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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으로 함께 사는 게 이만큼 힘든 곳이 대~한민국인가요?

[사람사는 이야기]왜소증 장애인 최종현 씨의 취업 도전기

본문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나도 그런데….’ 하며 공감을 느낄 분들이 많으실 것 같다. 더불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철저하게 수도 서울 중심이라는 문제점 또한 발견하게 되실 것이다. 화려함의 극치로 치닫는 방송화면 속 얘기는 서울 안에서도 극히 일부 계층의 특별한 삶에 국한되어 있고, 지방이라 하면 낙후됐다는 점만 강조하거나 여행지 위주로 소개됨이 대부분일 뿐이다.

수도 서울 중심부에 집중된 방송화면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며, 행정 또한 어떻게 굴절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과연 어디까지가 대한민국의 실제 현실일까? 모두가 이렇게 여유로움에 넘쳐나는 것일까? 누구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낙원에서 살고 있다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삶은 TV 밖에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하나의 실제 예와 같은 인생을 마주 대하며, 지면을 통해 함께 얘기 나누고자 한다.

 

   
 




 

내 편이 아닌 세상

“70년대 당시에는 육아 같은 데 크게 신경을 안 썼죠. 아이가 생기면 그냥 낳고, 가만 놔두면 자기가 알아서 크고, 형제들끼리 어울리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요. 특히 시골에 살던 집안들은 거의 다 비슷한 모습이었을 거예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돌이 지나도 기어 다니기만 하던 아이가 24개월, 36개월이 지나도 일어설 생각을 안 하더래요. 그래서 부모님은 아이가 틀리다는 거, 신체적인 구조가 다르다는 게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셨습니다.”

   
 

왜소증으로 지체장애 5급인 최종현 씨는, 커다란 손짓과 함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또래들과 신체적으로 월등하게 차이가 나게 되니까, 부모님은 초등학교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에 파묻히셨던 모양이다. 거주지 인근에 있던 학교는 전교생이 교실 하나에 모여 수업하는 아주 작은 규모였고, ‘이장님을 통해’ 모든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방법을 찾아가셨다 한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야 하는데, 사실 이러이러해서 얘가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니다, 얘가 잘 적응하도록 각별히 도와주시면 좋겠다, 초등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도록 꼭 도와달라는 게 선생님을 향한 부모님의 부탁 말씀이셨단다. 그래서 학교를 가게 되긴 했는데, 난생 처음 느껴지는 기분 나쁜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한다.

“그때까지는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지냈는데, 어떤 아이가 저를 놀리는 거예요. 난쟁이라고요. 왜소증이라는 단어를 그 당시에는 안 썼으니까, 난쟁이라는 말이 놀리는 흔한 말로 사용됐던 거죠. 지금 식으로는 왕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저를 우습게 보는 언행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도 성질이 있었고 남한테 지기 싫은 성격이라서, 싸우다가 불리한 조건이 된다 싶으면 이로 물어서라도 지지 않으려 했어요. 너희들한테 지고 싶지 않다는 제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려 했던 거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부모님과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는 상황으로 자연스레 연결이 되어버렸단다. 십여 분 거리라서 걸어서 다니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학교는 읍내에 있었고 버스를 타야만 통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낡은 버스들은 10분 20분 배차 간격 같은 게 아니라 한두 시간에 1대 올까말까 한 수준이었고, 학교가 끝나도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각각이었기에 학교생활이라는 게 편치 않았단다.

“그런데 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거예요. 옛날 버스들은 발을 딛고 오르는 턱이 무척 높았잖아요. 저는 어떻게 탔는가 하면, 손으로 바닥을 짚은 다음에 다리를 옆으로 올리면서 탔어요. 사람들이 담 넘어갈 때의 자세를 생각하시면 되겠죠. ‘아, 이렇게까지 해서 학교를 다녀야 하나?’ 저 자신이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 나이에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굉장히 비참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라는 게 일면 이해 안 될 때도 있는 법 아닌가. 학교를 계속 가라고 할 때는 계속 가게 되는 거라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됐고, 인문계와 공업계 그리고 상업계 사이에서 가족 모두가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기술을 배워야 뭘 하든 먹고 살게 될 테고, 또 언젠가는 혼자서 스스로 살아야 할 테니까 공업계 고등학교로 결론이 났단다. 3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뒤 내신으로 먼저 지원하고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데, 최종현 씨는 원하던 1,2지망 아닌 3지망인 기계과가 됐다고 한다. 선반 같은 장비를 연마하는 분야라서, 자신의 인적사항을 들여다본 학교 담당자가 실습이 가능한지 확인하겠다며 학교로 불렀는데… 결론은 ‘안 된다’로 내려졌단다.

 

 

마음의 문을 꼭 닫고

“다니고 싶어도 눈앞의 현실은 인정해야 했죠.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련이라는 걸 만난 거예요. 차라리 떨어졌다면, 불합격이었다면 담담하게 인정할 텐데, 합격을 하고도 저의 작은 키 때문에 해당 분야의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거…, 키가 작다는 것과 그게 저의 장애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당시의 저에겐 정말 큰 시련이었어요. 키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는 건 너무나 큰 상처였죠.”

공부를 제대로 했던 것도 아니라서 연합고사를 본 뒤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애들이 진학하던 고등학교에 가게 됐는데,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불러야 할까? 입학하자마자 담임선생님이 상담을 하자며 종현 씨를 불렀단다. 수석 다음의 차석으로 입학한 신입생이란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진짜로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는데, 게다가 장학생이 됐으니까 수업료도 면제됐다 하니 세상이 일순간 뒤바뀐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종현 씨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기면서, 도전의욕의 동기부여가 찾아들기 시작했단다. 진짜로 한번 해보자는 것!

“하지만 원래부터 공부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지 않았고, 게다가 제가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많이 허약했어요. 중이염, 기관지염, 축농증, 비염, 이런 걸 어릴 때부터 달고 살아서, 학교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죠. 그 외딴 시골집에서 갑자기 열이 오르면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어요. 지금처럼 119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까지 나가 버스를 타서 인근 도시의 병원에 도착한 뒤, 한두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치료를 받곤 했죠.”

슬금슬금 다가온 ‘사춘기’라는 늪 또한 힘든 나날을 더 힘들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모든 대화가 여자애들 얘기로 흐르는 친구들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간직하던 자격지심이라는 게 도무지 마음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기만 했단다. 적극적으로 다가서기는커녕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하게 닫힌 마음은, 이성(異姓)에 눈을 떠가던 그에게는 혼자만의 괴리된 나날 속에 파묻히는 결과뿐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선입관을 갖기 이전에, 그 상처를 방어하기 위한 보호망을 치며 집과 학교, 집과 학교, 또 집과 학교가 생활의 전부였단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으면, 특히 양가 집안이 합치는 결혼식 같은 게 있으면 아예 참석을 못했어요. 그 수군거림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걸로 꼬투리를 잡으며 집안 전체를 깎아내리려는 거…, 물론 경조사에 저도 정말 가고 싶었는데 스무 살이 넘어서야 왜 못 갔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됐어요. 집에서도 나를 외면하는 것 같고, 친구들도 외면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혼자 생활하게 되면서 머릿속 상상과 공상만 쌓아가는 게 전부였기에, 졸업할 무렵엔 더 이상 학교를 간다는 게 정말 싫어졌어요.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으니까요.”
졸업 후 어느 산 속의 암자 같은 데나 들어가서 살아야겠다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집으로 찾아온 어느 스님이 종현 씨를 보자마자 이렇게 딱 한마디를 했단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 먹고 살 팔자인데, 굳이 왜 산 속으로 오려고 하십니까?” 첫인상의 관상만으로 종현 씨의 삶을 읽어낸 그 스님 때문에, 집안은 또다시 고민 속에 휩싸이게 됐단다. ‘어떡해야 하나.’ 전문대라도 가보라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원서접수 마지막 날 형이 대신 접수를 했는데, 합격은 됐지만 전공은 자신과 전혀 관련도 없던 전자계산과였다고 한다. 복잡한 걸 가장 싫어하는 성격인데 전자계산과라…. 그래도 등록금을 내주시겠다는 말씀에 1년을 다니기는 다녔는데, 남은 건 쏟아진 권총(?)뿐이었단다. F학점만 쌓였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나다!

“실제로 그때까지는 시내를 못 걸어 다녔어요. 땅만 쳐다보며 걸어간 거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혹시라도 마주치면 상대방이 저를 굉장히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항상 바닥만 보며 다녔어요. 사람 많은 데는 아예 가질 못했고요.”

자신을 둘러싼 환경 모두가 스스로를 바위처럼 짓누르던 어느 날, 그날은 2학년이 시작되던 3월 초였는데 당시의 시간대까지 지금껏 또렷하게 떠오른단다. 교정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한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초대장 같은 걸 건네줬다고 한다. 자신들의 종교 동아리에 관심이 있다면, 오후 5시까지 참석하라는 몇 마디와 함께 말이다. 시골의 아주 작은 교회를 가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손뼉치고 율동을 함께하는 장면은 그때 처음 보게 됐단다. 사람들이 자신을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거기서 듣는 여러 말씀들이 좋았으며, 자신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이끌려서 행사가 진행된 사흘 내내 참석하게 됐고, 결국 ‘여기를 다녀야겠다’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한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메시지를 저한테 던지게 됐습니다. 저의 자아라는 거, 그동안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들을 그때부터 서서히 하나씩 떠올리게 된 거예요. 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과 해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 거죠. 잃어버리고 지냈던 자신감이라는 게 다시 생겨남을 느끼게 됐어요. 봄에 새싹들이 돋는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나씩 없어지면서 긍정적인 생각들이 밀려들게 됐고, 부모님이 저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진짜 저 자신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셈이죠.”

그때까지는 자신을 이렇게 낳은 부모님이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지만, 그 전까지는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단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거, ‘내가 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긍정의 힘을 배우기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동아리 선배들과의 자취생활도 결행하게 됐단다. 독립심과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각오로 1학년 때 쌓아뒀던(?) ‘권총’들을 다 해결하고 나니,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기 시작했는데, 그 대안은 4년제 대학으로의 편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답은 ‘No!’였던 모양이다. ‘No’가 아니라 ‘Never!’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종현 씨는 행정학을 전공해서 사무직이나 관공서에 근무하게 된다면, 앉아서 일할 수 있는 환경만 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미래가 열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선배들까지 동원해서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OK!’ 대답을 얻어낸 종현 씨는 전문대 졸업 후 청주의 모 대학 행정학과 2학년으로 편입을 하게 됐고, 미래에 대한 설계를 구체적으로 쌓아가기 시작했단다. 진짜 독립적으로 살겠다는 거, 결혼도 혼자의 힘으로 꾸려나가겠다는 거, 그 대신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고 한다.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상처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해도 유전적인 요인으로 발생할지 모를 2세의 그 인생 자체를 닫아놓겠다는 것!

 

이 사회는 문을 못 여는가, 안 여는가!

   
 

하지만 대학을 모두 졸업할 무렵 그를 맞이한 건 IMF 국가부도사태였다. 시대적 상황 자체가 취업할 엄두도 내지 못할 시기였는데, 최종현 씨는 마침 자리가 생긴 노동부에서 공채 아닌 특채를 통해 고용안정센터에 들어가게 됐단다. 그가 담당한 업무는 실직자 대상의 실업급여 처리였는데, 군대를 포함한 사회적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젊은 그에겐 그 업무 자체가 엄청나게 힘든 시련을 안겨줬던 모양이다. 상대해야 할 민원인들은 모두 다 실직자들이었기에 기분 좋게 찾아오는 사람이 아예 없었고, 아침부터 퇴근 때까지 그들의 애로사항을 일일이 들으며 실랑이를 해야 한다는 게 사회적 면역력이 없었던 그에게는 정말 고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안도 없이 쌓이는 심적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3년 만에 그만두게 됐고, 몇 개월의 재충전 기간을 거친 뒤 일반직장을 다시 들어가게 됐는데, 이번에는 콜센터의 업무였다고 한다. 직장 위치는 서울이었고 집은 성남에 마련한 뒤 2010년까지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다가, 생활의 여러 여건들 때문에 퇴사를 하고 전북 익산으로 귀향을 하게 됐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던 모양이다. 서울에서는 선택의 폭이라도 있었는데, 익산에서는 선택의 여력 같은 게 아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역단체와 달리 직업 자체가 한정되어 있었고, 업체들도 영세업자 위주이다 보니 직장을 구하기가 난감할 따름이라서 기회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한다.

“어떻게 취업의 기회를 잡게 되면, 나이 같은 조건을 먼저 따지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인고용공단에 의뢰를 하면 그나마 알선을 받고 취업이 가능할 테니까, 또한 서로 간의 정보교류 같은 장점이 있을 것 같아 전북지소에 요청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알선을 받아도 업체라는 게 너무 한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골라서 가는 게 아니라, 조건과 상관없이 제가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 상황으로 뒤바뀌게 된 겁니다.”

어렵게 소개를 받아 간 곳은 서서 일할 수 있다는 생산직이었는데, 막상 찾아가 보니까 산 속에 있는 공장이었다고 한다. 공장도 새로 짓고 있고 기숙사도 있을 거라 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공단의 소개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 자체가 최종현 씨의 키로는 수행하기 어려운 높이였기에,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고 결국 없던 일이 되어버렸단다. 이런 일은 그때부터 반복적으로 진행됐는데, 중요한 점은 현장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연결만 해주고 책임을 끝내려는 공단 측의 태도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직장 소개를 받아서 이력서를 가져오라기에 가지고 갔더니, 인사담당자는커녕 여직원 한 명만 달랑 있더라고요. 이력서를 가져오라는 건 인사담당자와 면접을 갖는다는 의미잖아요. 그 뒤로 연락이 없는 게 당연하겠죠. 이렇게 소개만 하고 그 다음은 몰라라 하는 게 공단의 업무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다른 지역의 공단들도 다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지 궁금해질 뿐이라는 거죠.”

톨게이트 영업소를 소개 받아 갔더니 소장이 마음 편하게 환대를 해줬고, 계약조건까지 얘기를 마친 뒤 그 다음 주 월요일 오전부터 출근하라고 했단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월요일 오전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 6시 반 쯤에 직원이라는 사람한테서 출근하지 말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소장의 출근시간에 맞춰 찾아가 보니까, 소장은 이런저런 난감한 얘기를 꺼내며 취업이 어렵겠다는 말을 꺼냈단다. 내용인 즉, 비장애 직원들이 기피하고 불편해 할 거다, 다른 직원들이 그만둘지 모르니까 양해해 달라, 이런 식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공단에 직접 항의하니까, 돌아오는 답변은 아주 간단했단다. 공단에서는 취업을 알선하면 되는 것이지, 그 뒤에 그 회사가 장애인을 취업시키든 안 뽑든 간에 그건 자신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자동차 부품을 생산한다는 또 다른 생산회사에서도 저를 환대하며 취업을 결정하기에, 바로 출근하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런데 사흘 만에 그만두래요. 저의 장애가 5급이라서, 그러니까 3급까지는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가 있는데, 제가 5급이니까 지원금을 못 받기 때문에 일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8일째 되던 날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됐어요. 8일치의 임금이라도 달라 하니까, 주겠다고 말만 한 뒤 소식이 없습니다. 공단에 항의하니까 법적으로 처리하래요. 임금체불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답답하고 난감할 뿐입니다.”

 

최종현 씨와의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 대화는 완성된 인생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실제현실에 대한 커다란 물음표를 찍어두기 위해 기획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취업의 문제점과, 국가가 행정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부분들이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들춰보고 싶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일부러 결론 없이 끝내는 글 내용의 끝에서, ‘나 또한 같은 상황인데….’라는 의견들이 더 많이 등장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국가가 외면하는 현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건, 결국 민초들의 생생한 목소리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작성자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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