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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서

권익옹호활동가 김철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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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섭외를 위한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많이 부담스러웠단다. 자신이 왜 선정됐는지, 자기를 어떻게 알고 연락이 온 건지, 난데없이 전해진 제안을 받고 나서 그게 가장 궁금했다고 한다. <함께걸음>이 왜 김철만 씨를 이번 호 주인공으로 만나게 됐는지, 그 이유는 직접 언급하는 대신 원고의 내용 안에 ‘녹여놓듯’ 기술하고자 한다.

현재 나이 27세의 청년, 그런데 그는 사회생활 4년차인 이 사회의 이방인 출신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회생활’이란 건 시설생활이 아닌 기간이 그의 인생에 4년밖에 안 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천직’을 위해, 지금도 세상 속에 존재하는 연습을 실전으로 계속한다는 김철만 씨. 한마디 한마디마다 독백 같은 고백으로 스스로를 풀어낸 자신의 삶, 돌다리 두드리듯 조심스럽게 털어낸 그의 인생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귀 기울이고자 한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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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만 씨는 뇌병변장애 1급인데, 다리 때문에 지체장애 2급을 가진 중복장애라고 했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왜 자신과 만나는지를 내내 궁금해 하던 모습, 그건 인간적인 궁금증이기도 했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담은 호기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부모님께서 언제 처음 자식의 장애를 알게 되셨냐고 물으니, 그는 질문한 이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답부터 전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 시설에서 듣기로는, 제가 파출소에 버려졌다고 들었거든요. 보자기에 싸서 버려졌다고, 그렇게 발견이 됐다고 저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병원으로 이송됐고, 버려진 장애아(兒)들이 많던 병원에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장애 아동 보호시설로 보내졌다는 게 그가 들은 출생 이후의 첫 번째 상황이라 했다.

“제 기억으로 처음 기억나는 건 다섯 살? 아니, 아마 여섯 살 때인 것 같아요. 요양원 같은 시설인데, 그냥 죽을 때까지도 살 수 있는 곳이었어요. 모든 연령대가 다 있는, 그런데 전부 다 중증인 분들만 계신 곳이었죠. 그런 공간에서 저는 생활했어요. 모두 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 어린 눈에도 ‘이게 나의 집이구나!’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제가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김철만 씨는 다섯 살 이전까지는 아동보호시설에서, 다섯 살부터 열네 살 때까지는 요양시설에서, 그 다음 스물세 살까지는 재활원으로 옮겨 생활했다고 했다. 스물셋 나이에 실행한 탈시설 이전까지 그의 인생엔 세 군데의 거주지가 존재하는데, 아동보호시설은 기억에도 없기 때문에 요양시설과 재활원 두 군데가 기억으로 되살릴 지난 시간과 장소라고 했다. (이하 그의 표현 그대로 ‘요양원’과 ‘재활원’이라 구분해 기술한다.)

“어느 날 요양원 원장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너는 여기 있기엔 참 아까운 아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성인이 되면 비장애인들처럼 사회생활도 준비하고, 하고 싶은 거 자유롭게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자립을 준비해라’ 하시면서 다른 재활원으로 옮기게 하셨어요. 요양원 안에 있던 모든 구성원들 중에서, 모두가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 안에선 제가 그나마 가장 장애가 덜한(?) 입장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열다섯 살 때 낯선 자리로 옮기게 됐어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사가 된 셈이죠.”

 

안 되면 안 하겠다는 타성의 길들임

그는 초등학교를 ‘일반’ 초등학교로 다녔다고 했다. 당연한 궁금증이 일었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서기까지, 그의 환경은 모든 게 ‘장애’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비장애의 환경과 처음 만난다는 게 문화적인 충격이 아니었을까 싶어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잊고 지냈던 과거를 회상하듯 덤덤하게 답을 이었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성장한 다음에 생각해 보니, 저를 따돌린 행동들이 있긴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엔 그게 왕따였는지를 몰랐다는 거죠. 이제야 느껴지는 게 있거든요. ‘그게 왕따였구나’ 했던 일들이 여럿 있었다는 거예요.”

초등학교 시절 학급의 조장이 우유를 가져와서 나눠주는데, 항상 그의 것은 없었단다. 담임선생님은 ‘어, 우유가 하나 남는데?’ 하며 이유를 물었지만, 조장은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그에게 강요했단다.

“그래서 얘기를 안 했어요. 저는 우유를 안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저한테는 늘 안 줬으니까요.”

그냥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지냈다는 거, 그런데 반전은 다른 지점에서 발생했던 것 같다.

“당시 영화 아니면 연극을 보러 가던 현장학습이었다고 기억이 나는데요. 저는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같이 가자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알겠다고 신청을 했는데, 나중에 그 극장을 알아보신 선생님이 뒤늦게 제게 말씀하신 거예요. 거기는 휠체어 접근이 안 되는 곳이라서, 네가 들어가긴 힘들 테니까 같이 못 갈 것 같다고요.”

당시는 요양원에 거주하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이유’ 때문에 극장에 못 가게 됐다고 요양원 담당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단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같이 가자고 해서 신청까지 다 해놓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거기가 휠체어 접근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미리 확인하고 신청을 받아야지, 이렇게 안 된다고 뒤늦게 통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크게 분노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요. 저는 그게 기분이 나빠야 된다는 걸 그때까지는 몰랐어요. 그냥 ‘그럴 수 있구나’ 하는 식이었거든요. ‘안 가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는 거죠. 요양원 선생님이 왜 그렇게 발끈하셨는지도 당시엔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맞는 일이죠. 그런데… 아,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벗어나기엔 이미 늦어버린 내성

당시 사용하던 건 수동휠체어였단다. 요양원에서는 스스로 밀고 다닐 수 있도록, 처음부터 교육을 그렇게 시켰다고 한다. 요양원 외부의 학교로 다니는 학생들을 일일이 챙겨줄 수가 없으니,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에 먼저 집중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열다섯 나이에 재활원이란 낯선 자리로 옮기게 된 그의 마음은 오히려 ‘훨씬 편안했다’는 표현으로 요약이 된다. 장애 중심의 환경에 있다가 경험하게 된 비장애 중심의 초등학교를 벗어나게 됐다는 것, 그게 그에겐 심적인 안정감을 안겨줬다는 의미가 된다.

“훨씬 편했어요. 초등학교 내내 불편했거든요.”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이 또 있단다. (그는 대화 시간 동안 ‘어, 그게 지금 막 생각나네요!’ 하며, 오랜 기간 잊고 지냈던 과거의 한 지점과 여러 순간순간들을 되찾아냈다.)

“수학여행 같은 일정이 생기면, 이동수단은 그냥 일반버스인 거예요. 업혀서 탈 때도 있었고 어떻게든 동행할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은 제가 탈 수 있는 버스가 아니었잖아요. 제가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당연한 듯 생각하게 됐어요. ‘이건 갈 수 있는 애들이 가는 거고, 나는 몸이 불편하니까 못 가는 게 당연하다.’ 그 어린 나이에 제 입장을 미리 정리해 버린 거죠.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며 함께 움직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뒤늦은 후회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느껴지게 된 걸까? 고등학교 때였다고 했는데, 질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당시 청소년이던 김철만 학생의 심정이 담긴 답변 내용, 이게 우리의 판단을 본질에 집중하도록 만들지도 모를 일 같다.

“재활원으로 옮기고, 저는 재활원 안에 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외부의 일반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여럿 있었거든요. 단, 휠체어 없이 보행이 되는 애들만 가능했어요. 시설이라는 같은 공간 안에 생활하면서도, 학교생활의 환경은 서로가 달라진 거잖아요. 그런데 일반학교 다니는 애들은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얘기하는 애들이었어요.”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하는 애들’. 이 언급은 아주 단순한 내용 같지만, 소년 김철만에겐 감당하지 못할 충격 비슷한 여운을 마주하게 만들었단다. 자신은 생각조차 못하던 의견 제시였기 때문이다.

“시설이라는 데 자체가 공동체 생활이잖아요.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통금시간이 있는 그런 곳이에요. 그런데 그 방 안에서 같이 지내는 생활지도선생님의 통제를 받는 입장이다 보니까, 일거수일투족 전부 다 간섭을 받게 돼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을 상대로 싸우는 애들이 있었어요.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면서,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선 선생님의 인정을 받아내는 모습이 저는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저 애들이 왜 저러지?’ 그런데 그런 상황을 자주 접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아,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게 아니고,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불합리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제가 느끼게 된 거죠.”

그런데 ‘그 느낌’을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던 그는, 긴 한숨과 함께 이 한마디를 연결시켰다.

“그런데 저는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거예요.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제 생활이고 제 성격이 돼버린 거였죠. 그러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저는 성격이 더 소심해지고 내성적이 돼버렸어요. 목소리도 더 작아지고요.”

실제로 김철만 씨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대화 내용 기록을 위해 녹음을 하고 있는데, 이 녹음을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반(半)농담을 던지니까, 그는 무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고치려고 애를 쓰는데도 잘 안 된다는 대답과 함께 말이다.

 

자유를 잃은 자유

재활원의 의미 자체가 신체적인 기능 회복과 강화를 위한 것도 있지만, 탈시설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훈련 과정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과정을 거친 게 있는지, 있다면 그 중에서 본인에게 의미가 컸던 프로그램 같은 게 있었는지 물으니까, 그는 잊고 지내던 내용이 떠오른 듯 반색했다.

“재활원에서 자립이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을 세 명 뽑아서, 반 년 동안 그룹홈 같은 형식으로 살아보게 한 적이 있었어요. 재활원 사업 안에 있던 프로그램이었죠. 담당자가 있긴 했지만 같이 자진 않았고, 어려운 점을 문의하는 수준으로만 관리를 했어요. 말 그대로 별다른 간섭도 받지 않고, 저를 포함한 세 명이 저희 집처럼 따로 생활했던 거예요.”

모든 게 규정이었던 틀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만끽했다는 건 얼마나 값진 경험이었을까. 그래서 그 체험으로 얻은 결과가 무엇이냐고 나름 흥을 돋우며 물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대답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내용이었다.

“저는 자유를 즐길 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요. 생활지도교사와 함께 있던 방에서는 모든 걸 다 통제받았었죠. 그런데 거기서 벗어난 상황 속에서도, 그 틀을 제가 벗어나지 못했던 거예요. 몸에 배어들어 있으니까요.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저 혼자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했다는 거…. 그게 저한테는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거 말이에요.”

가슴 아픈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열어놨는데도 닫은 채로 머물렀다는 건, 당시 그의 삶을 지배하던 틀이 얼마나 강하게 그를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절대적인 규율이 재활원 내부를 휘어잡고 있었다는 걸까?

“모든 걸 허락받아야 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싫었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어디를 가야 해서, 외출이나 외박을 해야 할 상황이에요. 그런데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거절당하면 끝이거든요. ‘그래? 잘 갔다 와’ 하면 그만인데 ‘어디를 가는데?’, ‘왜 가는데?’, ‘누구랑 가는데?’, ‘몇 시에 올 건데?’, 이 모든 걸 하나하나 답해야 해요. 그런 게 매번 반복되는 생활이다 보니까, ‘차라리 안 나가고 말지’ 이런 포기부터 먼저 떠올리며 지내게 됐어요. 미리 얘기했던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혼나고 미운털이 박히는, 그런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간절히 원하는 건 자유인데, 창살 없는 감옥일 뿐이었어요. 그건 지금도 살아가는 데 너무 큰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모든 것이 제한이었다는 거,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도 사소한 것들을 저는 물어보며 지내거든요. 혼자 선택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고 나서 결정하는 삶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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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득 생각난 게 또 한 가지 있단다. 일부러 거짓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란다.

“가끔씩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거죠. 그럴 때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이유를 대고서, 저만의 시간을 따로 만드는 거죠. 왜냐, 사실대로 말하면 ‘무슨 생각하는데?’, ‘무슨 고민이 있는데?’, 이런 걸 일일이 답해야 돼요. 사람은 얘기하기 싫은 게 있는 법이잖아요. 그런 거짓말을 해야만 할 상황이라는 거…, 이해가 되실지 잘 모르겠지만, 제겐 너무 힘든 순간순간이었습니다.”

시설 내부의 부조리함과 불합리가 어떤 건지, 의식주의 열악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얘기 들은 적은 많지만, 이렇게 심정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고백으로 듣게 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김철만 씨의 고백과 독백 중엔 더 심하고 일그러진 상황들도 여럿 있었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지면에 담아도 될 내용만 고른 것이다. 그런데도 듣고 정리해야 하는 입장의 마음은 시종일관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같은 상황에서 힘들어할 시설 생활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제각기 신음하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재활원에 있을 때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었어요. 경험도 거의 없고, 재활원에서만 사니까 제가 하고 싶은 걸 찾는다는 건 한계가 있었거든요. 조언해 줄 사람도 없고, 뭔가의 모범을 보여줘서 따라 하고픈 의지를 갖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고요. 제일 불편했던 건 비교만 당하며 지냈다는 거예요.”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참 나쁜 경우라는 생각부터 앞섰다. 그의 설명대로 묘사한다면 이런 식이다. 비슷한 입장의 A와 B, C와 D를 항상 비교하며 칭찬과 꾸짖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김철만 씨는 비슷한 장애를 가진 한 친구와 끊임없이 비교를 당했단다. 그 친구는 운동을 좋아하고, 기계를 잘 만지며 컴퓨터도 잘 다뤘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기계에 별 관심이 없었고, 컴퓨터를 다루는 데도 흥미가 없었단다. 한 명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사는 생활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게 생활하는 인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말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런 비교가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은근히 저를 배제시키는 거죠. ‘넌 왜 그래?’, ‘넌 왜 안 해?’, ‘그럴 거면 여기에 왜 있어?’, ‘넌 몰라도 돼’, 이렇게 차별의 정도가 정해지는 거예요. 아동보호시설과 요양원과 재활원을 거쳐 스물셋에 세상으로 나왔지만, 저는 시설의 생활에 물들어 있는 사람으로 나왔어요. 마음은 시설에서 나온 뒤 ‘아, 자유롭다! 좋다!’ 이런 느낌이었는데, 제 생활은 시설생활이 그대로 몸에 배어 있는 거예요. 생각이라든지, 마음가짐이라든지,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방법이라든지 모든 게 다 그래요. 리고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깨야 하는지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렇다면 최소한의 직업교육이라든지, 기본적인 사회화 과정 같은 것마저 익히도록 만들지 않고, 무작정 시설 밖의 사회로 내보낸다는 걸까?

“기본적인 교육을 받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안 했어요. 아니, 못한 거죠. 왜냐,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았거든요. 그런 과정이 있었는지 여부도 저는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재활원 출신 선배가 설립한 자립생활센터와 재활원이 함께 진행했던 한 프로그램을 통해 새 얼굴들을 알게 됐고, 그게 인연으로 연결이 돼서 센터의 활동가 집에서 거주하는 조건으로 김철만 씨는 세상에 나왔단다.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사무적인 일을 배우게 됐고, 서울에 있는 몇 곳의 자립생활센터를 알게 되면서 활동의 폭도 넓히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2박3일 과정으로 진행된 동료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게 계기가 돼서, 모임을 만들고 취업 제안을 받아 갖게 된 첫 직업이 권익옹호활동가라는 것이다.

“아직은 모든 걸 배워야 하는 입장이지만, 저는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어요. 그게 뭔지를 딱 집어 단정은 못 짓겠는데, 어딘가에 제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저만의 천직이 존재할 것 같아요. 다만 그걸 아직 못 찾고 있다는 거죠.” 제일 자신 있는 건 말하는 거라 했다.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내내 느꼈던 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묘사하는 그의 표현력이 남다르다는 점이었다. 멀리 있는 가능성보다,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재능을 키우는 게 훨씬 빠르지 않겠냐는 제안에, 그는 좋은 조언이라며 그날 만남 중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하고 싶은 건 편의시설이 잘 돼 있다는 나라들을 경험하는 거라며, 그는 개인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몇 가지 목표를 꺼내놓았다.

“아직은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저만의 판단력이 확실하지 않다는 단점이 여전히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기 생각이 맞는 게 확실하다면 바로 실행하고, 아니다 싶으면 본인의 논리를 가지고 반박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집중하며 관찰하고 있어요. 제게 부족한 거, 제게 필요한 거, 제가 갖고 싶은 저의 모습이겠죠? 쓸데없이 많았던 생각과 고민도 이젠 털어내면서, 확실하게 정리된 제 입장으로 살고 싶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잘 되겠죠? 다음 만남에선 더 좋아진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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