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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인 목소리가 아니라고?

[그녀의 시선]성차별과 장애인차별 개선이 숙명이라는 전인옥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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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향이 잘 퍼지는 비 오는 주말, LP판과 카메라 등 소품으로 아기자기 꾸며진 성북동의 한 카페에서 전인옥 씨를 만났다. LP판을 보고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곳으로 정했나 싶었는데 나의 과도한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카페에 대해 묻자, 일요일에 갈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라고 했다. 그녀는 일요일이면 이동하느라 바쁘다.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미사를 진행하는 성당이 강남에 있어서 거기까지 갔다 오다 보니 동선이 복잡하다. 그래서 집에서도 멀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정하다 보니 그 카페로 정했다고 했다. 지레짐작은 미끄러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이곳은 음악 신청을 하면 틀어주는 카페라는 그녀의 소개에 마음이 좀 놓인다. 그래, 음악이 좋은 건 사실이군.

 

시각장애인, 피아노로 대학 입학

전인옥 씨는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에서 오래 활동했고 대표도 맡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1980년 시각장애인인 그녀가 ‘피아노’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대학 가기 어려웠던 때다. 그 시절 웬만큼 형편이 좋은 집안이 아니면 여자를 대학에 보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딸은 그저 살림 밑천이라는 이름으로 가정 경제에 힘을 보태거나, 남자 형제의 학비를 보태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지금처럼 대학 입학률이 80%가 될 정도로 대학 교육이 보편적이지도 않았고 형제자매도 많았던 시절이다. 그녀는 6남매 중 셋째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국에 장애인권 정책도 없었다. 대학 입학에서 장애인을 위한 우대 정책이나 시험에 필요한 편의 정책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각장애인 여성이 비장애인과 똑같이 시험 봐서 대학에 입학한 것 자체는 주목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피아노전공이니 더 눈에 띄었을 터. 그러다보니 언론 인터뷰도 많았다. 가끔 그녀가 버스를 타면 버스 안내양이 잡지에 난 그녀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녀가 피아노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던 신부님 덕이었다.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라 서울이 집임에도 충주에 있는 가톨릭맹학교에 다녔다(맹인 명칭이 시각장애인으로 바뀐 것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이 되면서다). 그녀의 세례명은 ‘오틸리아’다. 7세기경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오틸리아는 주교의 세례를 받고 눈을 뜨게 됐다. 그 후 아버지가 강제 결혼을 시키려 했으나 이를 물리치고 수도원에서 평생 수도한 성녀다.

초등학교 5학년, 피아노 주변에 맴돌며 건반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신부님은 한 달간 피아노 레슨을 시켜줬다. 재밌었다. 청주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려다, 오빠가 다니는 서울 소재 시각장애인학교에 입학했다. 오빠도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가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해서 좋았던 건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악보가 많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잠시 피아노를 놓았다. 그러다 입시를 앞두고 접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쉬었던 만큼 기량은 떨어졌다. 기량이 떨어져서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기는 어려울 거라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다행히 대학은 붙었다.

대학을 간 것은 연주자로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서였다. 장애인 당사자가 대학에 다니면 장애인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삶 대부분이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한 도전이자 활동이었는지 모른다.

 

비장애인 사회에서 장애인의 직업은 중요치 않다?

전인옥 씨가 대학에 다닌다고 ‘장애인’이 겪는 일상적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도 1980년 12월 30일의 영등포를 잊을 수 없다. 친구와 만나려고 나갔다가, 친구에게 연락하려고 전화박스를 찾으며 겪은 차별과 혐오는 날짜를 기억할 정도로 생생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아무나 붙잡고 “전화박스가 어디 있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지나던 고등학생들도 그녀의 요청을 들었지만, 자기들끼리 “전화박스 찾나 봐”라는 말만 나누고는 휑 가버렸다. 청각에 의존해 무언가를 찾다보면 모든 소리가 ‘찾는 그 소리’처럼 들릴 때가 많다고 했다. 그날도 어디선가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리를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막아섰다. “어디를 올라와” 하더니 바로 “재수 없게!”라고 내뱉지 않는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집 밖에서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큰 충격을 받고 ‘다시는 혼자 안 다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혼자 안 다닐 수 없는 처지다. 대학 다니면서도 비참할 때가 버스에서 잘못 내릴 때였다. 아무리 그녀가 언론의 주목을 받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눈먼 여자’에 불과했다. 그 느낌을 일기장에 쓰기도 했다. 지금도 비장애인 눈에는 그저 시각장애인일 뿐이다. 그녀가 피아노를 하고, 여성시각장애인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그녀의 직업이 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비장애인들에게는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성’일 뿐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람은 장애 여부로만 인식된다.

한때는 그녀도 성인의 축복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깐 한 적이 있다. 신자들과 함께 유럽 성지순례를 할 때 루르드도 갔다.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에 위치한 루르드는 150여 년 전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성모마리아가 발현한 곳이다, 성인의 지시에 따라 루르드 근처에 성당도 짓고, 사람들이 샘물로 씻기도 한다. 샘물에서 침례를 하면 ‘앞이 보이는 기적’을 포함해 치유가 4000번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피레네 산맥의 맑은 물의 기운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때문에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그녀도 주변 사람들의 독려와 내심의 기대로 파리에서 TGV(고속기차)로 6시간이나 타고 루르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생리가 시작돼 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장애인으로서의 삶은 숙명인가보다 여겼다.

 

할머니의 성차별이 키워준 민감성

전인옥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장애인 차별보다 성차별을 많이 겪었다.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여자라서 혼난 기억이 많다. 3남 3녀 중 오빠와 자신은 시각장애인이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비장애인이었다. 할머니는 비장애인인 여동생에게도 그녀에게 했듯이 무시하고 막 대했다. 꼼짝하지 않고 다리를 모아 앉아 있어야 했고, 할머니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폭력을 당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해 남동생은 자주 업어주고 ‘내 손주, 내 손주’ 하며 자장가도 불러주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중고등학교에서도 성차별이 피부에 와 닿았다. 여학생들이 시험 날짜를 변경하려고 하자, 남학생들이 “니들이 뭔데 바꾸냐”며 항의하더니 오히려 일방적으로 자기들끼리 정해서 바꾼 적도 있다. 남학생 몇몇이 어쩌다 읽은 단편 소설로 잘난 척하며, “너희들도 읽어봐”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독서라면 그녀만큼 하지도 않았을 애들이지만 알은체는 훨씬 많이 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그녀를 음악부장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남학생들이 부장은 남자가 맡는 게 좋다며 반대했다. 그렇다고 남학생이 그녀보다 실력이 나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남학생이 음악부장이 됐다. 이전에도 여학생이 음악부장을 한 적도 있었지만 으레 ‘부장은 남자, 차장은 여자’ 이런 편견을 등에 업고 남학생들이 밀어붙인 것이다. 성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성차별 때문이다. 같은 학교 남자들은 괜찮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남자 동기들에게서 불쑥불쑥 나오는 남성 중심적 사고와 태도를 접하면서 혼자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여자는 결혼하면 손해라는 말을 은연중에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 남자 뒷바라지나 하면서 삶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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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목소리가 따로 있나

음성으로 주로 상대를 파악하고 관계를 맺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음성은 매우 중요한 표식이다. 전인옥 씨는 중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여성적이지 않은 소리로 취급되다 보니 단점으로 여겨지곤 했다. 세상이 많이 변한 요즘은 가수도 중성적인 목소리를 더 매력적으로 여기지만, 그 당시에는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주변에서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라고 인정받지만 말이다.

기숙사가 대부분인 시각장애인학교에서는 학생들과의 인사가 매우 중요하다. 기숙사 방마다 들어가서 인사를 한다. 먼저 문을 똑똑 두드리고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는 식인데, 그녀는 문을 두드리면서 ‘실례합니다’라는 말조차도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말하면 친구들이 마구 웃었다. 남녀공학이었는데 남자든 여자든 그녀 목소리가 여성답지 않다고 놀렸다. 당시에는 목소리를 가늘게 변조하는 연습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고민이었다. 성별 고정관념은 외모나 행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도 해당됐다. ‘은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시각장애여성이 내야 할 목소리였다. 성별화된 사회에서는 목소리조차 젠더의 표지가 된다.

 

우연히 시작한 장애여성인권 활동

전인옥 씨가 장애여성인권활동을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이료연구원(침술을 연구하는 곳)에서 일을 하다가 피아노 레슨도 했다. 그러다 쉬면서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고심하던 중, 친구들이 적성에 맞을 거라고 조언해 상담사를 직업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시각장애인여성회(현 한국시각장애인여연합회 서울지부의 전신)가 진행하는 가정폭력·성폭력 상담사 양성 프로그램이 있어 듣게 됐고, 그게 인연이 돼 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실무자로서 10년, 대표로서 2년 활동했다.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내가 시각장애인 여성인데 뭐가 어렵겠냐’며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해야 할 실무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라 ‘멀티’가 돼야만 했다. 하나에 집중해서 몰입하는 피아노 연주와는 달랐다. 그렇게 10년 넘게 살다 보니 독서 습관도 달라졌다. 필요한 내용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으며 정보를 빼 오는 식으로 바뀌었다.

단체 활동을 그만둔 지금은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연극도 한다. 대표를 할 때 프로젝트로 시작한 연극을 계기로 배우 제의가 계속 왔다. 연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출가는 그녀가 무대에 서면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동안은 바빠서 거절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여유로워 연극 활동이 가능하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 그녀는 연극 외에도 새로운 활동에 도전 중이다. 바로 장애인식개선 교육활동이다. 그녀의 삶 대부분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오롯이 하는 장애인식개선 활동은 처음이다. 그녀 삶의 후반에서야 본격적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도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담담하고 자신감이 밴 그녀지만 그래도 응원을 보낸다. 당신은 그동안 멋졌듯이 여전히 멋진 삶을 살 것이라고.

작성자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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