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오세요. 진짜 삶은 세상 속에 있거든요 > 사람 사는 이야기


밖으로 나오세요. 진짜 삶은 세상 속에 있거든요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자조모임 조직팀장 김대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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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인생 여정을 들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 꼭지를 담당해 왔지만, 원고를 적기 전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취재를 위해 만난 인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속 얘기’를 다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가리며 포장할 만한데, 또한 일정 부분은 살짝 부풀리거나 둘러대도 상관이 없을 텐데, “저는 정말 그랬거든요!” 하며 살아온 삶을 통째로 꺼내서 마주대한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글을 적고 정리해야 하는 입장에선, 지면에 어느 수준까지 공개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하지만 그 자체가 그의 정체성이자 내면의 투명함이 아닐까 싶어, 한편으론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그렇게 정말 ‘순수한’ 청년을 만났다. 피플퍼스트서울센터의 자조모임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김대범 씨가 그 주인공이다.

 

믿음에 답하기

“처음에는 고베 대회만 참가하는 줄 알았어요. 단발성의 행사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일정한 옵션이 있었나 봐요. 저한테 연락이 계속 왔거든요. 서울시 산하 각 자치구별 장애인자립생활센터(IL센터)마다 발달장애인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저한테 센터의 활동가로 함께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 들어왔던 거예요.”

그가 말하는 고베 대회는 2015년 가을에 거행됐던 한·일 피플퍼스트 대회를 의미한다. 당시 발달장애인 중심의 한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김대범 씨는 피플퍼스트가 뭔지, 무슨 의미의 대회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참가 권유에 따라 고베행(行)에 나섰단다. 그런데 그 여정은 단순한 행사 참가가 아니라, ‘김대범’이라는 한 인생에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는 계기로 자리 잡게 됐단다. 일반 사업체의 생산직원에서, ‘장애인 인권’에 중점을 두는 IL센터로 활동영역을 바꾸게 됐으니까 말이다.

“처음엔 굉장히 어색했어요. 모든 게 색다르고 사용하는 용어도 낯설고 너무 어렵고…. 그리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서류를 정리하는 건데, 한 번도 안 해봤던 일들을 계속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궁금했어요.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는 의도가 도대체 뭐지?’”

얼마간은 진짜로 힘들었단다. 일반회사에 근무할 때는 나름의 생활법칙이 있었는데, 그 틀이 깨진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고 그는 속 편하게 털어놓았다.

“회사가 서울 지하철 2호선 뚝섬역 인근에 있었거든요. 파트 타임 근무가 끝나면,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날이면, 저는 늘 건대입구역에서 갈아타서 어린이대공원에 갔어요. 그 안에는 모든 게 자연친화적이잖아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을 바라보면서 제 눈을 정화시키고 돌아오는 게 일상의 즐거움이었는데, 갑자기 낯선 업무가 제게 주어지니까 처음엔 많이 어색하고 힘들었어요.”

그 낯설고 어색한 상황이 모두 다 부정적인 답으로 결론이 났을까? 그건 아니란다. 새로 일하게 된 곳은 서울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였는데, 자신을 좋아해 주고 일을 하는 데 믿음을 준다는 게 느껴지다 보니까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게 됐단다. 교회를 다니는 신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믿음을 주면 그 믿음에 답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고베 피플퍼스트 대회를 동행 취재했던 ‘비마이너’의 당시 기사 한 대목을 인용하고자 한다. 2016년 1월의 기사인데, 그 한가운데 ‘김대범’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 대회의 경험을 두고 한국 참가자들은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모습에 감명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김대범 씨는 “피플퍼스트 참가 당사자들은 발표도 참 잘하고 질의응답에 질문과 설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라며 “일본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말은 안 통해도 소통과 화합의 장소로 잘 마무리했다”라고 털어놓았다. - 갈홍식 기자

 

할까, 말까? 이젠 한다!

“정말 저를 식구처럼 대해줬어요. 저의 부모님께서 연결해 주신 힘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부족한 부분을 모두 다 도와주셨고요. 그러다 보니 친해지면서 정이 들게 됐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성동센터의 사무국장님이 저한테 새로운 제안을 하셨어요. 발달장애인 중심의 조직을 서울시 차원에서 만들기로 했다고요. 그래서 거기로 가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셨죠. 단, 조건이 있었어요. ‘대범 씨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건데,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 여기서 계속 일하며 함께 지내도 환영한다’는 말씀이셨거든요.”

그때 정말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일단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고 싶어서 자리를 옮기기는 했는데, 처음 얼마간은 정말 많이 후회했단다. 이유는 ‘집과 너무 멀어서’였다고 태연하게 고백한다. 말하면서도 민망한 듯 혼자 웃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서울의 한 지역을 담당하는 센터에서의 생활과, 서울 전역을 관할하는 범위가 달라짐에 대해선 분명한 차이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게다가 같은 건물 같은 층의 공간을 사용하는 (사)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일정한 역할을 전해준다는 점에 큰 힘을 얻는다고, 그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책임자답게 말했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 같아서 참 좋은 것 같아요. 많이 힘들 때도 있지만, 바로 곁에 조력자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직장과 집이 멀다는 생각은 안하게 됐거든요.”

시민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참여하거나 직접 준비해야 하는 게 ‘집회’라는 과정이다. 침묵의 1인 시위가 될 때가 있고, 다소 과격한 몸싸움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때도 있다. 평범한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해왔던 입장에서, 거리에서 마주쳐야 하는 현실의 상황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의외로 담담하게 그는 대답을 곧장 이었다. 이 대목에선 대범 씨의 부모님 역할이 돋보였다는 느낌이 앞섰다.

“1,842일 동안 이어진 광화문 지하농성장도 물론 동참했지만요. 저는 장애인 인권운동 이전부터 집회라는 문화에 익숙했어요. 처음 나왔던 게 故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반대 집회였던 것 같은데요. 앞에는 ‘탄핵무효’, 뒤에는 ‘민주수호’ 같은 구호가 적힌 종이를 높이 들고 함께 외쳤던 게 기억나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과 미선 집회 때도 나왔었고, 한미 FTA 반대, 소고기 협정 반대도 부모님과 함께 참가했어요. 광우병 파동 때도 부모님과 함께했고요. 그런 참여가 지난 번 촛불집회까지 계속 이어졌던 거죠.”

그래서일까? 조용하고 다소곳한 인상을 주로 남겼던 그는, 이전의 그 모습에서 벗어난 지 오래가 됐다. 이젠 거리행진에서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는 단골연사로 변신한 것이다. 게다가 장애인차별철폐를 주장하는 420문화제 같은 대규모 행사가 진행될 때면, 그 많은 참가자들 중에서 ‘김대범’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행사가 고조되기 시작하면, 무대 단상 앞 빈 공간으로 뛰어나와 격렬한 율동으로 ‘김대범 스타일(?)’의 춤을 한참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게 됐을까? 예전의 ‘김대범’을 아는 이들은 파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름 그대로) 그의 대범함인데,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그날의 대화 중 가장 큰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춤을 추면 신문에 나올 것 같아서요.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면, 제가 유명해질 게 분명하잖아요. 일부러라도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짜예요. 유명해지면 그만큼 더 열심히 활동하게 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걸음> 표지에 춤추는 장면이 수록되도록 해보겠다 제안했더니, 그는 연신 싱글벙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지내던 한 인물이 이렇게 광장에서 스스로를 내보이는 삶을 살게 됐다는 거, 그건 살아가는 인생의 자세 자체도 바뀌었다는 의미가 된다. 바로 이 대목에 등장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은 또 하나의 인용을 덧붙여 본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하나씩 인도해 준, 가족 같은 정을 느끼게 만들어 준 '그 사무국장'의 한마디를 부탁해 봤다. 성동IL센터 정동은 사무국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피플퍼스트 운동을 계획하면서, 발달장애 당사자 모임을 만들고 싶었어요. 모임을 이끌어 갈 사람이 필요했는데, 부모회원 자녀였고 사람을 좋아하며 유쾌했던 대범 씨가 생각나더라고요. 대범 씨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던 거 같아요. 밭에 감춰져 있던 보화를 발견한 듯 서로를 알아봤어요.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고, 동료들과 함께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던 대범 씨는 지금 물 만난 고기처럼 날개를 달고 멋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네요. 그런 대범 씨한테 늘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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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될 터이다

대화 도중에 어느 한 대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대범 씨는 ‘그게 뭐였지? 뭐였더라?’ 하며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을 다한다. 또한 그는 설명을 할 때마다, 아주 구체적인 내용까지 세세하게 언급한다. 어릴 때 다녔던 학원의 이름, 고향의 주소는 번지수까지, 심지어 자신이 태어났던 산부인과의 병원 이름까지 줄줄 읊어댄다. 전라남도 광주와 장성, 담양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지역이라는 김대범 씨. 당시 국회의원 수행보좌관이던 아버지를 거의 뵙기 힘들어서, 그의 가족은 아버지 직장이 있는 서울로 옮겨왔다고 한다. 어린이집에 다닐 나이에 서울로 왔기 때문에, 그는 아주 잘 된 일이 하나 있단다.

“그래서 제가 사투리를 안 써요!”

그런 긍정의 힘을 확인하게 됐기에, 그의 장래희망 변천사만큼은 이 지면에서 빼놓아선 안 될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꿈을 얘기하던 그가 흥분까지 하며 자세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작은 손동작이 커다란 팔동작으로 바뀌었다는 건, 그가 폼 나게 얘기하고 싶은 걸 지금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아버지 친구인 분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 수행경호원이었어요. 작전경호를 맡은 분이셨는데, 키가 정말 크고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그 분이 너무 좋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그 분이 제게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신 거예요. 대통령의 상징인 봉황 그림이 새겨진 연필과 몇 가지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도 경호원이 되기 위해 태권도를 시작했죠.”

똑바로 앉은 자세로 정신수양을 하던 시간마다, 매번 꾸벅꾸벅 졸던 기억밖에 안 난다는 그는 태권도 공인 3단이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복지카드를 가진 모든 이들 중에 최고의 고수가 아닐까 싶은 사실 하나를 알게 된 셈이다.

“그런데 꿈이 바뀌어버렸어요. 사육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동물원에서 맹수들한테 닭을 먹이로 던져주고, 북극곰한테는 생선을 던져주는 사육사들이 너무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사육사가 되려면 뛰어난 운동신경과 순발력, 올바른 정신력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태권도를 더 열심히 했고, 올바른 정신력을 갖겠다고 그때 독서를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방송으로 봤던 드라마 ‘야인시대’에 푹 빠져서 540도 회전 뒤돌려차기 등을 흉내 내던 중, 동네의 아는 형한테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일까지 신나게 공개했다. 그의 꿈은 사육사 이후로 소방관과 경찰관을 거쳐, 나중에는 고속도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고속도로순찰대나 도로공사순찰대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까지 변신을 거듭했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 꿈은 전부 공무원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실내에서 사무를 보는 일 같은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 사람들 앞에서 뭔가 눈에 띄는 활동을 해야 하는 직업들을 항상 떠올렸거든요. 대학의 전공을 정할 때도, 저는 사실 경비용역 같은 걸 지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수입이 적다고 해서, 결국 컴퓨터를 다루는 사무자동학과를 가게 됐지만 말이에요.”

그의 얘기를 한참 듣다 보니, 집회와 행진에서 마이크를 잡고 외치는 그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님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그는 자신만의 삶을 꿈꾸고 설계하며, 직접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꿈의 변천사를 통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동안 그걸 드러내놓고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거, 그래서 우리가 그를 떠올릴 때 마음의 문을 다 열지 않은 모습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오세요. 빨리요!

초등학교까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학업을 따라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뒤처졌단다. 선생님과 부모님과 함께 상담을 받고 전문기관의 검사를 거친 뒤에야, 그에겐 지적장애 2급의 판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2007년에 복지카드를 만들게 됐다니, 그의 나이로 볼 때는 상당히 늦게 받은 셈이 된다. 그런데 판정을 받기 직전의 장면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고 한다.

“최종판정을 앞두고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등급판정을 받으면 평생 장애의 범주 안에서 살아야 하고, 판정을 받지 않겠다 하면 비장애의 입장은 유지되지만 사회 속에서 많이 힘든 상황을 평생 견뎌야 할 것’이라고요. 그때 저는 아주 단순하게 판단했어요. 군대 가기가 너무 싫으니까 장애판정을 받겠다고요.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다르셨어요. 비장애로 산다고 해도, 군생활의 구타와 왕따 같은 걸 견딜 방법이 없다는 점을 먼저 헤아리신 거죠. 군대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계속 마찬가지 환경이 될 것이고요. 어떤 면에서는 복지카드를 받는 것, 그게 제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하나의 방어막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뒤늦게 등급판정을 받게 된 거죠.”

후회는 없단다. 그리고 지금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자조모임 조직팀장으로 활동하는 것도,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일반 회사생활에서 벗어난 점도 그는 만족한단다. 더 넓은 세상을 직접 마주치게 됐기 때문이라며, 그는 피플퍼스트를 만난 이후로 참가하고 활동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씩 또 하나씩 열거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만은 남아 있단다.

“자조모임이 끝나면 결과보고서를 써야 하거든요.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회계가 어려워서, 항상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았어요. 회계 문제만 아니면 자조모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센터 안에 회계만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는 돈 계산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자조모임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자신이 있거든요.”

조목조목 털어내면서도 조직의 체계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희망사항이라는 듯, 스스로 먼저 웃어버리는 김대범 씨. 작년에 출범해서 이제 갓 2년이 됐기 때문에, 아직은 해야 할 일들이 센터에 많이 남아 있단다. 그리고 자조모임의 성과가 보다 구체적으로 열매 맺도록, 더 많은 당사자들의 참여를 기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함께걸음> 지면을 통해 직접 밝히는 일 아니겠는가. 전국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 대범 씨의 목소리가 똑바르게 전해지도록, 짧고 굵게 한마디를 남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범 씨는 집회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듯, 정말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화답했다. ‘김대범 스타일’로 만남의 마무리가 이루어지게 된 순간이다.

“일어나세요! 나오세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혼자 계시지 말고, 가까운 자조모임에 꼭 참가하세요! 저희 피플퍼스트서울센터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오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으로 나오세요!”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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