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의 인생 같다면, 바로 그걸 선택하세요 > 사람 사는 이야기


그것이 나의 인생 같다면, 바로 그걸 선택하세요

상상행동 장애와여성 마실 대표 김광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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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쉽게 마주치고 가볍게 스쳐가는 일상에 익숙해진 까닭일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진정 소중한 ‘무엇’에 대한 절실함을 까맣게 잊은 채 지내곤 한다. 그 ‘무엇’은 사람일 수도 있고 추억일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일 때도 있겠고, 특정한 사물이나 혼자만의 기억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헤아리는 손놀림 속에서도, 끝까지 ‘툭’ 튀어나오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스스로를 잊고 지낸다는 것, 그건 무심과 무책임함으로만 자책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길들이고 있고, 그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나날에 우리가 이미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만남에선 ‘오래 전 나’를 되살리고 기억해내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졌다. 조용한 혼자만의 공간에서 차 한 잔과 함께 창밖을 아득히 내다보는 심정으로 말이다. 장애인권의 험난한 여정에서 친구 같고 누나 같은, 언니 같고 속 깊은 선배 같은 인상을 전하는 ‘누군가’를 만났다. 상상행동 장애와여성 마실의 김광이 대표가 우리에게 마음의 차 한 잔을 건넨다. 함께 기억을 되찾아보자고 권하면서 말이다.

 

기억나는 건 우울함뿐이었던 시절

“‘공덕동 굴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표현 들어보셨죠? 정말 가난하고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애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을 물으면 어른들이 꼭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정말로 서울의 마포 공덕동 그 지역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는 굴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그 말이 아주 익숙하거든요.” 어릴 때의 기억이라곤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의 모습뿐이라던 김광이 대표는 ‘굴다리 밑’을 언급하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씩 질문이 놓아질 때마다, ‘아, 그건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아, 그걸 기억도 하지 않고 살아왔네’를 연발했다. 대답하는 한 문장 한 문장 사이에는 말줄임표와 쉼표가 연이어 채워졌다. 정말로 너무나 많은 걸 잊고 지냈다는 스스로의 회한이 가득 묻어났던 것이다.

생후 10개월 때, 무엇이든 붙잡고 일어서려던 아기가 갑자기 고열과 함께 전신이 축 늘어졌단다. 의사는 감기인 줄 알고 고열을 내리는 주사부터 맞게 했는데, 그 ‘주사 한 방’이 아기 몸 안에 소아마비를 완전히 정착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에겐 ‘걸음’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까? 아니란다. “휠체어만 타기 시작한 건 한 7,8년 됐어요. 그 전까지는 양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하고 목발 짚으며 걸었었죠. 제 오랜 친구들과 동료들은 항상 저의 목발을 먼저 떠올리곤 했으니까요. 다만 보조기는 허리까지 연결해야 했기에, 일반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죠. 지금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전동휠체어가 편하고, 팔의 힘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수동휠체어도 자주사용해요. 보조기는 이젠 힘들어서 떠나보냈죠.” 그는 일반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당시 병원 중심이었던 삼육재활원에서 세 차례의 수술을 받고 보조기로 걷는 연습을 한 뒤 외부의 중학교를 다니게 됐단다. 가정이라는 연고가 있으면 재활원 기숙사에 있기 어려웠는데, 워낙 가난한 집안이라서 연고 없는 고아 중심이었던 기숙사 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로는 극히 드물게 전국경시대회 같은 데 나가서 입상을 하는 그의 모습과 능력을 안타까워한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그는 삼육재활원 기숙사와 외부의 중학교를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됐단다. 그에게 ‘어떤 독지가’가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 시절은 완전한 우울, 모든 게 우울한 사춘기였어요. 연고가 없는 애들과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집은 있다지만 편찮으신 할아버지부터 모든 식구가 방 하나에 살아야 했던 환경이라서 제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죠.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거, 그 민감한 시기에 집과 기숙사 모든 곳에서 엄청난 소외감을 느껴야 했어요. 아무데도 속하지 못한 채로, 고독감 하나에 휩싸여 지내야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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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꿔놓은 단 한마디 화두

“왜 그랬는지, 거기까진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저 혼자서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학교 친구들은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했고, 마당의 끝 잔디밭에 가서 아무한테도 안 보이는 자리에 숨어 해가 질 때까지 혼자만의 사념에 빠져 지내곤 했으니까요. 당시 제겐 정말 절실했던 바람이 한 가지 있었어요. 저의 정신적인 부분을 붙잡고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선배나 스승이 있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너무나 절실했죠. 언제든 찾아가 상담할 수 있고, 저한테 ‘세상은 이런 곳’이라는 얘기를 해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너무도 간절했거든요.”

중학교를 마치고 재활원 안에 있던 직업기술학교에서 1년 동안 양장기술을 배운 그는, 18살 나이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의 모든 이력이 단편적으로 끊어지는 사회생활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겐 어떻게든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단다. 전태일 평전에나 기술돼 있을 법한 그런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을 전전하며 여러 일을 계속했다는 김광이 대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 한마디를 반복했다. “아…, 이건 진짜 오래된 기억들이네.”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에 숨 가빴다 했는데, 그렇다면 그가 현재와 같은 장애인권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1995년일 거예요. 장애를 가진 친구들 통해 간간이 듣곤 했지만, 제가 장애운동을 한다는 생각은 아예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죠. 인권운동 의식 같은 게 전혀 없었거든요. 왜냐, 제게 급했던 건 어떻게든 안정된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얘기로만 전해 듣는 수준이었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한일(韓日)장애인교류대회’라는 걸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한번 구경 간다는 심정으로 참가를 해봤죠. 정말 처음 경험하는 세상과 마주하게 됐는데, 그 중간에 한 여성활동가가 제게 다가와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혹시 장애여성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아, 지금도 그 감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데, ‘장애여성’이라고 딱 한 단어로 규정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표현이 제 머리 정수리에서 탁 터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장애인의 인권이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나 감성도 없던 당시, 그는 ‘정수리에서 탁 터졌다’는 그 충격에 이끌려 한 모임에 참여를 하게 됐단다.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장애여성인권운동의 발화점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김광이 대표가 장애운동의 첫발을 내딛었던 자리가 바로 그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타성을 깨버리는 경험이 연이어졌다고 한다. 장애당사자 아닌 비장애 입장이던 대학원생들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활동가들의 열정 가득한 활동이 너무나 신선하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장애여성 당사자들이 뭔가를 얘기하면, 여성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들이 저희가 생각도 못했던 해석들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덧붙여 설명하는 거예요. 그건 정말로 신선한 자극이자 충격이었어요. 제가 알고 있던 의식이 하나씩 하나씩 깨지는 실감이 들었거든요. 게다가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활동가들의 모습은 진정한 감동이었어요. 비장애 여성인 활동가들이 장애인권을 위해 저렇게 밤늦게까지 고민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면서도, 일상 자체는 언제나 생기발랄한 모습이었거든요. 제 심정은 이런 질문 하나였죠. ‘어, 이건 뭐지? 내가 여태까지 부러워했던 재기발랄함은 항상 장애인과 상관없는 다른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장애인의 문제를 가지고, 게다가 비장애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저 발랄함은 도대체 무슨 소명의식이라는 걸까?’”

 

세상의 틀은 우리 스스로가 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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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파이어 같은 불은 얼마든지 크게 만들 수 있지만, 실제 중요한 건 타오르는 불꽃의 크기가 아니라 밑바닥에 품고 있어야 할 불씨의 양이다. 언제든 재점화가 가능한 밑불이 있어야만 다시 살아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광이 대표의 인생에 밑불을 놓는 계기는 꼭 필요했던 시점에 찾아든 것 같다. 그것이 운명이든 아니든, 찾아든 기회를 스스로의 삶으로 만든 건 그의 선택이 분명했다는 의미가 된다.

“1997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장애여성 리더십포럼’이라는 게 열려요. 당시 국회의원이셨던 이성재 의원의 보증으로 비자를 받아, 십여 명의 활동가들이 같이 가게 됐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장애여성들이 왔는데 아, 가슴에서 막 뜨거운 게 올라오는 거예요. 옷차림도 다르고 얼굴색도 다르고 장애유형도 다 다르고, 정말 휠체어에 못 앉을 만큼 뚱뚱한 사람도 있고 너무 마른 사람도 있는데, 장애여성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과 감각과 의식들을 거기서 넘치도록 만나게 됐던 거예요. 팔이 절단된 장애여성이 앞장서서 춤을 추며 이끌어가고, 우리에겐 민망한 부분일지 모르지만 성(性)보조기구들도 자연스럽게 전시되며 공개되는, 장애인들이 현실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은지의 실질적인 자료 같은 게 전부 다 공개되다 보니, 무엇이 열린 공간이고 그동안 무엇이 닫힌 인생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됐다는 거죠.”

김광이 대표는 자신의 내면 안에 들끓고 있었던 하나의 화두를 끄집어냈다고 한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싶었던 욕망을 실현시키겠다는 것! 그는 36살의 나이에 서울의 한 대학교 법학과 98학번으로 입학을 하고, 졸업과 동시에 당시 추진이 준비되고 있던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참하게 됐다고 한다. 연이어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도 중요한 역할로 참가하게 됐다고 하니, 이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준비된 인물에 대한 세상의 대답임이 분명한 일이다. “그때 저의 결정은 ‘내가 인권운동을 할 게 아니라면, 이런 공부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굳혔던 것 같아요. 아주 명확했어요. ‘인권운동을 하기 위해서, 나 자신의 충족을 위해 공부를 한다. 그리고 졸업하면 장애인권운동, 나의 제2의 인생은 거기서 시작된다.’는 다짐이 확실하게 세워졌거든요.”

현재 장애여성의 권익과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상상행동 장애와여성 마실의 대표인 그는 자신의 단체를 어떻게 평가하며 그 정체성을 규정할까? 조직 중심, 상근자 중심이 아닌, 장애여성의 운동을 네트워크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정체성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성되고 또 발현될 수 있는데, 조직의 정체성을 개인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려 하는 일체의 시도를 지양(거부)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실 소속이면서도 다른 단체의 활동이 충분히 가능하고, 다른 단체 소속이라 해도 마실과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는 점에선 그의 인생 전체의 결론이 맺어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작년부터 5,60대 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 책읽기 모임을 매주 진행하고 있어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발제를 해가지고 와서 서로 토론하는 방식이 아니라, 책을 읽고 거기서 떠오르는 느낌들을 말하는 방식으로 편하게 진행하고 있는데, 출석률이 너무 좋은 거예요. 세상의 틀을 우리 스스로가 깨는 거죠. 장애여성, 비장애여성, 그 양분법에 끼지 못했던 비혼여성과 소외된 여성들이 갖는 모든 의견들을 편하게 나누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남성중심의 세상을 깨는 움직임이 되지 않을까요? 가부장제 중심의 세상에선 비정상적으로 인식됐던 모든 여성의 문화와 삶을, 이젠 우리 여성들끼리의 대화로 나눠보자는 거예요. 마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 중에서 혹시 동참의 뜻을 느낀 분들이 계실까요? 그 소중한뜻이 있는 분이라면 마실은 언제든지 환영할 거예요. 항상 반기겠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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