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입장으로 바라보세요 답은 거기에 있습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발달장애인의 입장으로 바라보세요 답은 거기에 있습니다.

한사랑발달장애인 자립지원센터 소장 황상윤

본문

같은 장소를 두 달 연속으로 방문 한다는 거, 이런 경우는 <함께걸음>과 함께한 이후 처음 발생한 일인 것 같다. 지난 8월호 취재를 위해 발달장애인 동료상담을 하는 당사자 두 인물을 만나러, 대구광역시의 동쪽 어느 지역으로 다녀온 바 있었다. 한 센터에서 활동하는 상담가 2인을 만나고 왔는데, 취재를 끝낸 뒤 나눴던 그 센터의 소장 ‘1인’과의 대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다. 장애인 권익을 위해 활동하던 비장애 1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1급의 장애를 갖게 된 뒤 장애인 권익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거, 이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실제 당사자와 만나게 된 사례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만났다. 한사랑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 황상윤 소장이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비장애의 입장에서 바라보던 장애의 세상을 당사자가 되어 다시 바라보게 됐다는 거, 긴 시간 마주앉아 그의 진솔한 의견을 듣고 왔다. 그 내용을 옮긴다.

 

그럼 앞으론 못 걷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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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는 재활을 하고 노력을 좀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상태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재활훈련을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죠. ‘척수손상인데 괜찮아진다고요? 척수손상이 어떻게 걸어요? 저는 앞으로 못 걷는 거잖아요.’ 저한테 위로를 하려던 건지, 말을 돌리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완곡하게 설명하던 의사가 오히려 말문이 막혀서 멈칫하더라고요.”

한사랑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 소장 황상윤 씨는 2007년 9월에 당한 교통사고 이후에 진행됐던 세상을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좋은 표현으로 꾸미려는 시도 같은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느낀 그대로 기억과 체험에 남아 있는 ‘그 시간들’을 하나씩 또 하나씩 꺼내놓았다. 듣는 입장도 ‘덤덤하게’ 경청을 해야 할 상황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지체장애 1급이 된 그의 사고 당시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울산광역시 한 시설의 시설장을 맡아 근무하던 어느 퇴근길에 1차 접촉사고가 난 뒤 튕겨져 나간 그의 차가, 반대 차선을 달려오던 차량과 운전석 방향으로 2차 정면충돌을 일으켰단다. 분초가 시급한 큰 수술을 담당할 전문의가 마침 자리를 비워서 대구로 급히 이송된 뒤 여러 수술이 계속됐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병원 측에선 죽을 수도 있다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매번 흘러나왔다고 한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언급한 것이겠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다는 건 분명했단다. 모두가 절망에 빠지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믿은 단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렀고, 고관절 대퇴골 다 박살이 나며 치고 올라와서 뱃속의 장기들도 많이 다쳤대요. 그나마 천만다행이랄까, 척추는 이상이 없었는데 하행대동맥이 터져서, 수술하는 과정에서 혈전이 척수동맥으로 흘러들어가 경색이 일어난 게 아닌가, 병원에서는 그렇게 원인을 판단하더라고요. 살아나긴 했지만, 병원 입장에서도 손을 써야 할 부분이 워낙 많았던 심한 환자였던 건 분명했던 것 같아요.”

재활의 얘기가 나올 수준까지 정리가 돼야 했던 1년여 동안, 그는 절반 정도의 기간이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전신마취의 대수술을 두 차례나 했던 초기의 기억은 아예 없고, 중환자실에 있던 기간도 중간마다 짧게 떠오르는 건 있어도 의식에 또렷이 남아 있는 흔적들은 별로 없단다.

“제가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일을 하던 사회복지사였으니까 척수손상이 어떤 건지, 어떤 상황의 생활을 해야 하는 건지를 지식과 활동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잖아요. 여러 과를 전전하며 치료를 받다가 최종적으로 재활의학과에 갔을 때, 많이 익숙한 얼굴이 된 주치의한테 제 병명이 정확하게 뭐냐고 물었죠.

‘황상윤 님은 척수손상입니다.’ 그때 제가 곧장 되물었던 게 ‘그러면 이젠 못 걷겠네요?’였어요. 너무 덤덤하게 물었던 걸까요? 깜짝 놀라던 당시 주치의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뒤늦게 진심의 인사를 전합니다.

황상윤 씨는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른 이들과는 많이 달랐다고 했다. 보통 말하는 ‘4단계’처럼 몇몇 단계를 거치며 좌절과 절망의 긴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데, 그의 경우는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그의 아내 역시 10년차 경력의 사회복지사였다는 것, 일부러 매몰차게 자신을 대했던 아내 때문에 확실하게 제정신을 차리게 됐다는 의미였다.

“과거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대로 영원히’가 결정된 중증장애를 입게 되고 나서 좌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때였어요. 대부분의 부부들은 그럴 때 같이 좌절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같이 붙잡고 울었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을 텐데, 제 아내는 저한테 아주 매몰차게 한마디를 던졌어요. ‘지금뭐하는 거예요? 당신이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재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어쩌고 했던 그 얘기들,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예요?’ 아…, 그런 한마디 한마디들이 제게는 엄청나게 큰 채찍이 됐던 거죠.”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내였을 텐데, ‘죽을 수도 있다’던 병원 측의 조심스러운 언급에 가장 많이 절망했던 게 그녀였을 텐데, 게다가 사고가 나기 바로 전에 부부가 가장 기뻐했던 게 둘째 아이를 갖게 됐다는 축복이었는데, 일순간 상황은 모든 게 ‘생존’ 하나로 집중돼야 할 절체절명의 현실로 뒤바뀐 것이다.

“집사람이 저보다 삶에 대한, 생활에 대한 의지가 훨씬 더 강했던 것 같아요. 큰아이를 본가 부모님께 맡기고, 제가 중환자로 지내는 동안 태어난 둘째 갓난아기도 처가인 강원도 영월에 맡기면서, 그렇게 모두가 이산가족이 돼 버린 상태에서, 제가 저의 상황과 현실에서 느끼고 다짐해야 했던 건 하나밖에 없었어요. 난데없이 닥쳐온 장애 때문에 아예 살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우리 가족이 한데 모여 어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그 생각이 절대적이었거든요. 그랬기에 장애로 인한 좌절보다는, 가족의 삶을 다시 복원해야겠다는 일념이 제 머리엔 절대목표가 됐던 것 같아요. 물론 모든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준 아내의 힘이 가장 컸죠. 그건 영원히 부인할 수 없는 감사함이 됩니다.”

 

나도 역시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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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흔의 나이가 된 77년생 뱀띠의 남자, 두 아이의 아빠, 한 여인의 남편, 고향 그 자리에 지금껏 살고 있는 대구 토박이, 그래서 아빠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두 아이가 다니게 됐고 대를 이은 동문이 된 인연,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시던 아버지 영향으로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가톨릭 신부가 되겠다고 신학교로 진학했던 젊은 시절, 반복되던 개인적인 회의 때문에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수능을 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된 모든 과정의 언급은 다른 공간이 필요할 것 같다. 상세하게 정리를 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 지면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장애를 입고 재활을 거친 뒤 사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사회생활을 재개하려는 준비를 정말 많이 했었죠. 그런데 모든 게 장벽이었어요. 단적인 예로, 지역 인근의 한 곳에 새로 문을 연 시설에서 사회재활교사를 찾고 있다는 공고가 났어요. 저는 그 시설 측에서 개인적으로 제안을 받았어요. ‘네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선발심사를 한다 했던 다섯 분 중에서 네 분이 제가 기존에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었거든요. ‘그래, 이 정도 환경이면 내가 일할 공간은 여기인 것 같아.’ 저는 그렇게 나름 확신을 하며 도전을 했죠.”

기존에 장애인복지 활동 경력도 확실하고, 해당 분야에서 시설까지 운영한 시설장의 경험까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회재활교사를 뽑겠다는 5인의 심사위원 중 4인이 오래 전부터 진지하게 인연을 맺어왔던 이들이라면, 이런 선발 환경 이상 좋은 조건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면접장에서 첫 질문을 던진 이는 가장 가까웠던 ‘1인’이란다. 그리고 그 질문의 내용은 이랬다고 한다.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그 첫 질문을 듣자마자 ‘여기선 못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어요. ‘이게 현실이구나.’ 하는 이 땅의 실체와 마주치게 된 거죠.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가지는 장애에 대한 편견, 그 민낯이 뭔지를 저는 뼈저리게 깨닫게 됐습니다.”

그 좋은 조건에서도 통과를 못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떤 이들이 그 업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선발이 될까? 자격조건은 한 가지뿐이다. ‘비장애 우선’이라는 것! 이 땅의 사회복지와 장애인복지가 장애인을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 객체화시키며 바라본다는 현실의 확인, 그건 황상윤 씨한테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단다. 그래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봤다고 한다. ‘그럼 나는 사회복지를 어떻게 했었지?’ 답을 얻는 데는 별다른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단다. ‘나도 역시 똑같았다!’가 피할 수 없는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보인다

“비장애 시절엔 저도 그랬던 게 맞아요.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보이는 것 위주, 실적 위주의 사업에 집중했던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비장애 아닌 장애당사자의 시선으로 직시하니까, 비장애 시절엔 보이지 않던 나머지 절반의 진실까지 바라보게 된 거예요. 긴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반성을 반복하며 지내야 했어요. 제겐 아주 중요한 관점의 전환이 됐던 겁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황상윤 씨의 취업 도전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단다. 편견이라는 게 이 정도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걸 매번 몸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는 거, 막상 취업을 해도 직책과 동떨어진 업무의 연속, 이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의 부조리함이 분명했다. 나름의 고민과 회의가 깊어지던 2014년 연말, 그는 별다른 기대 없이 사회복지 취업안내를 살펴보다가 눈에 띄는 한 구절을 발견했단다. 어느 센터의 소장을 뽑는다고 하는데, 지원자격에 이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등록 장애인.’

“다시 현장에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있던 때라 별 기대도 없이 이력서를 냈는데, 며칠 뒤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어요. 면접을 보고 이틀 후에 ‘출근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듣게 된 거예요. 많이 놀랐죠. 고민과 회의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는데, 단 일주일 만에 저를 둘러싼 환경이 완전히 뒤바뀐 거니까요.”

소장으로 취임하고 한참 지난 뒤, 그는 면접을 담당했던 이들한테서 이런 후일담을 듣게 됐다고 한다. 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이기 때문에 발달장애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있는 분이 와야 했는데, 그런 인물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날아든 하나의 이력서 안에 뜻밖의 해답이 담겨 있었다는 것. 바로 황상윤 씨가 오랜 기간 활동했던 모든 경력들이, 센터에서 찾고 있던 최고의 적임자라는 확신을 얻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센터에 와서 처음엔 상당히 힘들었어요. 인간적으로 힘들었던 게 아니라, 사업하는 방식이 기존의 센터들과는 완전히 달랐거든요. 그런데 장애당사자의 시선으로 인식의 전환을 일궈냈던 저의 방식과는 완전히 일치했어요. 비장애 중심의 센터가 아니라, 철저하게 발달장애인 당사자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라는 거죠. 제가 힘들었다는 건 저의 오랜 타성을 이 센터의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이었어요. 비장애 당시의 타성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저 스스로 체험하게 됐던 거죠.”

그의 설명을 그대로 풀어본다면 이렇다. 장애인 관련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복지관이나 시설, 센터 등의 업무는 비장애인 직원들 중심으로 진행된다. 캠프 하나를 가더라도 직원들이 기획하고 알아본 뒤, 프로그램을 다 마련하고 마지막에 발표를 한다. ‘당신들은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의 센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 중심으로 모든 게 진행된단다. 이런 걸 할 건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 뭘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가면 좋을지, 며칠 동안 하는 게 나은지, 이 모든 걸 당사자들의 의견으로 종합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본다면 굉장히 비효율적이죠. 시간이 엄청 걸리고, 주제와 벗어난 별의별 생각들이 다 나오고, 비장애 입장에서는 툭툭 치고 넘어갈 일도 여기선 정말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 과정들이 결국에는 발달장애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는 이들의 역량이 커지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죠. 그래서 저희 센터는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비발달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면 전부 비발달장애인입니다. 저도 여기선 지체장애 1급이 아니라 비발달장애인인 거죠.”

황상윤 소장은 대화의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장애계가 발달장애인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발달장애인 당사자 중심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 인식의 틀을 깨야 하고, 그 틀을 깨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에게 직접 기회를 줘야 한다는 점이란다.

“자꾸만 치료 중심으로 가면, 더 나아져야 한다는 맹목적인 함정에 빠집니다. 기회를 주고 시도를 반복하면, 당사자들은 어떻게든 변합니다. 좋게 발전하든 뒤로 퇴보를 하든, 본질적으로 사람은 어떻게든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눈에 보이는 차이가 느껴지든 안 느껴지든, 안 느껴진다고 안 변했다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직접 경험하고 움직이는 만큼 변하고 바뀝니다. 당사자들의 시선과 마음으로 업무를 진행해 보세요. 답은 거기에 있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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