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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것이 장애입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휠체어무용가 김용우

본문

‘홍콩·아시아 휠체어댄스스포츠 경기대회 4년 연속 우승’, ‘홍콩 국제 휠체어댄스스포츠 경기대회 4연패’ 등, 이 정도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면 국내대회는 물론 모두 석권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국내대회는 없었단다. 불모지였기 때문이다. 휠체어댄스라는 용어가 낯설었을 뿐, 이미 그의 모습은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자주 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빙글빙글’ 도는, 전문용어로는 ‘윌리’라고 하던데, 사진 촬영을 위해 그 동작을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카메라 앞에서 순식간에 30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으로 대신 설명한다면,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서 뒤로 뻗친 다리를 손으로 잡으며 몇 십 번인지 모를 빠른 회전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휠체어의 앞바퀴를 든 상태에서, 큰 바퀴에만 중심을 잡아 이렇게 회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그냥 씩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휠체어댄서’로 기록된 김용우 씨를 만났다. 참 멋진 사람이었다. 사흘 후 다시 그의 연습공간을 찾아갔더니, 미국의 어느 연수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며칠 후 출국하게 됐다고 했다. 더 나은 교육방식을 배우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잠시 떠난다는 얘기였다. 노력을 그치지 않는 사람은 늘 아름답게 기억이 남는다. 그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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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네 인생을 계속 살아라

“지난 97년,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장애를 갖게 됐어요. 짧은 방학 기간이 돼서, 친구들하고 여행을 떠나던 첫 날이었죠. 저녁 때 눈이 좀 많이 오긴 했는데, 땅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가 좌우로 흔들리다가 그대로 미끄러져서 언덕에 굴러 떨어졌어요. 저는 척추를 다치고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간 친구는 머리를 크게 다쳤죠. 현지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한 달 반 정도 있다가 재활시설에 가서 3개월 정도 재활훈련을 한 뒤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물론 연수는 중단이 됐죠.”

자신에게 장애가 닥친 상황을 언급하는 김용우 씨의 표정과 몸짓이 너무 여유로웠다. 마치 잘 알던 누군가의 경우를 대신 소개하듯이 말이다. “캐나다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 즉시 이해가 됐다. 미국에서 당한 사고로 우리 기준으로 1급의 지체장애를 갖게 된 어느 분의 말씀이 곧장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일단 입원시키고 누워 있게 만들면서 장애를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데, 선진국의 경우는 정반대란다. 무조건 빨리 치료해서 최대한 움직일 수 있게 만든 뒤 ‘본래의 네 삶으로 돌아가라.’ ‘너는 똑같은 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하며 다시 사회 속으로 밀어 넣는다고 한다. 단지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장애’라는 것이 생겼을 뿐이라는 것. 이런 기본적인 시스템의 차이가 한 사람의 나머지 인생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는다는 건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이 사례를 꺼내놓으니까, 용우 씨는 “바로 그거예요.” 하며 크게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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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쳤다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니죠. 그런데 저는 제가 캐나다라는 곳에서 다쳐서, 장애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르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돼요. 병원의 치료방법 같은 건 둘째로 치더라도, 예를 들어 환자실의 분위기가 밝고 긍정적이었어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재활치료를 받으러 간다, 마켓에 간다, 길을 다닌다 해도, 사람들의 분위기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운 거예요. 저 스스로 장애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그런 사회 분위기, 마주치면 누구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아무도 저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고 모든 편의시설이 완벽하다 보니까 다친 데 대한 불편함을 못 느끼는 상태로 지냈다는 거죠.”

용우 씨는 사고 이후 20일 만에 운동을 시작했단다. 부러진 뼈를 수술한 게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조금씩 운동을 시작하니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병원의 재활치료사가 더 성의와 열정을 가지고 같이 운동하며 그의 재활을 도와줬다고 한다. ‘척수신경의 70%가 손상이 돼서 다시 걷는 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담당 의사의 진단에도, 그는 스스로를 위해 운동을 계속 열심히 했단다.

“지금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건, 재활센터에서 재활을 받던 다른 환자들의 모습이에요. 굉장히 빠르게 사회에 적응해 나가더라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빨리 찾아서 빨리 시작하는, 그런 환경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거예요. 그 곳에서 그렇게 3개월 정도 재활치료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와 공항에 들어섰을 때부터 딱 마주치게 된 건 이 땅의 사회적인 시선들이었죠. 도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고정관념들, 모든 길이나 도로의 턱이나 차량 이용 등 모든 게 장벽 같은 환경들…. 귀국해서 공항을 빠져나오는 동안 제가 절실히 깨달은 건 이것 하나였어요. ‘아, 이게 장애인가?’”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됐다는 건 ‘사고의 그 순간’ 이전과 이후의 삶이 정확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까지의 인간 김용우는 어떤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을까? 어렸을 때는 내성적이고 특별히 잘하는 게 없던 아이였단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성격이 싫어서, 고등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일부러’ 더 말하고 더 움직이는 생활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처음 맡은 건 과대표였고, 보다 활발하게 살고 싶어서 응원단 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단다. 현역으로 입대해서 전차병, 그러니까 탱크를 몰고 다니는 ‘군인아저씨’로 복무한 뒤 제대했고, 졸업 후 어학연수로 이어질 때까지 활발한 성격의 청년으로 지냈다고 기억된단다. 그렇다면 그런 활발한 성격이 그대로 휠체어스포츠댄스로 연결이 됐다는 걸까? 그건 아니란다.

“장애를 얻고 들어와서 3년이란 시간을 치료에 매진했어요. 골반까지 오는 보조기를 차고 목발을 짚고서,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아파트 뒷길에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매일 걷는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쌓여갔죠. 제가 어릴 때부터 철학적인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분노라든지 선악의 감정 같은 걸 계속 떠올리며 3년의 시간을 문을 닫고 보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 하나가 퍼뜩 들더라고요. ‘내가 그 당시에 더 크게 다치지 않고 죽지도 않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데, 내가 살아 있는 건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저 나름대로 존재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거예요. 그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바깥세상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는 계속 제 안에 갇혀 있었다는 거죠.”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데, 지금처럼 계속 장애에 매달려서 똑같은 나날을 헛되이 보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분명히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앞으로의 삶을 정말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날 이후로 김용우 씨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장애를 받아들이게 되고, 남들처럼 사회로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게 됐단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1종 운전면허를 기본적인 손 움직임 테스트를 받은 후에 2종으로 바꿔서 운전대도 다시 잡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세상은 그가 알던 그 세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를 하고 싶어서 나왔는데, 그래서 계속 밖으로 문을 두드렸는데도 막상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단다. 자신에겐 아무런 재능도 없는 것 같다는 걸 자괴감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건 마음을 심하게 다치도록 만드는 일이다. 만남 중에 김용우 씨가 그런 의미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남모르게 실의에 빠져 지내야 했던 기간이 그때였던 것 같다. 주변에서 운동을 권하기도 했단다. 휠체어농구나 휠체어테니스를 추천받곤 했지만, 그는 이상할 만큼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고 했다. 마음의 문이 다시 절반 정도 닫힌 상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꽃은 반드시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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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년 2년 정도 지난 후, 그러니까 2002년이었던 것 같아요. 아는 분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게 됐어요. ‘휠체어댄스스포츠라는 게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는 장애인이 한 명도 없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일단 네가 한번 그 사람을 만나 보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났고 영상을 받아서 집에 와서 봤죠. 그런데 보는 순간 저한테는 완전한 충격이었어요. 쇼킹 그 자체였는데, 굉장히 좋은 의미의 쇼킹이었죠. 휠체어를 타고 멋진 의상을 입은 사람이 멋진 파트너와 함께 경쾌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저한테는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어요. 너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러면서 제가 캐나다 재활센터에서 만났던 캐나다 친구들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장애를 가지고도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찾아 해변도 다니고 서핑도 하면서,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직장도 다니던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그때 그 친구들처럼 저도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던 거죠.”

하지만 휠체어댄스스포츠는 국내에서 아무도 모르는 분야였고, 선수 아닌 선수는 김용우 씨 단 한 명뿐이었단다. 그렇지만 지도해 주시는 분의 대학생 제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갖은 시행착오 끝에 일정한 틀을 만들어갔고, 2003년에는 일산에서 동호회가 만들어질 만큼 함께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게 됐는데, 우여곡절 속에 결승에 올라 손바닥 살이 다 벗겨지도록 최선을 다한 결과 6팀 중에 5위를 하게 됐단다.

“2005년이 가장 큰 갈림길이었죠. 이걸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고민이 가장 깊어질 때였어요. 아무리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고, 이걸 통해서 앞으로 제가 직업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하는 회의가 계속 밀려들었던 거죠. 그런 상황일 때 마침 홍콩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린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걸 정리한 뒤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지인들에게 털어놨는데, 그 대회에서 제가 우승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모든 상황이 갑자기 뒤바뀌게 된 것이죠. 은퇴 아닌 은퇴로 포기를 떠올리고 있을 때, 아시아 챔피언이 된 거잖아요.”

이후의 그의 삶은 모두에게 알려진 것, 드러난 것 그 자체로 이어진다. 그는 아시아선수권대회를 4년 연속 우승하고, 세계대회에선 4위의 성적까지 일궈내게 된다. 2006년에 서울에서 함께 공연했던 중국장애인기예단의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아 그와 같은 공연단 설립을 준비한 결과, 국제적인 공연단으로 성장한 ‘빛소리친구들’을 지금껏 이끌게 됐다. 선수로서는 2009년에 은퇴를 하고 이미 아시아 챔피언에 오른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지금은 또 하나의 도전인 ‘성우’ 트레이닝을 받고 있단다. 성우라고? 어쩐지…. 그와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듣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정적인 음성으로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바로 성우의 목소리였던 셈이다. 이번 가을에 성우로도 공식 데뷔를 하게 된단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바로 이거예요. ‘미래에 대한 꿈과 도전을 하지 않는 것이 장애다!’ 다시 말한다면 ‘꿈꾸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것이 장애다!’ 그런 주제로 얘기를 많이 해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장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그 삶의 미래를 스스로 꿈꾸고 계획하며 도전해서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 제대로 된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몸의 장애가 장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자신의 삶의 미래를 만들어가지 않는 게 가장 큰 장애라는 점을 저는 항상 강조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챔피언에 올랐을 때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언젠가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왔을 것이고, 몸의 한계가 와서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는 순간이 닥칠 것이며, 아무리 우승을 한다 해도 대회에 나가는 것 자체도 즐겁지 않은 시점이 온다는 것, 그렇기에 새로운 꿈과 도전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그 꿈과 도전이 성장 동력이 되어 더 나은 완성을 이루어낸다는 그의 지적은 밑줄 긋기 딱 알맞은, 정말 인생의 무게감으로 느껴지는 조언이었다.

“그렇기에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해서 계획하고 꿈꾸고 준비해서 계속 도전하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합니다. 그러면 단기간에 이루어지진 않지만, 어느 순간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노력한 것이 꽃 피울 수 있고 새로운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찾아 꾸준히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 길을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맨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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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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