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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계,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의 삶 알려야

존 워다치, 시드 월린스키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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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2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장애인법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와 일본에서 장애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장애인법인 ADA법 개정에 크게 기여한 존 워다치(John Wodatch) 변호사와 40년 이상 공익소송을 진행해 온 시드 월린스키(Sid Wolinsky)변호사의 발표가 큰 호응을 얻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며칠 뒤, 한국에 비해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까지 앞서있는 미국 장애인권을 이끌어 온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오랫동안 미국 장애인권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처음 장애계에 관심을 갖고 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존 워다치(이하 존): 시민 인권 변호사로서 1973년부터 일을 시작했다. 당시 성 차별과 인종 차별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미국 재활법 ‘섹션 504’의 규정 개발 업무를 부여받았다. ‘섹션 504’는 미국 재활법의 일부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민권 법의 첫 번째 시도였다. 그 법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모든 기관의 장애인 차별을 금지했다. 학교, 대학, 병원, 지방 정부, 기업 등의 건물은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해야 하며 장애인을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업무를 하면서 장애인 권리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장애인의 정의, 장애인 차별과 법적 보호 대상의 기준이라는 주제가 새로운 것이었기에 아주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드 월린스키(이하 시드):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남동생이 발달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장애라는 주제가 낯설지 않았고 어머니를 통해 장애인 옹호를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남동생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 교장을 찾아가 동생이 입학할 수 있게 만들고, 졸업 후 고용이 되지 않았을 때 주지사 사무실에 찾아가 동생의 고용을 주장할만큼 열정적인 옹호자였다. 두 번째, 첫 공익 변호사 업무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법률 서비스 제공이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노인들 중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과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장애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세 번째,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식민지였던 하와이와의 합의 과정에서 그들을 너무나 좋아하게 됐다. 애정을 가지게 된 덕분에 장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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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장애인권 법률 비영리단체 DRA 창립자, 시드월린스키 변호사

시드 월린스키 변호사가 창립한 DRA는 어떻게 결성됐고 현재 얼마나 발전했는가

시드: DRA는 1992년, 파트너 래리와 함께 설립했다.래리는 하버드 법률 대학원을 졸업한 휠체어 장애인이다. 회사에서 변호사 일을 하던 중, 함께 장애 인권 관련 사건을 권고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장애인들의 상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미국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좋은 변호사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고,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 주요 소송을 하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창립했다. 손해 배상보다는 문제 해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일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이제 막 졸업한 젊은 변호사들이 2년간 우리와 일할 수 있는 장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들이 공익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22년 동안 33개의 장학 프로그램이 실시됐고 회사에는 점차적으로 변호사들이 추가됐다. 이렇게 버클리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DRA는 현재 25명 규모로 성장했다. 또한 우리는 뉴욕시에 대한 수많은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5년 전, 뉴욕시에 작은 지점을 하나 열어둔 상태다.

 

DRA는 장애인 인권 관련 사건들을 어떻게 맡게 되나

시드: DRA는 주로 장애인 단체를 통해 소송할 사건을 받고 있다. 적어도 일년에 두 번, 자립 생활 센터 등 미국 내 대부분의 단체들과 소통해 그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들이 무엇인지 듣는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그들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파악한 후, 사건을 결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선택하기 전, 장애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애계 전체를 돕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중이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장애인 인권 운동을 전진 시키는 사건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며 이는 한국 장애계에서도 신중하게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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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A 시행령 개정과 장애인권리협약 개발에 참여, 존워다치 변호사

한국의 장애인 인권은 표면적으로 많은 개선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숨어있는 차별이 심각하다.

존: 현재 한국 장애인들의 삶은 40년 전 미국 장애인들의 삶과 유사하다. 당시 미국 장애계가 했던 것 중 하나가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의 삶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대부분 미국 사회에서 분리 됐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의 삶이 어떤지 몰랐다. 우리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과 오명, 편견, 기회 부족을 인식하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 장애계에서도 다른 모든 논의와 별도로, 먼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비장애인들에게 알리길 권하고 싶다. 직업을 갖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출근을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등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미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인식 개선을 했는가

존: 당시 미국에서는 인식 개선을 위해 다양한 그룹들이 힘을 모았다. 그들 중 일부는 미디어를 성공적으로 사용했고 일부는 정부에 항의를 했고 일부는 공공장소에서 공청회를 했다. 정부는 장애와 관련된 모든 결정에서 장애인이 관여 됐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어떤 공청회, 어떤 결정이라도 모두 장애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다른 한 켠에서는 장애인들이 장애인 가족을 가진 상원 의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국에서도 정부, 혹은 기업 내에 장애인 가족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쉽게 장애와 차별을 이해하고 지지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미국 내에서 장애인들의 위치는 어디까지 도달해 있나

존: 확실히 미국 장애인들의 삶은 개선됐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현재 미국 대학의 10%에 장애인 학생들이 재학 중인 것만 봐도 40년 전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미국 장애계도 아직 고용 문제를 가지고 있다. 미국 내 비장애인의 경우 16세에서 46세 사이의 사람들 중 80%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장애인의 경우에는 40%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사회 서비스 등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가난한 장애인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미국 내에서도 아직 장애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드: 남동생을 예로 들자면, 동생은 고등학교까지 진학해 인증서를 받았고 글을 읽고 쓰는 법과 기본적인 숫자를 익혔다. 현재 시각 장애인을 위한 뉴저지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사교 행사에서 장애인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작은 아파트를 갖고 있다. 동생 부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정기적으로 휴가를 다니는 등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장애인 단체들은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철로에 쇠사슬로 휠체어를 묶는 등인데, 미국의 경우는 효과적으로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하나

존: 예를 들자면, 저스틴 다트라는 장애인 인권 운동의 지도자는 백악관 울타리에 자신을 묶었었다. 대중교통 접근권 때문이었다. 당시 대중교통 문제에 대해 법무부와 교통부서의 의견이 상충하고 있었다. 저스틴의 퍼포먼스를 본 백악관 측은 대중교통 접근권 확보를 위한 비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정도 비용 때문에 백악관에 자신을 묶게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대중교통 접근권을 확보하도록 결정했다. 또한 ‘Adapt’라는 단체는 그들의 목적을 알리기 위해 도시 교통을 방해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활동을 싫어하지만 우리는 정부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힘은 요구없이 수긍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정부는 강요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처음에는 장애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정부 내에서 우리의 옹호자를 찾으면서부터였다. 정부 관료가 아니라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라도 장애인 옹호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지지자들을 찾아야 한다. 그들과 시간을 두고 관계를 발전시키다보면 정부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일에 도움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시드: 어느 나라건 정부의 초기 반응은 같다. 말레이시아, 일본, 부다페스트에서 일해봤지만 어느 정부도 장애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낙담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장애인법인 ADA는 자세하고 강력하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고 강력한 법이 가능했는가

존: 우리에겐 ADA이전, ‘섹션 504’을 겪으며 법이 가진 허점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ADA를 만들 때 우리가 아는 문제를 포함하고 미래의 문제를 예상해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ADA법을 정부가 지지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주목한 것은 금전적인 이득이었다. 당시 정부는 실업 장애인들을 집에 두는 것에 엄청난 금액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직장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이 큰 이익이 된다고 본 것이다.

 

정신장애인들을 강제로 병원에 감금하고 학대하는 문제가 많이 해소된 것으로 안다.

존: 그 문제는 미국 내 지역마다 다르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많이 개선됐다. 한국의 강제입원 상황들은 미국의 30,40년 전의 상황과 일치한다. 현재 미국에는 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간단하지 않다. 법원을 거쳐야하고, 장애인을 대표하기 위한 옹호자로 무료 변호사가 임명된다. 덕분에 아직 다소의 문제는 남아있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지금까지 변호사로 일해온 날들을 돌이켜봤을 때, 어떠했다고 하겠나

존: 쉽지는 않았지만 매일 매일이 긍정적인 날들이었다.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다보니 사회의 어두운 부분만을 본다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보람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개인의 삶에 변화를 준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 이 일이 자랑스럽다고 느낀다. 장애 아동을 키우는 어머니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유아 돌봄 서비스를 받게 해주었을 때,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애를 얻은 사람이 올림픽 경기장에서 애국가에 맞춰 일어설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주었을 때, 시각장애인이 처음으로 혼자 스스로 투표하게 됐을 때 등 많은 사례들이 떠오른다.

시드: 우리는 초기에 표준화된 시험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소송을 걸었다. 소송은 성공적이었고 해당 소송에 연관됐던 시각장애인이 로스쿨에 입학하게 됐다. 그녀는 로스쿨 재학 중 우리 사무실에서 인턴을 했고 지금은 장애인권 변호사로서 소송을 맡고 있다. 이런 케이스를 겪으면 나는 우리가 매일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훌륭히 싸우고 있고 그것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신나고 의미있는 날들이라 생각한다.

작성자조은지 기자  simhy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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