 하고, 지망하던 대학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 확인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가능하다는 거…. 올라야 할 산이 하나 있었고 그 산을 오르려고 모든 걸 걸며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 산이 없어져 버린 셈이었단다. 유일했던 목표점이 완전하게 붕괴되어버렸다는 것.

그 이후로 그는 수습할 방법도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자포자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몸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모든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존재하지 않게 됐단다. 반항아적인 성격으로 돌변하면서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등, 모든 세상을 잿빛으로만 바라보게 됐고 대학은 완전히 포기해버린 채 졸업을 하고 말았단다. 어차피 기초적인 편의시설도 없던 시절의 대학이었고, 원치 않는 다른 학과를 지망한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밑바닥에서 방황하기를 몇 년 몇 해….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말입니다. 늪에 빠졌을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내가 늪에 지금 빠져가고 있구나’ 하는 걸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순간순간 떠오르더라고요. 정말 내가 이렇게 좌절하고 살아야 되겠는가. 이렇게 살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전부인가?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걸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자문자답이 문득문득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단다. 일이든 직장생활이든 뭐든 변화를 주려 했는데 의욕과 현실은 번번이 빗나갈 뿐이었고, 충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의 작업장들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열악하다’는 단어의 뜻이 뭔지를 깨닫게 만드는 환경 속에선 도저히 참아내지 못할 것 같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의 좌절감은 술과 함께 덧없는 시간만 소비하며 흘러간 모양이다.

반전의 손짓은 그때 전해졌다.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형님이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던지신 것이다. ‘너도 경험 삼아 해봐라.’ 그래서 포항으로 자리를 옮겨 작은 사업을 시작했지만, 직업군인생활과 일반사회생활이라는 게 전혀 다른 것인지 오히려 형님이 적응을 못한 채로 사업을 접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강현석 씨한테는 그게 처음으로 체험했던 사회생활이었고, 자신에게도 책임이 주어진 일이었기에 밤잠도 안 자면서까지 정말 열심히 행복한 마음으로 일을 했었단다. 생전 처음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됐다는 시점이 바로 그때였는데, 이렇게 사업을 접는다고?

흔한 말 표현 그대로 ‘발동이 걸린’ 셈이 된다. 그는 귀향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는 동안 하나의 생각이 인생의 등불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됐다고 한다. ‘한번 일을 하게 되니까 방법론적인 게 자꾸 보인다는 거, 계속 떠오른다는 거, 안 되는 건 없다는 거, 내가 못 찾을 뿐이지 다른 업종이라도 괜찮다는 것!’

    ▲ ⓒ채지민 객원기자 세상의 활동반경이 무한대로 넓어지게 되다

살아오면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된 것이죠.” - 잘 알고 지내던 누님이 있었는데, 서울에 가면 모 기관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운전면허교육을 담당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면허를 따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며 살아왔단다. ‘내가 어떻게 운전을 할 수가 있겠어?’ 그런데 그 제안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까 면허 테스트 정도만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도전을 했는데, 마냥 어려운 줄 알았더니 의외로 간단하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두 달 동안의 운전교육을 익힌 뒤 면허시험을 봤는데, 같이 도전했던 이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면허를 취득하는 쾌거를 경험하게 됐단다.

“면허를 취득하고 돌아와서 바로 차를 샀습니다. 한 사흘 정도 지난 뒤에 구입한 거죠. 차를 샀을 때의 그 기분이라는 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저를 가장 감동적으로 만든 건, 차에 타서 제가 운전대를 잡고 길거리로 나갔을 때는 제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동안의 제 인생은 장애와 비장애, 이렇게 구별된 세상이었거든요. 비장애보다 못한 입장이고 뭔가 부족한 사람, 불편한 사람, 이렇게만 항상 제 스스로의 안에 각인이 되어 있었죠. 주위에서도 물론 그렇게 취급을 했었던 것 같은데, 차에 올라탄 순간에는 모두가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 누구도 저를 장애인라고 보지 못할 것이며, 비장애가 가는 길이라면 저 역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운전대만 잡으면 운전 방향을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거, 그 자유로움이라는 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쁨, 그 느낌 그 자체였어요.”

장애인한테 ‘운전’이라는 문호가 열리게 된 시점도 사실 그 즈음일 거라 짐작된다. 지금이야 어느 주차장이든 장애인 전용 주차공간이 따로 지정되어 있고 그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지만, 그런 제도가 확립된 것도 정확하게 따진다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차가 생기니까 이동반경이 넓어지게 됐다는 거, 행동반경이 넓어지다 보니 스스로의 영역 또한 무제한으로 넓어졌다는 그의 언급은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결국은 이동권의 확보가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뒤바꿨다는 의미 아닌가. 그 수단이 자가용이든 대중교통이든 간에, 장애인에게서 장애의 일부분 또는 대부분을 완화시키는 역할은 ‘이동권 확보’라는 대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동안 택시 한번 잡으려 해도 난망하기만 했고 승차거부의 수모까지 겪어오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강현석 씨의 삶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되니까, 주변에서 그에게 전달하는 의견 또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회복지 일을 하면 참 어울릴 것 같아요.” - 가끔씩 듣던 특정한 언급을 연이어 듣게 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강풍으로 변해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 자꾸 그런 권유를 하게 됐다는데 그 시절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 그런 분야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지내왔는데도 주변의 제안은 끊이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그때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찾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그 와중에 그런 제안을 지속적으로 듣다 보니까, ‘나한테도 사회복지라는 분야에 도전할 능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되풀이하게 되면서 그 의미를 자꾸 떠올리게 되고, 저 나름의 고민을 진지하게 반복하게 된 것이었죠.”

운전면허로 시작된 행동반경의 확대는 주변인들의 인식변화와 사회적 운동을 권유받는 계기가 됐고, 그 고민의 결과는 ‘사회복지학과 01학번 강현석’이라는 삶을 새롭게 재출발하는 걸로 결정이 났단다. 원래는 한의대 85학번이었을 그가 사회복지학과 01학번의 인생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서른여섯 살의 01학번, 그건 인생 모두를 투자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하다. 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고, 그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는 언급에선 만족감 비슷한 게 흘러나왔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고 하루가 가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조금 전에도 언급했듯이, 일단 ‘발동이 걸린’ 그를 이 세상이 정지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내친 김에 단체기관을 운영하고 있던 친한 분한테 찾아가서 얘기했단다. ‘내가 지금 사회복지를 배우고 있으니까, 이론공부를 하며 현장에서 뛰고 싶다. 졸업하고 나서 일하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 월급은 얼마를 줘도 상관이 없다. 나를 받아 달라.’ 술자리에서 꺼낸 제안을 들은 그 선배는 속 시원하게 ‘좋다. 너는 잘할 것 같다’는 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월급을 받으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인생이 펼쳐졌던 모양이다. 당시의 느낌을 떠올리는 듯, 약간 상기된 표정이 된 그에게 물었다. 그것이 자신의 일,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느냐고.

“네, 저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분들이 저를 찾으며 얘기하려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면서 ‘아, 내가 선택하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참 편안했어요. 다른 일들은 다 경쟁체제로 운영되잖아요. 보이지 않게 경쟁하며 긴장 속에 부딪쳐야 하는데, 이 일은 정말 편안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거라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일을 잘했든 미진했든 간에,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제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던 나날이라서 굉장히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모든 방법은 곁에 있으며,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의 일이라는 건 역시 의견의 일치가 가장 중요하다. 지나고 나면 별 일도 아닌 단편적인 의견차이일 뿐인데, 막상 현장에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A 아니면 B’라는 당장의 결정을 원할 때가 대부분이다. 막강한 자본집단의 회의장이라면, 오히려 단순하며 빠르게 결론이 날 일이다. 아무리 복잡하고 정신마저 없는 전제조건들이 난무하더라도, ‘더 많은 돈(이익)을 벌 수 있는 방향으로 무조건 결정!’ 아니겠는가. 표현은 좀 거칠지만, 결론은 언제나 더 많은 수익창출이 이뤄지는 쪽으로 내려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의 토론과 결론이 그런 식으로 내려질 리는 만무하다. 모든 토론의 기본전제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고 시민이고 국민이고 이웃이라는 것. 더 많은 이들한테 혜택을, 아직 혜택의 기회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직접 찾아나서야 한다는 게,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갈망이자 전부인 까닭이다.

“제가 하다 보니까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런 사업을 통해서 배고픈 사람한테 밥 한 끼 전해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점이었죠. 처음에는 그게 굉장히 옳은 거다, 꼭 필요한 거다 하며 집중했었지만, 이 일을 직접 주도하면서부터는 느낌 자체가 달라졌어요. 이들은 언제까지 음식을 제공받아야 하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들한테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가? 차라리 그들한테 농사짓는 법과, 밥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이들 역시도 나름대로의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들이 뭉치다 보니, 저 역시도 장애인 차별이나 기본적 권리 확보 등의 이슈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자리가 바로 지금의 센터 공간이라고 했다. 참 좋은 분들과 함께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견 차이가 생겨서 만남과 떠남이 얼마간 반복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다툼과 같은 안 좋은 의미가 아니라, 같은 지향점을 놓고서도 배분 우선이냐 권리확보 우선이냐 같은 방법론의 차이가 해결되지 않았던 탓이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게 중증장애인지역생활지원센터이고, 지금 그는 지역의 광범위한 공간을 총책임지는 삶으로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게 됐단다. 그렇다면 후배들이나 같이 일하는 활동가들한테는 무엇을 어떻게 조언하며 업무에 임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제 경험으로 봐서는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존재감(存在感) 또는 자존감(自存感, 自尊感)이라는 거예요. 그 용어 표현이 적절한 단어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라는 존재감을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없다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자기 장애에 맞춰 사는 거고, 자기 환경에 맞게 사는 거고, 자신들의 가정적 환경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체성도 없고 정체성도 없이 고정되거나 휩쓸린다는 건데, 일단 ‘나’라는 존재와 ‘본인’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아무리 장애가 심하고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라 해도, 개개인의 존재가치는 분명하게 살아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걸 본인 스스로가 인정하는 순간에, 정말 이 삶의 어떤 껍질을 깨듯이 탈피하는 대전환이 가능하게 되죠. 거기서 바로 시발점이 등장하는 것이고, 그 출발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는 정말 모든 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강현석 씨는 분명하게 얘기한단다. 이 대목은 그동안의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도 듣지 못했던 직접적인 표현이기에, 녹취록에 남겨진 그의 언어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 그래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지금에 와서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장애가 심해서 공부를 못한다? 그 역시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돈이 없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방법은 다 있다는 거죠. 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머릿속의 길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 길을 놓고 바라보며 판단하다 보면 분명한 대안이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겁니다. 노력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든지 기회가 있을 거예요.”

   
▲ ⓒ채지민 객원기자
먼 길을 달려와 마주대한 만남이었기에, 더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시간 넘는 대화 가운데 더 직접적이고 더 피부에 와 닿는 솔직한 표현들이 많았는데도,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그 모두를 지면에 옮기지 못하게 됐다는 점 또한 아쉬울 따름이다. 마지막 질문으로 던졌던 그의 언어를 아래에 전하며,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대화를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어차피 그는 현장에 있고, 그 현장의 목소리를 대외적으로 외치며 지낼 건 분명한 일이다. 기대는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은 재회의 손짓을 남기는 법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날 사람끼리는 현장에서 마주치는 법’이라는, 아주 단순한 ‘시민사회운동의 격언’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며 여기에 새겨두고자 한다.

“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정책기조는 일방적으로 시설 중심, 또는 시혜적인 중심적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시설이라는 것도 어차피 시혜적인 사고중심이거든요. ‘너희들은 가난하니까 뭘 주겠다’, ‘너희들은 장애가 있으니까 이것 조금만 가지고 해봐라.’ 정부의 정책이라는 게 언제나 다 그렇잖아요. 장애인 교육문제도 특수학교 하나 만들어놓고 ‘장애인의 교육문제 다 해결했다’, 하지만 그 학교에 들어가는 게 가능한 숫자는 전체 장애인 학생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장애인 교육을 비장애의 교육적인 논리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거죠. 장애라는 것을 이 사회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는 맹점이 반복되는 것이거든요.”

“사회적이나 국가적으로나, 장애인이기 때문에 요구하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권리를 찾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항상 피플 퍼스트(people first), 즉 인간이 가장 먼저라는 겁니다. 장애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노동권이 있는 거잖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장애계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마인드를 사회적으로 이뤄내지 않는다면, 아무리 잘 준비된 프로그램이 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거죠. 장애인은 장애인의 눈높이로 파악해야 합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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