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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남들처럼 삽니다

사회복지사 최선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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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월간 <함께걸음>의 편집부에서 선정한다. 그런데 그 인물을 직접 만나는 건 객원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외부의 1인’이다. 일단 결정이 되면, 전국 어디든 ‘그 인물’을 만나러 출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선정된 주인공이 ‘외부의 1인’과 10년 넘게 인간적인 교류를 이어가는 지인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나눴던 대화의 총량 가운데 90% 아니, 99% 정도는 술자리에서 이뤄졌다고 믿어지는 ‘이 인물’을 어떻게 취재해야 할까?
주관적인 관점이 투여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객관적인 인터뷰의 내용을 어떻게 독자 여러분께 풀어내야 할지 나름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대안을 찾았다. 그의 이름을 ‘최선호 씨’라고 적지 않고, ‘선호’라고 기록하는 걸 주관적인 관점의 전부로 붙잡아 두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칭은 주관적으로 부르겠지만, 그 나머지는 평소의 취재 방식대로 진행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형, 좋은 오빠, 좋은 후배, 좋은 동생이 될 ‘최선호’가 간직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정리한다. 서울 한 지역의 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는 ‘희귀질환 백색증’의 최선호를 소개한다. 장애인권 활동의 경력은 두둑하게 쌓여 있으니, 독자 여러분 중에서는 ‘어, 이 친구?’ 하며 반길 분들이 많으실 것 같다. 맞다. 바로 그 인물이다. 

 Are you a… 미국인이세요?

선호는 대외적인 활동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와 마주치게 되는 거의 모든 이들이 떠올리는 건, 그가 일상의 외국인인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지나치면 괜찮을 텐데, 그의 호탕한 성격은 큰 목소리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때부터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쳐다보기 시작한다. ‘어, 이 상황은 뭐지?’ ‘우리말 참 잘하네?’ 이 정도는 괜찮다.

문제는 그가 ‘토종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부터다. 먹는 음식, 하는 말, 일상적인 행동, 대화중에 드러나는 가치관 모두가 ‘Made in Korea’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진다. 100% 백의민족이 분명한데도, 눈으로 보이는 건 100% ‘백색인간’이기 때문이다.

“백색증이에요. 사람의 몸 색채를 유지하게 만드는 멜라닌색소가 몸 안에서 생성되지 않아 발생하는 장애라고 할까? 아무튼 희귀질환이에요. 확률이 10만 명 중 하나라고 하죠. 세 가지 증상으로 문제가 발생해요. 첫째, 피부가 하얗고 둘째는 몸에 난 털이 다 하얀 색이에요. 세 번째는 눈동자가 투명해져서 빛을 거르지 못하고 그대로 투과하기 때문에, 그 희미한 빛을 신경이 받아들여야 하느라고 심각한 저시력이 되는 거죠.”

어릴 때는 몰랐단다. 원래부터 외출을 잘 안 하는 집안이었기에, 그냥 그런가 하며 지냈던 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의 ‘당연한’ 생각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갑자기 덤비는 건 체육시간과 소풍 같은 외부 활동이었는데, 그때부터 뭔가가 심각하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단다.

“그제야 알게 됐어요. 제가 왜 외출을 하면 안 되는지, 또한 저의 집안이 왜 여행 같은 걸 안 하고 살아왔는지를, 집 밖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거죠. 제가 햇빛을 받으면 안 되는 인생이라는 걸 가족 모두가 감당하며 지내왔다는 건데, 저 때문에 변변한 여름휴가 한 번 제대로 못하는 가정으로 살았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됐어요. 뒤늦게나마 많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속상한 마음을 혼자 삭혀야 하기도 했죠.”

백색증은 햇빛과 햇볕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한다. 벌겋게 화상을 입는 수준이 아니라 피부 자체가 녹아버린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선호는 자신의 아주 어린 시절 실화 한 가지를 떠올렸다. 듣고 있기가 곤혹스러울 만치의 과거사(史)가 등장했다.

“다른 애들과 다르게 온 몸이 하얀 아이가 태어났으니, 부모님께서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확인하셨을 거잖아요. 그런데 분명한 주의사항이라고 강조했던 한 대목을 못 들으셨나? 잠시 잊으셨나? 그러셨던 것 같아요. 제가 3살 무렵에 해수욕장을 가셨대요. 두 시간 반 정도 바닷가에서 지낸 결과가, 제 몸이 전신 2도 화상에 부분 3도 화상으로 난리가 났던 거죠.”

3도 화상이면 최악의 상황이 됐다는 의미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피부 전체가 녹아버렸단다.

“‘뱀파이어’ 같은 시리즈의 영화를 보면, 햇빛이 들 때 뱀파이어의 피부가 녹는 장면 같은 게 연출되잖아요. 저는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제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대요. 피부가 다 녹아서 전신의 근육이 그대로 노출된 상황…. 그래서 병원에선 병원 내에 보관된 기저귀들을 다 모아 잔뜩 쌓아놓고 그 위에 아주 얇은 거즈를 덮어놓은 상태에서 아이를 그 위에 올려놓은 뒤, 계속 흘러내리는 근육의 물을 일단 흡수시키면서도 우왕좌왕했대요. 저의 엄마는 애가 죽을까 봐 어떻게든 몸에 물을 붓고 묻히는 상황…. 그때 그렇게 살아남았다고 전해 들어서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는데, 이렇게 말로 표현하고 되짚으며 다시 떠올리다 보니… 완전 지옥이네요.”

 

먼저 아는 척을 해주세요

멜라닌색소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백색증의 증상은 세 가지라 했다. 피부가 하얗게 되고 몸의 모든 털이 흰색이 되며, 어떤 면에서는 가장 심각할지 모를 눈동자의 장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백색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무조건 세 가지 증상을 다 가지는 걸까? 그건 아니란다. 한 가지 또는 두 가지의 증상만 갖는 이들도 꽤 있는데, 선호는 세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있는 최중증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10만분의 1이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엔 4,5백 명 정도 있겠죠. 저의 집안,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일가친척을 다 살펴봤는데,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저만 이렇게 백색증을 갖게 된 거예요.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드물지는 않대요. 그래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했을 때, 10만분의 1의 확률로 저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거죠. 부모님 모두 유전자를 가지고 계셨던 거고, 저의 누나도 물론 유전자를 가지고 사는 겁니다.”

누나가 결혼하고 임신을 했을 때, 선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열 달이 끔찍했단다. 혹시라도 백색증인 조카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완전히 지배됐었다는 얘기였다. 진통이 와서 누나가 병원으로 갔다던 날, 선호는 꼬박 밤을 새우며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조카의 탄생 소식에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눈동자 색이었단다. 까만 눈동자, 보통의 피부색, 그제야 깊은 한숨을 돌렸다던 선호는 당시 상황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런데 선호에겐 독특한 능력이 있다. 시각장애 3급이고 백색증 특유의 저시력임은 분명한데도, 누구든 단번에 알아보며 반기는 것이다. 게다가 웃지 못할 일은 선호가 속한 단체에선 항상 선호가 카메라 담당이라는 사실이다. 저시력의 시각장애인데 촬영 담당이라는 것,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은 지나가는 말로 선호한테 늘 한마디를 던져놓곤 한다. ‘너 가짜지?’

“하하하, 정말로 그 말을 자주 들어요. ‘너 가짜지?’ 그런데 저는 시지각능력과 활용능력이 좋은 편이에요. 제 시력보다 잘 보이거든요. 달리 말한다면, 제가 만들어놓은 환경에서 저 나름의 노력을 겸비한 결과이기도 한데요. 저는 항상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부탁을 했어요. ‘내가 안 보이니까 네가 먼저 아는 척을 해줘라.’ 그래서 저를 아는 분들은 저한테 먼저 인사를 하고, 저는 저한테 다가오는 분들을 집중해서 확인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안 보일만한 건 아예 안 보고, 볼 필요가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선택이 가능해진 거죠.”

실제로 선호는 도로의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으면서도, 먼저 알아보며 손을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도 신기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까, ‘그 사람’의 형상 자체를 기억하는 방식을 쓴다고 했다. 늘 모자를 쓰는 사람, 복장이 특정한 사람, 일정한 모양의 가방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 등의 형태를 하나씩 기억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을 ‘누군가’를 유추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끝에 듣게 되는 한마디는 늘 똑같았단다. ‘너 가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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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는 처음으로 합니다

선호와 오랫동안 지내온 활동가들은 모두 같은 의견을 말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의 선호가 상당히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도 인정한단다. 매사에 부정적이었고, 성격 또한 안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천성이 부정적이다 보니, 모든 게 비판적으로 흘러갔어요. 얘기를 하다가도 ‘저건 왜 저럴까?’ 하며 의문부터 떠올리고, 앞의 얘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이 나오면 곧장 따지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선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좀 더 긍정적이었으면 좋겠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안 보이는 건 안 보면 된다.’ 그런 말씀이 쌓이고 쌓이면서, 특히 ‘안 보이는 건 안 보면 된다’는 말씀이 저로 하여금 시지각능력과 활용능력을 키우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됐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선호의 사회생활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장애인 권익과 관련된 영역 안에 집중되고 있다. 사회 초년병이었던 시절, 연배가 높은 시민사회단체의 선배들은 그에게 늘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조급해 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대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괜찮아. 그게 무슨 문제인데?’ 그래서 그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됐단다. 긍정적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선호는 조금 다른 얘기라고 양해를 구하면서, 맹학교 시절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맹학교의 약시 학생들은 무언가를 보려고 정말 많이 노력한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안 그랬단다. 안 보일 것 같으면 그냥 안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다른 이들보단 훨씬 덜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런 과정이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시지각능력이 남다르게 발달한 것 같다는 게 그의 결론인 셈이다.

“맹학교 시절이 저는 잘 기억이 안 나고, 학교생활 자체가 불편했어요. 다른 학생들보다는 제가 조금이나마 보이는 편이라서 그게 우월할 만한 일이어야 했는데, 저 자신은 그게 오히려 더 불편하기만 한 생활이었어요. 왜냐하면 아예 안 보이는 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보는 역할을 제가 모두 담당해야 했거든요. 저 혼자 움직인다면 잘못된 길을 가도 다시 돌아가면 끝이잖아요. 그런데 애들을 십여 명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헤매고 빙빙 돌아야 했던 건, 모두에게 매번 미안한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정말 힘겨운 일이었어요. 식당에 가도 식사 주문은 제가 전당해야 했거든요.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걸로 생활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꼭 봐야 함을 강요당하면서 살아야 했다는 게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는 거죠.”

또한 맹학교의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인지를 사회에 나온 뒤에야 알게 됐다고도 했다. 좁은 울타리 안이 세상 전부였던 맹학교와 실제 세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와서 정말 막막하다는 느낌, 이건 아니라는 실감, 그게 엄청난 벽이라는 걸 느꼈던 게 있어요. 단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맹학교는 사회화할 수 있는 장치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제가 느꼈던 건, 매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사회화하는 과정을 배우는 거라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맹학교는 똑같은 서른 명 내외로 몇 년 동안 계속 같이 지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귀는 방법을 배울 필요도 없었어요. 세상 속에 내던져진 입장으로 대학교 1학년이 됐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제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때였거든요.”

 

부모님들의 심정 이해합니다. 진심으로

희귀성 난치질환인 경우엔 환우회 모임이 소수 중심이라도 활성화되는 예가 많다. 백색증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물으니까, 백색증의 경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단 병이 더 악화되거나 일상생활 자체가 크게 불편한 게 아니기 때문에, 환우회라기보다는 동호회 형식의 작은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선호는 두어 번 가봤단다. 그런데 눈에 띄는 특징은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백색증 당사자보다는, 어린 백색증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는 점이었다고 한다.

“처음 참석했을 때는 당사자들끼리 모여, 남들이 보기엔 사사로운 것 같은 정보 교환을 하는 게 참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례로 선크림 같은 거, 어떤 제품이 있고 어떤 게 좋은가 하는 경험담을 나누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정보의 부족에 목말라 하던 부모님들의 참여가 늘어나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부모 중심의 모임이 됐다고 들었어요.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정말 막막하거든요.”

선호는 모 대학 종합병원 안과의 저시력 클리닉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 꼭 만나게 되는 게 백색증 자녀와 함께 온 젊은 부모들이란다. 그들은 성인 당사자인 선호를 붙잡고, 정말 엄청 많은 질문을 쏟아낸다고 한다. 어떻게 컸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어떤 게 어려웠고 어떤 부작용이 있었는지, 그리고 가장 큰 걱정과 고민으로 질문하는 건 맹학교와 일반 학교 중 어디를 다녔는지 여부로 귀결이 된단다.

“당장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걸 제외한다면, 그래서 그 생활에 적절히 대처하고 적응하며 지낼 수 있는 환경만 갖춰진다면, 희귀질환임이 분명한데도 굳이 심각한 장애가 아닐 수도 있는 증상이에요. 저처럼 여름에 햇빛 있는 곳을 피하며 긴팔 옷을 입고, 가급적 외부보단 실내 중심으로 생활하는 게 익숙해지면 피부와 관련된 문제는 피할 수가 있거든요. 어릴 땐 염색으로 머리색을 바꿔봤던 적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백색증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물어볼 데도 없고, 제대로 된 답을 해주는 데도 없다고들 하세요. 의지하고 싶은 건 사회생활을 한다는 성인 당사자들의 삶을 귀담아 듣고 싶은 건데, 저는 제3자들이 ‘백인인가?’ 하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외모잖아요. 그런데 아쉬운 점은 적지 않은 백색증 당사자들이 한눈에 봐도 중한 환자로 보일 만큼의 아주 흰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한마디로 혈색이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를 붙잡고 묻는 부모님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저는 제 삶을 삽니다. 남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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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선호’라는 인물에 대한 십여 년 전의 첫인상은 편안했다. 많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기억한다는 부정적인 면과는 전혀 다르게, ‘낙천성’을 주로 마주 대하며 지냈다는 의미가 된다. 다들 선호가 어둡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밝은 면 중심으로 마주했다는 게 일면 신기한 부분이기도 했다.

왜 그런 상반된 반응을 느끼게 됐던 걸까? 긍정적인 관점에 집중하려 했던, 그래서 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시기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던 대상이라서, 자신의 ‘망가짐’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긴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당시에는 선호와 업무상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99%가 술자리의 역사였으니까 말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딱 하나 있었거든요. ‘남들처럼 살자!’ 그냥… 남들하고 똑같이 살고 싶었어요. 여름이 되면 피서를 가고,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면 학교에 가고, 체육시간에 같이 뛰어 놀고, 공부할 시기가 되면 똑같이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회사에 갈 나이가 되면 동등하게 회사에 다니고, 그게 저의 모든 꿈이었어요. ‘남들처럼 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인생이었거든요.”

그 발언을 듣는 순간 마음이 ‘짠’해졌다. ‘남들처럼’이라는 표현 하나에 선호의 인생 모든 명암이 다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그런데요. 저는 다 잘된 것 같아요. 저는 요즘에 남들처럼 살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거든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활동하는 단체 안에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 있고, 저도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인생을 함께 살고 있으니까, 제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이뤄내고 있는 거잖아요.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함만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싶은 그대로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마음 편안해요.”

그렇다. 맞는 말이다. 거저 얻은 건 하나도 없다. 시민사회단체의 운동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안 하는 이를 이끌어주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움직일 의향이 있다고 표현하게 될 때 활동가들이 다가서게 되고, 움직이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할 때 비로소 맞잡는 손길이 주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선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의지로 해결해냈다. 해결하고 있는 중이고, 해결하게 되리라는 기대도 가능할 인생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믿고 맡기는 과정 또한 가능해진다.

“제가 비교할 대상은 ‘나 자신’이어야지,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런지 남들처럼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이 어떤 것일까 하며, 그 기준이 매일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아요. 언제나 ‘나 자신의 인생’이 가장 큰 정답이 돼야 한다는 거죠.”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멋진 인생을 마주보았다. 모든 대화를 끝내고 나서 글 잘 적어주는 조건(?)으로 술 한 잔 사라고 했더니, 망가진 모습 그대로 적어도 된다며 선배니까 술을 사란다. 알겠다며 인근의 치킨집으로 향했다. 건배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떠오른 듯, 이 한마디를 꼭 원고에 포함시켜 달라고 했다. 짧지 않은 그 내용을 마무리로 정리한다. 역시 선호…, 멋진 녀석이다.

“백색증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생명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는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이 걸음마할 때 넘어질 걸 두려워하면 아예 못 걷잖아요.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피부가 까지기도 하면서 뛰어다니다 보면, 재활도 되고 육상선수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저의 엄마가 그러셨거든요. 제가 잘 안 보이니까 엄청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죽 가던 길에 계단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으실 텐데, 그냥 가라고만 말씀하셨어요. 혼자 내버려둬도 혼자 갈 수 있겠다는 거, 자기 삶은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 네, 맞아요. 저는 그때부터 제가 혼자 걷는 능력을 갖게 된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작성자글과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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