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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학회: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

미셸 푸코가 분석한 광기의 역사를 중심으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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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를 생각해 보라.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 정신장애는 숨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장애인도 격리와 수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상(normal)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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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이 질문에 대해 평생 고민하며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미셸 푸코(M. Foucault)입니다. 푸코는 우리가 흔히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는 ‘광기(狂氣)’라고 하는 것에 대해 시대적 고찰을 실시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말장난’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푸코가 세대에 따라 정신장애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겠습니다.

 

장애인과 빈민에 대한 수용(대감호)의 시작

근대적 의미의 사회복지 시작을 1601년 구빈민법(Elizabeth Poor Law)이 제정된 때로 봅니다. 이는 푸코가 이야기 하는, ‘대감호(大監護)의 시대’가 시작된 시기와 일치합니다. 구빈민법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복지를 위해 설립되었다고 이야기 되는 구빈원과 같은 시설이, 사실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푸코는 이야기합니다.

 

(구빈원의) 원장들은 처형용 기둥, 수감용 쇠고리, 유치장과 지하 감방을 구빈원의 부속시설 안에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갖추어놓을 수 있다. 구빈원 내부를 대상으로, 그들에 의해 내려진 명령에 대해서는 항소(抗訴)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빈민들이 과실을 저질렀을 때는 식사 제한, 노동량 추가, 감금 등의 형벌이 원장의 판단에 따라 가해진다. (푸코, 2003)

 

구빈민법 이후 제정된 신빈민법도 성격은 유사합니다. 신빈민법에는 구제 대상을 ‘구제 받을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이중 잣대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구제 받을만한 사람’은 어느 정도 구제를 했을 때 사회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을, 즉 노동자가 될 수 있을 사람들이었던 반면, ‘구제를 받을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장애인, 노인, 일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 등으로, ‘구빈원’에 ‘수용’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으며, ‘사회에 불필요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됐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왜 17세기부터 대감호가 시작되었는가?’ 푸코는 이에 대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부터 서서히 등장한 ‘합리주의’와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제시합니다.

 

합리주의: 광기를 비정상, 동물성으로 규정짓다

먼저, 합리주의의 영향을 보겠습니다. 유럽에서 ‘이성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성은 비(非)이성을 철저히 적대합니다. 이성은 ‘진리의 소유자’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면서, 이제 광기를 그야말로 ‘비이성’ 그 자체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성은 계몽주의로 표현이 되는데, 편협한 계몽주의자들은 광인에 대해 그 이전의 어떤 지배자도 실행하지 못했던 조치, 즉 ‘감금’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게 됩니다(홍윤기, 1997).

푸코의 주장에 의하면, 고전시대에는 광기와 정상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광기는 그저 이성을 넘어선 영역으로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만을 중시하는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광기는 비정상, 동물성으로 설정되어 감금당하고, 나중에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대중으로부터 소외됩니다. 푸코는 광기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이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광기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기는 환한 대낮에 논의되었다. <리어왕>을 보라. <돈키호테>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반세기도 안 되어 광기는 갇히고 고립되었으며, 수용의 요새에서 이성에, 도덕규범에, 도덕규범의 획일적 어둠에 묻혀버렸다 (푸코, 2003)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 노동에 대한 통제

대감호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요인인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막스 베버(M. Weber)에 의하면, 칼빈주의(Calvinism)는 자본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금욕적인 가르침에 따라 이윤추구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금욕사상이 칼빈의 직업윤리에 의해 합리화되었음을 관찰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직업은 소명이기에 성도들은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무위도식은 죄다” 이러한 주장을 따르게 되면, 노동은 매우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며, 자본의 축적에 대해 죄악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노동과 이윤추구를 신성시하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등장이 대감호와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요?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에 의하면,) 무위도식은 반항이다. 왜냐하면 무위도식은 자연이 태초의 무고한 상태처럼 비옥하기를 기대하고, 아담 이래 인간이 요구할 수 없는(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해주는) 호의를 하나남에게 강요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푸코, 2003)

 

이렇듯 ‘노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배경에는 산업화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로 인해, 공장 중심의 임금노동, 통제노동이 등장하였고, 원활한 노동력 공급과 임금의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노동력의 확보가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빈원은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억압을 가하고, 그들에게 노동윤리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친(親)부르주아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치료의 시작: 퀘이커교도들이 광인과 비광인 사이에 다리를 놓다

대감호의 시대에 정신장애인은 ‘이성이 없는 인간’으로 인식되며, 시설에 수용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정신장애인들이 머물러 있던 지하감방에 빛이 들게 됩니다. 이는 인도주의적 철학을 바탕으로, 정신장애인들을 케어하는 시설이 설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설 중 대표적인 것이 퀘이커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시설입니다. 정신장애인들의 치유를 위한, 이 새로운 시설에 대해 소개한 편지의 일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퀘이커 교도회는 ... 그들(정신장애인)의 처지를 감안하여 의료기술의 모든 방편과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보장하고자, 자발적 기부를 통해 기금을 마련했고 ... 이 시설은 요크(York)에서 1마일 떨어진 어느 비옥하고 아름다운 시골에 있는데,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시골의 커다란 농가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고, 울타리가 처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철책도 창문의 철망도 없습니다.’ (푸코, 2003 재인용)

 

이 편지가 쓰여진 때는 1798년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매우 선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설이 세워지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18세기 후반 영국은, 구제(救濟)의 영역에서 민간의 주도권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러 민간단체들은 구제를 위한 기금을 모았고, 퀘이커 교도회 역시, 그런 민간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퀘이커 교도들이 정신장애인의 구제에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퀘이커 교도들은 애초부터 수용시설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퀘이커교의 창립자인 조지 폭스(G. Fox)를 포함하여, 다수의 퀘이커 교도들은 신성모독 등의 죄목으로 구빈원, 교도소 등에 감금되곤 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 종교적 경험과 비이성에 관한 커다란 논쟁에 휘말렸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 이성과 광기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놓여 있었다고 본 것 같다. ... 퀘이커 교도들이 수용시설에서 광인치료에 기울인 관심은 이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푸코, 2003)

 

푸코의 설명에 의하면, 지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신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퀘이커교 등의 경건주의자들은 이제 광인과 비광인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인간은 본래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진 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세계’에서 광인들은 소외 당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정신장애인들에게 손을 내밀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게 했습니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해 보면, 계몽주의 시대 정신장애인의 인권이 하락하는 경우(대감호)와 상승하는 경우(윤리적 치료)가 있었는데, 이것은 장애인의 ‘장애’ 그 자체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장애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한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강력한 ‘환경’인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는 악이 아니지만, 완벽한 제도도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경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진정한 생산성과 경제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하는 장애학의 작업은 계속돼야 할 것입니다.

작성자정지웅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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