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무관심은 역사를 반복시킬 수 있다 > 세상, 한 걸음


우리의 무관심은 역사를 반복시킬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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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깨에 앉은 새 한 마리는 저승과 이승의 영매로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기다리다 먼저 가신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영원을 담은 상상의 새 형상이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가 되면, 사전 약속도 없던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한 목소리로 외치며 사과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음 주, 아니면 그 다음 만남을 기원하며 아쉬움 속에 헤어진다. 묵묵히 그 자리를 1년 365일 지키고 있는 하나의 상징물을 뒤돌아보면서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어갔던 만남이 1,300회(2017. 9. 13)를 넘어섰다. 1년은 52주뿐이니, ‘1,300회’라는 무게감은 단순한 숫자의 헤아림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시간만큼의 한(恨)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묻고 떠나가신 어르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호 <함께걸음>은 사단법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났다. 묻고 들으며, 해답을 찾으려는 고민을 서로 함께 나눴다. 우리 곁에 남아계신 어르신들이 이젠 우리의 마지막 노력을 간절히 기원하고 계심을 겸허한 마음으로 가슴 깊이 확인하게 됐다.

 

반(反)인륜의 만행부터 직시해야 한다

‘정신대’ 또는 ‘위안부’라는 용어 앞에서 우리 사회의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 ‘오래 전 옛 일’이라는 막연한 타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문제도 아니고 기억이 가능할 얼마 전 사건도 아닌, 두 세대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나간 일이기에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절실함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왜 이 문제가 반인륜범죄의 전형으로 전 세계에 각인돼 있는지, 왜 일본은 끝까지 부정하고 왜 유엔(UN)은 규탄의 성명을 계속 발표하는지, 그 시작점의 참상을 먼저 확인하는 게 올바른 순서가 될 것 같다.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자국 군인들에 의한 강간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점령지역에서의 반일감정이 급속도로 고조됨을 확인하게 된다. 게다가 무분별한 강간에 의한 성병의 만연으로 군인들의 전쟁수행능력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위안소’라는 제도를 도입하며 전투력 유지를 위한 젊은 여성들의 동원에 착수하게 된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전쟁 중이라도 전투지역 현지의 여성들은 ‘건드리지 않고’ 보호(방관 또는 무시)하는 대신, 군인의 성욕을 해결해 줄 여성들을 따로 차출해서 일본군 전투력 관리를 위해 활용하겠다는 발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위안소’라는 용어 안에 담긴 ‘위안’은 당하는 여성들이 누리는 안정과 평안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여성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 육체적 배설 그 자체가 그들만의 ‘위안’이고 전투력 유지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위안소의 여성들은 철저한 성병검사를 계속 거쳐야 했고, 위안소의 규정에는 계급별 사용시간, 요금, 성병검진 및 기타 위생사항이 제품설명서처럼 명기돼 있었다고 한다. 많은 군인들이 몰려들 때는 20명에서 30명 가까이 문 밖에서 긴 줄을 서며 순서를 기다렸다고 하니, 또한 이 사실은 당시 일본군 참전자들이 직접 밝힌 증언이라 하니, 위안소 ‘내부’의 장면 아닌 ‘외부’의 풍경만 떠올리며 상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분노는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야 함이 마땅한 일이다.

더욱이 성병검사는 당하는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게 아닌, 일본군의 안전을 위한 사전예방대책이었다. 생리기간이라도, 임신을 했더라도 군인들을 위한 ‘위안’은 계속 진행해야 했다는 증언이 여럿 기록돼 있다. 위안부들을 일컫는 당시의 표현이 ‘천황이 하사한 선물’, ‘위생적인 공중변소’였다는 기록 앞에서는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짓인가?’라는 질문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을 직접 찾아가 희생자들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는 독일의 총리는 왜 무릎까지 꿇는 진정성을 드러내야 했을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人倫)’을 건드린 만행이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인종청소’의 범죄를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죄하고 반성하는 그들의 모습 앞에, 모든 걸 부인하고 부정하는 일본정부의 말장난이 적나라한 비교의 대상으로 나란히 등장한다는 건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만행이 최악의 반인륜적 범죄임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감추는 데 급급하다는 것, 아니면 아직까지도 그 정도는 전쟁 중엔 일어날 만한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일본 기득권의 천박한 사고논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던져주고 싶은 사자성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입장을 바꿔놓고 판단하며 반성할 줄 모르면, 그 업보는 바로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가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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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철될 때까지 요구한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맞춰,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고 함께 모여 외쳤던 게 수요집회의 시작이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유린당한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여성단체들과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던 건데, 처음엔 일회성의 기획이었다고 들어 알고 있어요. 그렇게 몇 차례 더 모이다가 적당한 시점에 마무리를 하려 했는데, 계속되는 일본 정부의 망언 때문에 정식으로 수요집회의 틀이 만들어진 거죠. 원인 제공의 불씨를 만든 것도 일본이고, 집회를 계속 이어가게 만든 동력도 모두 일본이 제공한 셈이 됩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대표해서 <함께걸음>과 마주한 류지형 씨의 직함은 생존자복지팀의 팀장이다. 어느 단체를 찾아가도 만나볼 수 없는 명칭의 조직이 정대협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생존자복지팀은 지원체계 확보와, 전국 각지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을 직접 찾아뵙고 근황을 살피는 역할을 담당한다. 외롭게 지내시는 할머니들께서 문을 열며 크게 반기는 얼굴들이 바로 생존자복지팀 팀원들인 것이다. 수요집회의 역사를 100회 단위로 나눠 정리해 보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주요 순간들을 되돌아볼 생각의 시간을 갖게 된다. 1차(1992. 1. 8), 100차(1993. 12. 22), 200차(1996. 1. 17), 300차(1998. 2. 18), 400차(2000. 3. 1), 500차(2002. 3. 13), 600차(2004. 3. 17), 700차(2006. 3. 15), 800차(2008. 2. 13), 900차(2010. 1. 13), 1,000차(2011. 12. 14), 1,100차(2013. 11. 13), 1,200차(2015. 10. 14), 1,300차(2017. 9. 13)까지, 그리고 지금도 매주 수요일 정오에 계속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는 500차가 열렸던 2002년 3월에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간 집회 기록을 갱신했고, 이 기록은 매주 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 기간의 일본 총리 이름만 나열해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미야자와 총리(이하 총리 생략), 호소카와, 하타, 무라야마,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고이즈미, 후쿠다, 아소, 하토야마, 간, 노다, 지금의 아베까지 귀에 익숙한 이름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요집회를 최종 마무리하게 하고, 협의체인 정대협이 자연스럽게 해산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묵묵부답 아니면 적반하장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저지른 일본군 ‘위안부’ 범죄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정대협은 일곱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어요. 하나,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둘, 진상규명. 셋, 국회 결의 사죄. 넷, 법적 배상. 다섯, 역사교과서 기록. 여섯,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일곱, 책임자 처벌. 하지만 수요집회가 천삼백 회가 넘어가도록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첫 번째인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부터 인정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 나머지 여섯 가지 요구사항들은 진행될 수도 없죠. 정대협의 활동이 더욱 폭넓고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에요. 그 일곱 가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정대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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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다

정대협 활동과 관련된 용어와 명칭 중에는 두세 가지로 혼용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게 소녀상을 평화의 소녀상 또는 평화비라고 부르는 것과, 정신대와 위안부 중 어느 게 맞는 건지 정확한 설명을 접하기 어렵다. 더욱이 정신대라는 말은 더 이상 쓰지 않기로 의견이 모아진 걸로 알려져 있지만, 정대협의 공식 명칭에도 지금껏 정신대가 포함돼 있다. 방송 뉴스를 보면 위안부 앞에 ‘종군’이라는 단어를 버젓이 붙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먼저 종군이라는 단어는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언론뿐 아니라 일반 대화나 문장에서도 절대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본 극우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되는 아주 위험한 표현이죠. 종군위안부라고 발언하는 기자나 뉴스 진행자가 있다면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정대협 이름에도 들어가 있는 건, 사실 저도 처음에 의아했던 부분이에요. 협의회는 일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모인 임시조직이잖아요. 문제 해결이 되면 그 즉시 해산하는 게 맞는데, 정신대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대두됐던 그 당시엔 이 협의체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요. 정신대 아닌 다른 용어로 바꾸는 걸 여러 차례 진지하게 토의했지만, 협의체의 공식 명칭을 바꾸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새로운 명칭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그 에너지를 소비할 바엔 그 힘을 운동 자체에 더 집중하자고 논의가 정리된 상태입니다.”

정신대는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당시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한국 여성들을 유인하고 납치해 갔던 근로정신대를 본래 의미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정신대는 위안부로 그 표현을 바꿨지만, 그 표현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전히 거세다. 강제로 당하고 희생된 입장인데, 어떻게 가해자가 취득한 ‘위안’을 피해자에게 사용하느냐는 반론인 것이다.

“맞아요. 실제 뜻으로 보면 반대의 의미가 맞습니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사실 일본 측에서 주장하는 단어잖아요. 상업적인 매매춘을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다닌(종군) 여자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논의가 정대협 내부에서도 신중하게 진행됐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성노예’예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으니까 노예의 상태였던 거죠. 그런데 그 표현을 할머니들이 너무 힘들어하셨다고 해요. 피해자 관점에서 본다면 노예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데, 저희도 사실 입에 담기 싫은 너무 직접적인 표현이잖아요. 할머니들의 입장에선 그나마 위안부라는 게 덜 노골적이어서 덜 힘드셨나 봐요. 그래서 합의를 봤던 게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의 위안부니까 일본군을 반드시 앞에 붙이고, 위안부는 작은따옴표를 넣어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기로 했던 거예요. 하지만 영문 표기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이라고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일본정부의 강제성 부인이 갈수록 노골화되자, 이제는 ‘성노예’였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기 위해 ‘일본군 성노예제’로 우리말 용어를 다시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일본군이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저지른 범죄였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규정하겠다는 의미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라는 명칭을 공식화한 것이다.

“소녀상의 정확한 명칭은 평화비입니다. 평화비는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도 되지만, 할머니들과 정대협이 관련된 평화비는 전체가 다 소녀상의 형상으로 통일이 돼 있어요. 소녀상과 평화의 소녀상이란 이름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형상이 소녀인 건데 ‘소녀’ 자체가 너무 부각되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아요.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소녀’보다는 ‘여성’이 더 맞는 표현이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평화비로 통일해 부르는 걸 가장 선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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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회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대국민 홍보를 위한 거리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과거를 잊지 않아야 할 이유

그렇다면 전쟁범죄인 일본군 성노예제의 피해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일본군이 짓밟은 아시아대륙의 영역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 규모를 산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략 20만 명 정도로 추산만 하고 있는데, 그 중 한국여성이 얼마나 되는지의 추정치도 밝혀진 게 없단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할머니(1924. 10~1997. 12)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게 최초의 사례가 된다.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공개 증언한 8월 14일은 이후 세계 위안부의 날로 결정됐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로, 자신도 피해당사자라고 신고하는 분들이 생겨나게 됐죠. 신고했다고 다 등록이 되는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심사하는 과정을 거쳐야 돼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 판정이 된 후, 정대협에 정식으로 등록하신 분이 총 이백서른아홉 분이십니다. 초기에 다 하신 게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 하신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점점 연세가 많아지시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새로운 신고는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대협에 신고하고 등록한 인원이 239명이라는 거지, 대한민국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가 239명밖에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나신 분들, 현지에서 실종되거나 귀국하지 못하신 분들, 거기에다가 지금까지도 가슴속으로만 삭이며 평생의 한을 감추고 계신 분들이 얼마나 많을지 헤아린다면, 정대협이 찾아뵈어야 할 어르신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남몰래 한숨짓고 계실 것이다. 류지형 팀장은 정대협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고, 그 점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라 했다.

“생존자복지팀으로 얻게 되는 보람은 사실 별게 아니에요. 전국에 계신 할머니들께 미리 전화 드리고 찾아뵙는데, 정말 반가워하시는 모습 자체가 가장 큰 보람이 되죠. 저희 팀의 업무가 직접 방문만 있는 게 아니라서, 지역의 경우는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찾아뵐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저희의 방문을 정말 너무 고마워하세요. 저희가 더 기쁠 때는 할머니들이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셔야 할 때, 때마침 저희가 방문을 해서 병원에 모셔드릴 수 있을 때처럼 상황이 맞아떨어질 경우에요. 나간 김에 잃어버린 통장도 다시 만들어야겠다면서, 저희가 방문한 시간 안에 밖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단번에 다 해야겠다며 즐겁게 서두르시죠. ‘너희들이 와서 너무 큰일을 오늘 다 해결했다’며 기뻐하실 때, 그 시간이 저희도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하지만 심각한 상황에 계신 분들도 적지 않단다. 경제적으로 힘든 것도 큰 문제지만, 가장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건 마음이 외로운 분들을 찾아뵐 때라고 한다. 찾아뵈면 얼굴을 보자마자 봇물이 터지듯 말씀을 계속 하신단다. 정말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속에 담아놨던 말씀을 두 시간 넘게 하셔서, 한정된 방문시간을 마치고 돌아서야 하는 게 마음이 너무 편치 않다는 것이다.

“성함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활동은 못하지만 공개는 괜찮다고 허락하신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공개를 절대 원치 않는 분들이 훨씬 더 많으시죠. 저희들은 그분들의 익명성을 보장해드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생존자복지팀 팀장으로서 제가 가장

안타까운 건, 비공개 상태에 계신 분들의 사연을 저 혼자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아주 개인적인 일들이죠. 그 할머니가 어떤 아픔을 가지고 계신지, 가족사가 얼마나 복잡한지, 그런 것들을 저는 항상 떠올리게 돼요. ‘이 할머니는 정말 아프지 말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할머니들의 건강은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잖아요. 그나마 건강한 축에 들었던 분이라서 ‘난 괜찮아’ 하셨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어요. 너무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떠나실 때가 가장 가슴 아프죠. 평생의 상처를 짊어지고 사셨는데, 조금이라도 더 편한 여생을 누리셔야 하는데 말예요.”

‘생존’이라는 표현이 결례라고 느끼게 되는 건, 할머니들의 연세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대협에 등록된 239명은 등록의 수치일 뿐, 현재 우리 곁에 계신 분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생존하신 분이 40명 아래로 크게 줄어든 게 2017년의 상황이다. 지금 연세가 가장 높으신 분은 100세, 가장 낮은 분은 86세라고 하니, 해결을 위한 시간이 아주 촉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대협을 반일단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저희는 일본하고 싸우자는 게 아니라 같이 평화를 만들자는 거예요. 정대협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거, 평화로운 세상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전쟁 자체가 사람들을 비이성적으로 만들잖아요.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죠. 수요집회가 왜 천삼백 회 넘게 이어지는지, 우리가 왜 일본에게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지, 반복돼선 안 될 과거가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가 잊지 않고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 수요집회의 참여인원은 평일 점심시간대와 겹치기 때문에 100명 아래에 머문다. 그런데 방학 때가 되면 중고등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의 참여가 놀랄 만큼 늘어난다. 집회 현장의 무대에서 봤을 때 양쪽 길 끝까지 학생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굉장히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아쉬운 건 기성세대의 동참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현실이다. 소녀상 또는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불러도 되는 평화비가 단지 ‘인증샷’을 촬영하기 위한 형상이 아님을, 무엇을 노려보고 있고 왜 두 주먹을 쥐고 있으며, 발뒤꿈치는 왜 바닥에 닿지 못한 채 1년 365일을 거리에서 보내고 있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무관심하게 잊어버린 과거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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