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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서”

[인터뷰]뉴욕 월가(wall street) 최초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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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뉴욕을 방문했다. 미국 최대의 도시, 경제중심지라 하는 뉴욕이라고 하지만, 대중교통만큼은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 지하철의 경우 굉장히 오래되어 낡고 깨끗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처럼 스크린도어도 없어서 위험했으며 천장도 낮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여느 한국인이 와도 필자의 마음처럼 ‘한국만큼 편한 곳이 없구나’라고 느꼈을 것 같다. 이번 뉴욕 방문은 본지 기자의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었지만, 이전부터 뉴욕에 가면 꼭 만나고 싶었던 분이 있어서, 어렵게 먼 땅에 발걸음 한 김에 직접 만나 그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독자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Wall Street)에서 시각장애인 최초로 애널리스트가 된 ‘신순규’씨이다. 신순규 씨는 ‘오늘 하루밖에 시간이 없으니 만나 달라’는 기자의 갑작스럽고 억지스런 연락에도 흔쾌히 인터뷰를 응해줬다. 직접 만나 본 신씨는 30년 넘게 미국에 살았다고 하지만, 대화를 해보니 마치 한국에서 오래 산 사람처럼 한국인 특유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의 주요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밀집되어 국제 금융시장의 중심지로서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월가, 그것도 미국 재력가들만 투자한다는 ‘Brown Brothers Harrim’ 투자은행에서 20년 넘게 전문 애널리스트(재무분석가, Analyst)로 활약 중인 신순규 씨.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 ©이애리 기자

 

15살,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올해 45세인 신순규 씨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씨는 태어날 때 녹내장이 있었고, 6살 때 망막박리가 온 후로 점차 시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9살 때 시력을 잃었다. 신씨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님이 잘했던 것이 그를 의존적인 사람보다 자립심 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은행에 높은 자리에 있어서 집에 기사가 딸린 자가용도 있을 정도로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할 수 있었지만, 부모님은 신씨를 혼자 기숙사에 살게 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부모가 없이도, 그 누군가가 없이도 혼자서 다니고 뭐든지 혼자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부모님의 뜻이었다. 신씨는 자신의 부모님이 장애인라고 해서 무조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해줬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1980년대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고등학교에 가서 침술, 안마를 배워 취업했는데 그런 현실을 알게 된 신씨의 부모님은 그에게 ‘너는 다른 걸 했으면 좋겠다’라며 음악선생이 되라고 피아노를 가르쳐줬다고 한다. 이처럼 신씨의 부모님은 더 넓은 방향을 제시했고, 그 덕분에 신씨는 현실의 굴레에 갇혀 있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거짓말처럼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신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애리 기자
“15살 때였죠. 그때 당시 연합세계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그 중에 한 가지가 지금의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단체처럼 후원자와 어려운 아이를 연결해서 매달 후원을 받아 아이들을 돕는 일을 했어요. 그래서 그 단체가 후원모금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맹학교 남성4중창단과 함께 미국 전역을 돌기로 했었는데, 제가 그 팀에 반주자로 가게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부터 동부까지 공연을 했고, 필라델피아 맹인학교에 가서도 공연을 하게 됐어요. 근데 그때 마침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개발도상국에 사는 시각장애 아이들을 초청해서 국제학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일찍이 통합교육이어서 복합장애가 아닌 시각장애만 가진 아이들은 일반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그 교장선생님은 시각장애 아이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고 싶으셨던 거예요. 제가 방문했을 당시가 초기였는데, 교장선생님이 저보고 장학금 전액을 줄 테니까 와서 공부하라고 초청을 하셨죠. 그래서 미국을 오게 됐어요.”

교육도 교육이었지만 그 시절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직업에 제약이 많았고 신씨 나이 또래에서 유학을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씨의 부모님은 좋은 기회라며 유학을 적극 권유했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신씨는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어려웠어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서울대학교 같은 경우는 장애인은 받아 주지도 않았죠. 공부를 하고 싶었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유학을 결심됐어요.” 
아무리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 없이 혼자 먼 이국으로 간다는 게 두려움이 컸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신씨는 홀로 설 수 있었던 두 가지 버팀목이 있었다고 답했다.
 
“보통 그 당시 제 나이 때에는 의존성이 강할 때이지만, 저는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뭐든지 혼자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고, 시력을 잃었던 9살 때부터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던 것이 유학 가서 혼자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두 번째 버팀목이 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때 신앙이 두텁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어린 생각에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가겠다’라는 마음이었죠.”

 

미국에서 만난 두 번째 부모님

1982년 7월 중순. 신순규씨는 낯선 땅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선교회에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 뉴저지에 사는 한인가족을 소개시켜주고 6주 정도 홈스테이를 하면서 영어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줘서 미국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 학교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뉴욕으로 이사 와서 지금의 제 아내와 다른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말이 굉장히 서툴렀어요. 그만큼 영어만 쓴 거죠. 물론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한두 달은 언어에 문제가 있었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태국 학생들이 1년 먼저 와 있었는데 영어를 편하게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거든요.”

   
▲ ©이애리 기자
신씨는 미국이라는 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온데다가 주변에 한국 사람도 없어서 영어를 빨리 습득한 덕분에 유학생활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씨에게 큰 난관으로 다가온 것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학교시스템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다니던 서울맹학교의 경우만 해도 초등학교, 중학교는 일반 학교와 과목도 같고 교과서도 같아서 공부하는 내용이 같았는데, 미국 필라델피아 맹인학교의 경우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신씨에게는 그런 학교시스템이 가장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IEP(Individualized Educational Program)이라고 아이의 능력에 따라(장애학생은 장애 정도에 따라) 학업계획을 짜서 지도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저의 경우, 학업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한계를 두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이 필라델피아 학교를 계속 다니면 미국에 있는 좋은 대학을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다면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지, 전학을 해서 다른 공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됐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15살짜리가 혼자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어요. 그게 너무 힘들었죠.”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신순규씨에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신씨가 처음 미국에 도착해 6주 동안 지냈던 한인가족의 부모님이 신씨의 사정을 듣고 함께 살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물렀던 한인가족의 부모님이 고민하고 있던 저에게 뉴저지에 와서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라면서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그때 그분들의 나이가 50세가 넘으셨는데 당신들 자녀들을 다 출가시키고 저를 아들처럼 받아주신 거예요. 정말 감사했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진짜 부모님처럼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그분들은 합법적으로 저를 입양을 안했다 뿐이지 저의 두 번째 부모님이십니다. 물론 저의 한국에 계신 친부모님도 자주 저를 보러 오셨고요.”

 

‘한계’ 새로운 도전을 향한 디딤돌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번은 황당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 2~3년 지내면서 미국에서 살고 싶어졌고, 영주권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 ©이애리 기자
미국에서는 영주권을 받는 방법은 두 가지로, 미국인과 가족관계가 되거나 직업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신씨는 결혼할 수도 없는 나이었고, 직업도 없어서 둘 다 해당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보고 시도했지만, 결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씨는 영주권을 못 받게 되면서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하버드에 들어가게 된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고등학교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대학교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했는데, 신씨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고 다른 방편을 알아봐야만 했다. 그때 신씨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고민하는 그에게 돈이 없어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정보를 줬는데, 바로 아이비리그의 수재들만 간다는 MIT, 하버드, 스탠포드 같은 미국 최고의 대학들이었다.

“선생님이 아이비리그를 권하기에 물어봤어요. 그럼 우리 고등학교에서 그런 학교(아이비리그)를 가는 아이들이 있냐구요. 그런데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정말 기가 막혔죠.(웃음) 그런데 선생님이 ‘너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250명 중에서 3등 정도 해서 성적도 괜찮았고, 고2~3때 학생회 회장을 한 경력도 있었거든요. 또 시골에 살다 보니 할 일이 없어서 학생회, 뮤지컬, 학력 경시대회 등 방과후에 하는 활동들을 많이 하면서 이상적인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그게 추가점이 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아이비리그에서 원하는 학생은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다른 활동들도 잘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 있어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지원할 수 있었고, 저희 학교에서 제가 아이비리그에 처음 지원한 학생이 됐죠.”

신순규씨는 대학교를 아이비리그 명문대 중 하버드, MIT,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네 곳에 지원했고, 네 곳 모두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중 하버드와 펜실베니아가 상위 5~10% 장학금과 혜택이 있어서 상위권이었던 신씨는 하버드를 선택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고 뭐든지 다 잘 될 것만 같았던 신씨에게 대학생활이 시작되자 ‘한계’라는 것이 찾아왔다.

“일반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지역에 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점자 교과서도 충분히 제공받았고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런데 대학에 가서 진짜 한계에 부딪쳤죠. 좋은 대학에 상위권으로 들어가다 보니 스스로 착각하게 된 거예요. ‘나는 굉장히 똑똑하고 3년이면 졸업하겠다’하는 자신감, 나쁘게 얘기하면 교만함이 있었던 거죠. 알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제가 고3때 공부한 것들을 10~11살 때 마스터하고 왔더라구요.(웃음) 마치 시골 동네 야구팀 선수가 프로야구 선수들과 한 자리에 모여 경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다 첫 시험에서 크게 낙심하게 됐어요. 하버드는 입학 4~5주 후에 시험을 보는데 학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일부러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내고 점수도 엄격하게 매기죠. A, A+ 밖에 몰랐던 아이들에게 B, C, D라는 점수를 주면서 ‘너는 제일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거예요.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깨달았지만, 그때는 하늘을 찌르던 교만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요.”

신순규씨의 대학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에 장애학생을 위한 서비스가 있긴 했지만 체계적이지 않았고, 점자블록 등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아서 이동 및 생활에 대한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또한 신씨는 장애인 서비스 사무실도 직접 찾아다녀야 했고 학생들을 고용해서 책을 읽게 하고 녹음하게 하는 등 공부하는데 있어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 같이 주변에 도와주는 분이 있었고, 교과서도 뉴저지 주에서 알아서 점자로 제작해주곤 했는데, 대학생활을 하면서는 ‘리코딩 포 더 블라인드(Recording for the blind)’라는 교과서를 녹음해서 주는 기관에 가서 책도 알아서 주문해서 들어야 했어요. 결국 저 스스로 다 해내야 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상황에 대처하고 방법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것은 다 하게 되더라구요.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남들보다 다른 데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학교에서 제공해줬던 많은 것들을 다 마음껏 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는 거예요.”

   
▲ ©이애리 기자

 


“나는 ‘끝’이라 했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곳으로의 ‘인도함’이었습니다”

1987년, 대학입학을 하고 나서 신씨는 70년대 중순 미국에서 전혀 시력이 없는 시각장애인이 의대를 가서 정신과 의사가 된 사례를 접했고, 의대를 가기로 결심한다. 의대는 대학원 과정이었기 때문에 신씨는 의대를 가기 위한 프리메디컬트레이닝(의대를 가기 위한 과목을 공부하는 과정)을 3년간 들으면서 치열하게 했다. 하지만 신씨가 3학년이 되던 해, 미국 의사협회에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시각장애인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유인즉슨, 의사라면 환자의 혈색을 보는 등 기본적으로 사람의 신체를 보면서 상태를 살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의사가 되는 게 수포로 돌아갔죠. 목적을 정해 놓고 향해 달려가다가 안되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쉽게 생각하면 진로를 바꾸면 되는 것이지만, 프리메디컬트레이닝 과목을 공부했던 게 다 소용이 없는 시간낭비였나 하는 생각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도 원망했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게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생각을 지금 이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됐죠.

   
▲ ©이애리 기자
지금 다니는 회사를 2003년에 들어왔는데 분석사로서 처음 맡았던 분야가 제약회사였어요. 제약회사는 좋은 약을 팔고 있나 하는 현재 상황도 중요하지만, 주식을 사고 채권을 사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를 보려면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만큼 유망한가를 봐야 해요. 그래서 그런 것을 조사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제약회사 연구에서 사용되는 콘셉이나 용어 같은 것이 의대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수업 내용들이었던 거예요. 쓸모없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유용하게 사용된 거죠. 그때 하나님이 앞날을 내다보시고 계획하신다는 걸 느꼈고, 이런 예들이 끊임없이 제 삶에 계속 일어났어요. 기도응답이 없는 것 같았는데, 결국 10년 뒤에 확 뒤집어지는 일들이 제 삶에 일어나곤 했어요. 언론사와 몇 번 인터뷰를 했는데 전부 나의 노력과 의지에 초점을 많이 맞추고 인간적인 승리에 포커스를 자꾸 두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사실은 다 보이지 않은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신순규씨는 어떻게 애널리스트가 됐을까. 신씨는 하버드에서 학부전공은 심리학, MIT에서 경영과 조직학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신씨가 MIT조직학 박사학위 과정을 하고 있었을 때가 92년~93년이었는데, 그 해에 미국에 ADA(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 American with Disability Act)가 통과된다. 이 법의 조항 중, 고용에 있어서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 는 조항이 있었고, 그로 인해 대기업들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런 흐름을 읽은 신씨는 조직학을 연구하면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하면 기업에 잘 흡수돼서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구하다 보니 결론적으로 어떤 곳에든 장애인으로서 먼저 일을 하고 있는 선구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미국에는 시각장애인 변호사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미국에 이렇게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는지를 공부하면서 장애인을 꺼려하는 대기업에서도 이런 과정을 통과한다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 거죠. 그런 와중에 경영과다 보니까 월가의 투자은행들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일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시각장애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 저하고 같이 일하던 교수님 중에 경찰문화를 이해하고자 로스앤젤레스에서 경찰이 되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본인 얘기를 해주면서 저보고 공부는 1~2년 휴학하고 직접 재무분석가가 돼보라고 하시더군요.

왜 시각장애인들이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지에 대해서 결국 선구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연구해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재무분석가가 됐고, 그 뒤로 전 20년 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게 일하고 있습니다.(웃음)”

신순규씨는 94년도에 투자은행인 JP Morgan에 입사해 4년을 재직했다. 그리고 그 사이 뉴욕의 한 선교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지금의 아내도 만나났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일도 많았지만 신씨는 선구자로서 많은 어려움들을 돌파해 나가야 했다. 신씨 말에 의하면, 그 당시 JP Morgan이 세계적인 회사였던 곳이라 신씨를 위해 스크린리더 소프트웨어도 제공해줘서 도움을 받았지만, 당시 기술이 발전되지 않았던 터라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증권 분석을 할 때 필요한 자료들이 그 당시는 다 책자로 나왔기 때문에 신씨는 책을 칼로 자른 다음 하나하나 스캔을 떠서 스크린리더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말단은 일주일에 아무리 일을 못해도 80~90시간 일하는데 저의 경우는 시간이 더 많이 소요돼서 남들보다 더 많이 일을 했죠. 집에 못 들어가거나 회사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필요한 자료들이 다 파일로 오고, 이메일이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쉬워졌죠. 회사에서 보고서를 만들 때도 책자로 발행했지만, 지금은 전자파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일을 하기에는 훨씬 더 좋은 환경이 됐어요. 지금 보면, 재무분석가라는 직업이 시각장애인이 하기에 굉장히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처럼 신문, 잡지 등 필요한 자료들을 읽고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컴퓨터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저도 선구자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이 일이 정말 재미있어요.

   
▲ 신순규 씨가 근무하는 브라운 브라더스 투자은행(Brown Brothers Harrim) 건물 앞 ©이애리 기자

증권분석이 지루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증권투자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도표를 보고 사고파는 개념의 증권이 아니고, 이 기업의 가치가 무엇일까를 분석해서 그것을 통해 주식을 사고팔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늘 하는 말인데 진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재밌는 거죠. 직업이 진짜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인거고, 더 바랄 것이 없잖아요? 저의 아내가 늘 저보고 회사에 놀러갔다 오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저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잘 맞고 행복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마냥 행복하다는 신씨. 인터뷰 끝에 그에게 혹시나 다른 꿈이 있는지 물어봤다.

“저는 일주일에 책을 한 권 정도 읽어요. 직업자체가 책을 많이 읽게 되는데, 워낙 책을 좋아해서 여가 시간에도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해요. 추리소설 쓰는 것도 좋아하고, 가끔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리곤 해요. 그래서 앞으로의 꿈이라면 소설을 쓰는 것이에요. 사실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작성자이애리 기자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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