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괜찮은 세상, 제 아이에게 보여줄 거예요 > 사람 사는 이야기


달라도 괜찮은 세상, 제 아이에게 보여줄 거예요

[사람사는 이야기] 사단법인 한빛회 사무국장 이연경

본문

이번 호 인물을 소개하는 첫 문장, 그러니까 첫 면 상단의 ‘사단법인 한빛회 사무국장’이라 새겨진 그 자리에다가 자신을 어떤 언어로 소개하며 표현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 호 주인공은 한참 고민하다가 좀 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만남의 자리가 마무리되고 얼마 지난 뒤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떴다. ‘사람·여자·엄마·장애’라는 언어의 조합이 새겨져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본문의 큰 줄기로 떠올리던 언어조합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주인공 스스로가 그 언어들을 한데 엮어 보내줬다는 건 뜻밖의 반가움을 선물했다. 얘기하고자 했던 의미와 적고자 했던 서로의 의도가 하나로 일치했다는 신선함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어느 한 공간에서 초보엄마의 육아일기를 연재하고 있는 이연경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장애여성이 아이를?’

‘장애를 갖고 육아를?’이라 하는 이 사회 전체의 편견과 일그러진 시대의 자화상에 통쾌한 ‘하이킥’을 날리는 심정으로 이번 만남의 대화를 풀어냈다. 이 공간의 지난 호 주인공이었던 방송 아나운서 이창훈 씨의 표현을 빌려오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자, 함께 보시죠!”

 

   
 

존재감이 없었던 아이

“저는 당연히 기억이 안 나니까 부모님께 전해들은 바대로 말씀드려야겠는데, 제가 5살 때 한밤중에 너무 심하게 열이 나서 저를 급히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셨대요. 그런데 병원에선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아이가 발끝에서부터 마비가 올라오고 있다고 했대요. 당일의 얘기였는지 하루 이틀 후인지 그 시기는 잘 모르겠지만, 이 마비가 어디서 멈출지는 의료진들도 모르겠다고 해서 아버지는 밖에 나가 절실하게 기도를 하셨다고 했죠. 그런데 그 마비가 다행히(?) 허리 정도에서 멈췄대요. 그 이후로 휠체어에 앉아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거예요.”

충남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풀뿌리장애인단체 한빛회의 사무국장 이연경 씨는 초면인데도 아주 오랜 구면과 같은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냈다. 성인에게는 ‘우아한’ ‘아름다운’ 등의 표현이 따라와야 하겠지만, 그의 미소는 아주 ‘예쁜’ 미소였다. 만남의 자리를 밝게 비추는 빛과 같았던 그 미소는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예쁜’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청소년기의 저는 무척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어요. 그래서 반에서 있는 줄도 모를 존재감 없는 아이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비장애뿐인 학생들 속에서 심정적으로 많이 눌려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항상 뭔가를 부탁해야 되는 입장이었잖아요. 서로 평등한 관계가 되지 못하고 늘 부탁만 해야 했기 때문에, 더 적극적인 자세로 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침에 어머님께서 연경 씨를 업고 학급 의자에 앉혀 주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저녁시간까지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만 했단다. 화장실은 아예 안 갔다고 한다. 12시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화장실 자체를 안 갔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화장실 시설이 바닥면 수세식이었는지 아니면 좌변식이었는지, 그것조차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제가 보기에는… 그때는 요령이 전혀 없고 정보의 부족이었던 것 같아요. 장애가 있는 다른 이들한테서 ‘어떻게 하면 좀 더 괜찮아.’ 하는 정보를 들을 통로가 아예 없었어요. 저는 저 이외의 다른 장애인이 천안 지역에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고 저 혼자만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럴 땐 내가 누구한테 어려움을 얘기해야 하지?’ 하는 생각 자체도 없었던 거예요. 화장실 같은 신변처리도 저의 엄마가 해주셨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엄마가 없으니 당연히 못하는 거라는 생각을, 정말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사춘기 시절이었을 청소년기 당시엔 자신의 어떤 미래를 꿈꾸며 설계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할 환경 속에서 자내야 했단다. 집안이 너무 어려운 생활고 때문에 ‘앞으로 내 인생을 이러이러하게 잘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갈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절박함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아버지와 떨어져서 친척집 방 한 칸에 남은 가족 전부가 함께 살아야 했기에, ‘소녀 이연경’의 머릿속엔 장래의 꿈이나 비전 같은 건 담기지 않고 ‘아, 친구들한테 돈을 꿨는데, 내일 어떻게 갚아야 하지?’ 하는 눈앞의 고민만 가득했단다. 이 대목을 언급하던 그의 눈가가 순식간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세상 속에서 달라지는 ‘나’

   
 
화제를 바꿨다. 대학의 전공을 물으니까 전자계산학과였단다. 전자계산이나 컴퓨터가 좋아서 정한 게 아니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입장에서 한 자리에 앉아 할 수 있는 취업과 직업이 바로 그쪽 분야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 전공을 선택한 거란다. 하지만 집안과 주변의 반대가 많았던 모양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어쨌든 한 학급의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일단 모든 게 해결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학이라는 곳은 모든 수업이 각각의 별개 강의실로 이동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때는 어쨌든 하다가 휴학을 하고 그만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해보겠다고 강하게 제 의견을 밀어붙였어요. 등록금 낼 돈도 없는 상황에서도 친척들이 조금씩 도와주셔서 첫 학기는 시작할 수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까 졸업까지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진정 하려고 한다면 도와주는 이들이 내게 붙고 함께하게 되는구나.’ 하는 답을 얻게 됐죠.”

대화가 자연스럽고 진솔하다 보니, 질문하는 입장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깊이 있는 내용과 궁금증을 부담감 없이 질문으로 던질 수 있었다. 집과 학교의 통학거리는? 20분 정도였단다. 무슨 수단으로? 버스는 탈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택시를 이용했다고 한다. 택시라고? 매일 택시를 탔다면 그 비용이 얼마인데… 하는 생각이 묻어나는 순간, 그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고등학교 때도 아버지하고 떨어져 지내야 했기에, 엄마가 일 나가시기 전 새벽에 저를 택시로 학교까지 태워주셨는데요. 그런데 정말 좋은 인연이라는 게, 택시 운전하시는 분이 정말 좋게 도와주셔서 매일 아침마다 무료로 학교에 데려다 주셨어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된 거죠. 대학 시절에는 교문에서 저를 반기는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엄마는 집에서 저를 택시에 태우기만 하면 되게 됐죠. 그 다음 학교생활은 친구들이 교문부터 하루 종일 저를 함께해 줬으니까요.”

듣는 순간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대답이었다. 이연경이라는 학생을 아침마다 학교까지 무료로 태워주는 택시 기사님이 계셨다는 거, 또한 스스로를 닫고 지냈다던 그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건 엄청난 기쁨과 행복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저절로 생겨난 일일까?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사실 ‘받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 아닌 이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다니면서 조금씩 저의 사고가 열린 것 같아요. 제가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라면, 제가 도와줄 만한 일들도 있다는 거죠. 고등학교 때까지는 저를 도와줄 친구들을 선생님이 지명하며 붙여주셨어요. 의무적인 당번이나 도우미 같은 의미가 되겠죠. 그런데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라는 인간이 좋아서 다가온 이들이잖아요. 그래서 훨씬 더 편안하게 그 친구들과 멋진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인연이 닿는 걸 보면, 인생이라는 게 참 행복한 세상인 거죠.”

나는 현장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직업은 여러 가지 의미잖아요. 기본적으로 돈을 번다는 경제적 의미가 있고, 자아실현이라는 계기로 삼는 사람들도 많이 있죠. 그런데 제게는 자아실현 같은 건 부가적인 의미였어요. 장애를 가지고 직업을 가질 기회와 방법도 사실 희박한데, 자아실현 같은 건 호사스러운 목표일 수밖에 없었죠.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 한다는 당면목표 앞에서는 저의 적성 따위는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앉아서 할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정말 많이 고민하고 찾으며 나름의 시도를 계속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세상에 대한 장벽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뿐이었다고 한다. ‘장애인 고용’이라는 광고를 보고 문의했는데 엘리베이터 없는 2층 사무실이었다든지, 애써 작성해서 지원한 이력서가 면담을 하기도 전에 버려져 있는 걸 봐야 했다는 등, 비정한 세상을 마주대하는 그의 심정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던 게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계기로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대하게 됐을까?

“제가 살던 천안 지역에 있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에 제가 들어가게 됐어요. 그 시기도 저한테는 아주 많이 중요한데, 97년 IMF 바로 직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언니와 저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만 남겨진 상태였는데, 먼저 결혼해서 서울에 살던 언니가 우리 가족이 서울로 올라오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죠. 그래서 서울로 가는 걸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에, 인근의 온양에서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됐던 어느 시설의 비리가 터졌어요. 그 일 때문에 여성장애인 업무를 맡게 됐는데, 이 일을 아예 전담해서 하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게 됐죠. 서울로 가느냐의 갈림길에서 그 일을 맡게 된 게 제가 시민단체의 일을 직접 담당하게 된, 그러니까 저의 첫 직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여기서 잠깐만!’의 개념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천안이라는 지역에 자기 혼자만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했는데, ‘나 이외의 장애인들’이 존재한다는 건 언제 알게 된 건지가 궁금했다. ‘한빛회’라는 조직이 있다 하기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자기 차량으로 운행하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엄청 많다는 걸 처음 알게 됐고, 자신의 지역 안에 장애인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게 됐다고 한다.

“처음으로 시민단체 일을 하게 된 이후로, 그 조직이 모태가 되어 충남여성장애인연대가 발족하게 됐죠. 그 부설로 IL센터인 다함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생겨서 거기서도 활동을 했고, 중간에 더 공부를 하고 싶어 나사렛대학교에 편입해서 사회복지를 전공했어요. 이후로 지금까지는 한빛회에서 일하고 있죠. 저의 활동이력이 커지고 속칭 ‘스펙’이 늘어나다 보니까, 곁에 있는 이들이 다들 교수나 공무원 당사자 등의 다음 이력을 준비하는 게 아니냐고 묻곤 해요. ‘좀 더 괜찮은 걸 할 거야?’ 하고 물으면, 저는 ‘아니, 나는 그냥 현장에 있을 건데?’라고 답을 해주죠. 저는 현장이 좋아요. 일 자체가 많이 힘들기는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들이나 저 자체가 변하는 것도 정말 좋았거든요. 저는 현장의 활동가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어요.”

   
 

‘달라도 괜찮은 세상’이 인권입니다

이 글의 처음 서문에 ‘사람·여자·엄마·장애’라는 언어의 조합을 언급한 바 있다. 단순한 4개의 단어 나열일 뿐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화두임은 분명한 일이다. ‘사람’과 ‘여자’까지는 지나치며 넘어갈 수 있겠는데, ‘엄마’와 ‘장애’라는 의미의 연결 앞에서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진한 여운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대목인데요. ‘정서적 지지’,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인 것 같아요. 저는 살아오면서 장애와 관계없는 전신마취를 3번 했었고, 미혼 때인 7년 전에는 심장수술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정말 애를 낳을 거냐?’라는 질문을 계속 받았어요. 저에게는 장애에 관한 확실한 체험은 있지만, 의학적인 전문적 내용은 모르잖아요. 그래서 의료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의료진은 실제로 장애에 대한 세세한 지식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장애여성 산모의 출산을 보장하지 못하겠다는 거죠. 실제로 여러 병원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자신은 책임을 못 진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요. 이런 초기 기간엔 본인이 원치 않던 좌절을 겪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임신 초기에 ‘당신은 안 된다.’고 하든지, 아니면 더 척박하게 시설에 있다든지, 아니면 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네가 무슨 애냐?’라고 하든지, 이러면 임신이고 출산이고 육아고 뭐고 간에, 거기에 접근하기도 전에 첫 번째부터 무너지는 거잖아요.”

아주 묵직하고 생생한 당사자의 의견을 들은 것 같았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그 다음 문제라는 것이 아닌가. 임신을 위한, 출산과 육아를 위한 다음 단계를 설계하기도 전에, 미리부터 ‘No!’ 또는 ‘Never!’라는 결론을 들으면서 인생의 꿈과 의지를 접어야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의미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요. 지역에서 워낙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난 분이 계셔서, 그 산부인과를 추천 받아서 갔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은 저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기를 낳기로 산모가 결정했으면 된 거라고요. 또한 아기를 위해서 엄마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요. 사실 그렇게 얘기해 주는 의사가 없었거든요. 그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는 정말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런 말 한마디가 무조건 갈급할 때였잖아요.”

그런데 이연경 씨는 그런 ‘딱 한마디’가 아닐 경우라면, 장애여성의 거의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할 상황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다며 답답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비쳤다.

“자기가 아기를 낳고서도 키울 수 있는 정보가 없다면, ‘나는 못 키워!’ 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잖아요. 활동보조인이 추가로 지원된다는 식의 생생한 정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다들 몰라요. 제가 정서적 지지를 원하는 이유는, 이런 식의 지지기반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에요. 출산과 육아의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잖아요. 올바른 임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의료진들의 자세와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싶습니다.”

이연경 씨는 출산의 마지막 시점에 자신을 담당했던 한 의사를 언급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게 된 건 자신에겐 인생의 복이라고 표현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의사였기에 ‘인생의 복’이라는 의미까지 등장하는 걸까? 그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제가 의료적인 말씀은 드리겠지만, 장애에 대해선 제가 잘 몰라요. 그러니까 산모님께서 저한테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즉, 장애가 있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게 아니라, ‘장애가 있다’는 전제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의학적 판단에 도움을 달라는 언급을 미리 제시했다는 것이다.

“정말 너무 감사했어요. 의료적인 진행은 오히려 최소한이고, 임신의 상태에 대해서 장애여성 산모에게 직접 듣겠다는 마음을 내놓은 거잖아요. 그렇게 직접 듣겠다는 마음만 있어도, 산모는 더 큰 힘을 먼저 얻으며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진 많은 이들은 자신이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너무 많은 얘기를 통해 자제하기를 바라는 의견을 듣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연경 씨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걸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란다.

“결심하고 결정을 하면 정말 되는 것 같아요. 절실하면 그 절실함의 내용이 자신에게 붙기 때문이죠. 사랑이 붙고 도움이 붙고, 모든 주변 환경이 바뀌게 되니까요. 출산을 경험한다는 것은 진정한 축복인 것 같아요. 임신과 출산과 육아에 의해 따르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사실 그것의 가치 이상을 갖는 축복 때문에 극복이 가능해지거든요.”

그렇기에 주변의 지지와 사랑과 관심이 꼭 필요한 거란다. 이연경 씨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장 필요하다며, 육아 휴직이 끝나는 올해 말까지는 자신의 2세 ‘초아’를 위해서 최대한의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와 비장애의 인권을 구분 짓는 잣대는 절대로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인권의 모든 건 하나로 귀결됩니다. ‘달라도 괜찮은 세상’을 만들자는 거예요.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소수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비주류나 주류, 이런 건 없어요. 예를 들어서 저는 장애라는 소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는 뚱뚱해서 날씬한 사람들에 의한 소수성을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또한 누구는 군대를 갔다 왔는데 누구는 안 갔다 왔다는 상대적인 소수성, 그렇기에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사실 주류와 다른 소수성을 다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소수자들은 안 된다’는 이 사회 때문에 문제가 있는 거지, 달라도 좋다는 배려의 마음만 있으면 자기 주변의 소수자들을 무심코 배제할 순 없는 일이거든요. 달라도 괜찮은 세상은 비장애와 장애, 여성과 남성의 차이 따위는 없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르든 간에, 달라도 다 괜찮은 원래의 소중함을 중심으로 삼아 저의 인권활동이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작성자대담 이애리 기자 |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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