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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재현의 한계와 가능성

이문열의 「익명의 섬」(1982)과 임권택의 <안개마을>(1983)을 중심으로

본문

필자는 유학시절 이문열의 단편소설 「익명의 섬」(1982)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의 <안개마을>(1983)을 지인들과 감상한 적이 있다. <안개마을>은 어느 시골 집성촌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부임한 여교사(정윤희 분)가 깨철(안성기 분)이라는 부랑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마을 사람들의 허위와 부조리를 알아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나와 지인들 모두 영화의 과감하고 강렬한 소재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즉석토론을 하게 되었다. 토론에서 성적욕망/억압, 전통/현대, 분단과 군사독재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이야기 되었다. 토론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대개 영화 속 강간장면 등 성차별적 요소들에 관심을 두며 영화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반면 남성들은 영화 외적인 요소들에 중점을 두고 전통과 현대적 가치관의 충돌, 분단과 군사독재의 알레고리 등 시대적 맥락 속에서 영화를 이해하고 수용했다. 이처럼 성별에 따라 다른 해석과 접근방식 덕택에 때때로 긴장되고 격앙된 분위기도 연출되었다. 특히, 성별간의 이견은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깨철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를 폭력적인 여성혐오자로 규정했다. 남성들은 깨철 캐릭터가 혐오스럽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일부는 그를 신비롭고 남성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은근히 공감하고 있었다.

비록 이유는 달랐지만 나도 <안개마을>을 보는 내내 깨철을 비롯한 장애 인물들에게 눈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장애인이고 장애학을 연구하는 학자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에서 장애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이른바 ‘성대결 토론’이 어느 정도 수그러졌을 때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하지만 다소 예상하지 못한 반응들로 인해 적잖게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 깨철이가 장애인이었어?” “옛날 영화에는 그런 캐릭터(장애인)가 한 둘씩 꼭 나오잖아요” “죄송하지만, 장애는 이 영화와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네가 그쪽이니(장애인 당사자와 장애학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등 의아한 표정을 짓는 비장애 토론자들의 조심스러운 답변들이 이어졌고 잠시 동안 어색한 정적까지 흘렀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단숨에 정리한 것은 한 여성 토론자였는데, 그녀는 영화 속에서 남편과 정을 통한 “술집작부”를 살해한 동만댁을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칭찬했다. 그녀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새 성적 불평등에 관한 ‘성대결 토론’으로 재점화 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비장애인도 “진정한 페미니스트”에게 죽임을 당한 “술집작부”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토론자들의 <안개마을>에 등장하는 장애와 장애인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집단적 망각과 무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어떠한 점을 시사 하는가? 구체적으로 왜 토론자들은 영화 속에서 장애와 장애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왜 존재를 인지했던 소수도 장애인들의 등장을 단순히 관례화된 영화적 관습 정도로 이해했을까? 이 영화에서는 지적, 청각·언어, 정신질환을 가진(또는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스토리 전개를 이끄는 비중 있는 주·조연 역할을 한다. 또한 왜 토론자들은 장애를 영화 분석의 중요한 틀로써 여기지 않았을까? 토론자들이 젠더(gender), 섹슈얼리티, 분단과 군사독재 상황 등의 다양하고 개방적인 관점과 방법으로 영화를 접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장애 배제’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왜 토론자들은 장애에 기댄 또는 집중한 영화 분석을 장애인이나 장애 관련 학자들만이 하는 것으로 단정지었을까? 장애라는 현상과 장애가 만드는 쟁점들이 과연 그들(비장애인)과는 그렇게 거리가 먼 또는 무관한 것일까? 영화 내·외적으로 장애와 장애인의 가시성과 유의성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토론자들 조차 그들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사고, 질병, 노령 등으로 장애를 경험할 수 있는 “예비장애인”(the temporarily able-bodied)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토론자들의 장애에 대한 거리감과 무관심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 나는 장애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장애의 전경화’를 통해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을 비평적으로 문제화하고자 한다. 효과적인 전경화를 위해 장애학 관련 이론들이 분석에 사용될 것이다. 본고는 해당 소설과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비교·대조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비록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영화가 원작소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나는 소설과 영화의 중첩된 텍스트성에 주목하고 소설과 영화를 넘나들며 장애 인물들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해당 소설과 영화를 비판 또는 찬사하는 데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장애를 통해 소설과 영화가 양산하는 쟁점들을 재조명하여 독자와 관객들에게 비평적 시각과 토론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주력할 것이다.

 

줄거리

교육대학교를 갓 졸업한 여 주인공 '나'(한수옥)는 혈족으로 이루어진 두메산골 집성촌에 소재한 초등학교에 부임한 첫 날,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성 깨철과 마주친다. 깨철은 타지에서 이 마을로 흘러 들어온 떠돌이 부랑자다. 마을 사람들은 깨철을 무시와 경멸로 대하고 언어적, 신체적 폭력까지 일삼지만, 동시에 그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등 온정적인 입장도 취한다. 한수옥은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음식과 잠자리를 해결하는 깨철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양가적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들을 주의깊게 관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깨철과 다수의 마을 유부녀들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수옥은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친구와 열애를 하면서, 깨철의 존재와 마을 사람들의 이중성을 한동안 잊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부임지를 방문하기로 한 남자친구가 약속을 어기고, 수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렸던 한수옥은 상심한 채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때마침 소나기가 몰아치고. 그녀는 길가에 있던 헛간으로 잠시 몸을 피하나 그곳에 숨어 있던 깨철에게 성적으로 공격을 당한다. 그녀는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항거불능, 성적욕망, 남자친구에 대한 원망, 허탈감을 동반한 복합적인 이유로 결국 그에게 몸을 맡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수옥은 깨철이 여성의 심리 및 요구와 마을 전체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도 하는 상당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와 더불어, 한수옥은 깨철과 마을 유부녀들의 은밀한 만남의 근본적인 원인도 알게 된다. 즉 혈연으로 맺어진 집성촌의 폐쇄성에 의해 성적으로 억눌린 마을 여성들의 욕구해소를 위해 깨철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으며, 마을 유부남들 역시 체면유지와 여성들의 자신들을 향한 성적불만을 무마·통제하기 위해 깨철과 자신들의 아내와의 성적 일탈을 모른 체 해왔다는 것이다. 전보 발령을 받아 마을을 떠나는 날, 한수옥은 버스 정류소에서 깨철과 후임 여교사와 동시에 마주친다. 하지만 한수옥은 후임에게 깨철의 정체와 마을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 후임 여교사도 자신처럼 깨철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깨철, 공모자형 장애남성

깨철은 정체불명의 남성이다. 소설과 영화의 어느 구절과 장면에서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 마을에 온 이유에 대한 단서나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깨철”이라는 이름도 그의 본명인지 알 수 조차 없다. 깨철은 남루한 행색과 어눌한 말투와 행동거지, 이와 상반되는 강렬한 인상과 눈빛을 동시에 소유한다. 즉 그는 그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신비화된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의 이중적인 캐릭터는 일제강점기 시절 신분을 위장했던 독립 운동가들이나 1970,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광산과 공장 등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 했던 민주화 인사와 학생운동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깨철과 위의 인물들을 단순하게 동일시하기에는 상당한 무리와 위험이 따른다. 깨철은 마을을 지배하는 권력과 결탁·공조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일정부분 권력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깨철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나는 장애학적 관점을 사용하여 그의 장애와 그가 장애화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장애학은 장애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손상에서 기인된다고 이해하는 의료적 모델 보다는 장애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다름을 지원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관심과 무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사회적 모델을 근간으로 한다. 즉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나 시각장애 보행 블록이 없는 도로 등의 물리적 환경과 장애인을 편견과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태도에 의해 장애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최근 장애학에서는 장애의 생물학적 개념(정신적, 신체적 손상)과 사회적 개념(비장애 중심적 태도, 제도 및 환경)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총체적’ 접근을 하지만, 장애학은 여전히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과 그 결과물인 비장애 중심체제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다.

깨철은 장애인인가? 그는 생물학적 장애인이기 보다는 사회적 장애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의 미덕 중 하나는 깨철의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상세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마을 구성원들은 중년의 깨철에게 반말과 하대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병신” “천치” “미치광이” “반푼이” 등 장애 비하적 표찰(label)들을 사용하여 깨철의 비행과 일탈성을 극대화하고 낙인 찍으며 공동체 사회에서 소외시킨다. 일련의 표찰들에 의해 깨철에게 부정적인 이미지와 의미가 부여되고, 그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공동체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상성에 의해 지배받는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지적 능력과 생계 부양 능력이 없는 자로 치부하거나 마을 남성들이 깨철을 성불구자로 굳게 믿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마을 남성들이 인지하는 여성들의 성적 능력과 욕망과 그것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는 깨철에게 투영되어 있으며 남성들의 본질적인 취약성으로부터 기인되는 심리적, 물질적 문제들은 깨철을 성불구자인 “고자”로 규정함으로써 봉합된다. 역설적이지만 깨철의 비정상성은 마을 사람들의 지적 및 성적능력 등의 정상성을 확인 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저지르는 허위와 부조리를 은폐함으로써 그들이 권력체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일조한다.

깨철은 사회적 약자인가? 깨철을 마을 공동체가 참여하는 장애화 과정에서 낙인과 소외를 당하는 피해자로서 봐야 할까? 물론 그가 장애화 과정에서 무시와 냉대를 포함한 여러 차별을 경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피해자로서만 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깨철은 장애의 스테레오타입화 된 이미지와 관념들을 철저히 이용하여 그의 폭력적 남성성을 효과적으로 숨기고 권력을 행사한다. 소설과 영화에서 깨철은 생물학적 장애인(지적장애)으로 신분을 위장한다. 실생활에서 일부 장애인들은—특히, 경도 장애인—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장애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비장애인과 동일시 한다. 시버스(Siebers)(2008)는 이런 현상을 “패싱”(passing)이라고 부르고, 그 원인을 정상성(비장애성)이 제공하는 안정과 혜택으로 보았다. 일부 장애인들이 취업과 혼인 시에 그들의 장애를 밝히는 것을 꺼린다는 것은 패싱 현상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깨철은 오히려 자신의 비장애성을 부정하고 장애인으로 “역패싱”을 감행한다. 그는 장애에 수반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관념(동정, 연민, 무능력 등)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의식주 해결과 폭력행사를 비롯한 그의 모든 일상에 철저하게 적용한다.

애트킨슨(Atkinson)과 캘러펠(Callafell)(2009)은 다수의 미국 문학과 영화가 남성 주인공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서사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학과 영화서사가 폭력을 저지른 남성 주인공의 과거의 순수함과 폭력을 행사할 때의 부득이한 내·외부적 상황들—예를 들어, 일시적인 정신적 공황, 불행한 가족사, 시대적 불가피성 등—을 부각함으로써 남성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때문에 독자와 관객이 폭력자체의 심각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충완(Woo)(2012)은 한국 영화 <오아시스>(2002)와 <말아톤>(2005)에서 유사한 서사전략이 사용되어 발달장애를 가진 남성 주인공들의 여성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의 심각성을 경감시킨다고 비판한다. 즉 해당영화들이 발달장애인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미지와 관념들—예를 들어, 발달 장애인의 순수함과 지적 및 판단능력 부재를 과다하게 강조—을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남성주인공들의 젠더화된 폭력성에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에서도 유사한 서사전략이 적용되어 지적장애로 위장한 깨철의 젠더화된 폭력을 정당화시킨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깨철은 정신적 손상에 의한 생물학적 장애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등장하는 강간장면은 깨철의 “역패싱” 위장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남성 중심과 비장애 중심의 권력과 공모한다는 것도 시사한다. 강간장면에서 깨철은 평소의 어눌한 말투와 행동거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냉정하고 폭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감성적인 비장애 남성으로 변신한다. 그는 용의주도 하게 계획을 꾸미고 여성의 심리와 요구를 꿰뚫는 논리적 언어구사와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으로 여교사 한수옥을 범한다. 강간사건 이후 깨철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예전의 지적 장애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강간이 외부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하던 한수옥은 안심하고, 깨철이 장애인 행세를 계속 하고 외부인에게 들키지 않는 한 그들만의 비밀은 지켜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마을 전체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속성을 이해하고 공감마저 하게 된다.

깨철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 행사를 통해 남성 중심주의와 비장애 중심주의적 행위를 모방·실천하지만 다수·권력자, 즉 마을 남성들의 본질적인 특성을 변화하는 등의 위협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그의 마을에서의 ‘특수한’ 입지는 승인을 받는다. 즉 그는 남성 중심과 비장애 중심으로 대표되는 마을의 정상성과 그 허위와 부조리를 숨겨주고 정상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이른바 “서술보정장치”(narrative prosthesis)(Mitchell & Snyder, 2001)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대가로 그는 의식주와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의 권리와 혜택을 보장 받는다. 하지만 그의 ‘특수한’ 존재감과 위치는 그다지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점점 노쇠하여 비장애성과 남성성을 잃어가는 “예비장애인”이라는 사실은 공모자로서 권력에 순응하는 그의 미래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화천댁과 산월, 파멸된 장애여성

화천댁과 산월은 각각 후천적,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여성들이다.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에서 끝까지 생존·번영한 장애남성 깨철과는 달리, 그녀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세 명의 장애 인물들의 운명을 갈라놓는 요인은 무엇인가? 먼저, 화천댁은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다. 서사 초반부에서 그녀의 남편인 화천은 다수의 마을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깨철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 공개적인 폭력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인즉 화천댁과 깨철의 은밀한 정사가 그만 들켜서 온 마을에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을의 공공연한 비밀이 실체화되자 화천댁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다. 사건 직후 부터 남편과 마을 사람들의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180도 달라지고 그녀는 행실이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 찍힌다. 화천댁은 그녀 혼자만이 희생양이 되는 억울한 상황과 남녀 불평등에 기반한 성적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여 마을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자신이 경험하는 성적 불평등을 구체화하는 깨철의 존재를 제거하려고 하나 실패한다. 결국 그녀는 정신질환을 갖게 되고 서사에서 사라진다.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과 임무를 ‘공개적’으로 위반한 화천댁은 상징적인 처벌인 ‘정신질환’이라는 장애까지 입고 서사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파국을 맞는다.

산월은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영화가 만든 가공인물이다. 그녀는 청각·언어장애를 가지고 있고 마을 어귀에 위치한 선술집에서 기거하는 성노동자(sex worker)다. 타지 출신인 산월은 혈족으로 구성된 이 마을에서 남성들이 성적욕망을 분출하고 해소하는 이른바 ‘여자 깨철’ 역할을 맡는다. 산월은 깨철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마을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있다. 남성 중심적인 집성촌의 속성 상 남성들의 외도는 여성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정당성을 부여 받는 편이다. 게다가 산월의 청각·언어 장애는 마을 남성들의 밀회가 밖으로 새어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천혜의 자원이어서 그녀는 이상적인 외도상대자가 된다. 즉 깨철이 “역패싱” 한 것 처럼, 산월의 장애는 남성들의 허위와 부조리를 감춰주는 좋은 수단이 된다. 하지만 깨철과 달리, 산월의 ‘특수한’ 존재감과 입지는 항상 불안정하다. 또 다른 영화적 가공인물인 동만부부는 산월의 취약성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그녀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젊고 혈기왕성한 동만은 산월을 사이에 두고 삼촌뻘인 창규 아재와 연적 관계에 있다. 그들은 경쟁하듯 앞 다투어 그녀와 정사를 벌이다가 서로 주먹다짐까지 하는 소동을 일으킨다. 동만과 창규가 “술집 가시나 하나 때문에” 싸움을 벌였다는 소문은 금새 마을 밖 까지 퍼지고, 위기감을 느낀 문중은 두 사람의 집 밖 외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하지만 문중의 엄중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동만은 산월을 몰래 계속 만난다. 한편, 다수의 마을 여성들과는 달리 깨철과 성관계를 맺지 않았던 보수적 성향의 동만댁은 습관적인 남편의 불륜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동만이 문중의 경고마저 듣지 않자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마침내 복수를 감행 한다. 불륜현장을 급습한 동만댁은 남편의 성적욕망의 대상이자 그녀 자신의 성적 불평등을 각인시켜주는 산월의 존재를 칼로 찔러 제거한다.

왜 장애남성은 처벌을 피하고 살아남는 데 반해, 장애여성은 사망 등 불가역적인 처벌을 받을까? 소설과 영화가 재현하는 집성촌은 젠더에 기반한 서열화된 사회다. 무엇보다, 그곳은 남성들의 결속력이 놀라울 정도로 단단하다. 비장애와 장애남성은 협력을 통해 여성들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남성 중심적 체제를 굳건히 유지한다. 이처럼 서열화된 마을 공동체에서 남성들은 깨철의 일탈적 행위에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반대로, 그들은 (장애)여성들의 ‘비정상성’에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이를 테면, 마을의 (비장애) 남성들은 자신들의 아내들과 부정을 저지른 깨철을 눈감아 준다. 밀회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지라도 깨철은 폭행 이외에 어떠한 제재와 처벌도 받지 않는다. 마치 깨철을 마을에서 쫓아낼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어느 누구도 그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다. 반면, 해당 여성들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력한 제재와 처벌을 당한다. 주변화된 여성인 화천댁이 남성주의의 ‘특수한’ 자산인 깨철의 살해에 실패하자 정신적 장애를 입게 되고 서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처벌을 받은 것이나 남성주의의 피해자인 동만댁의 분노에 찬 살기가 남편이 아닌 장애여성 산월을 정조준 한다는 것은 장애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젠더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에게 장애는 그의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는 근거와 방패막이가 될 수 있지만, 여성에게 장애는 처벌의 상징, 이유 또는 결과물로써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으로 주변화되는 장애여성들은 마을에서 가장 손쉬운 처벌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비장애) 남성들은 단지 체면유지를 위해 깨철의 가정 파괴적 행위들을 방조했을까? 오히려 그들에게 깨철은 누구보다 더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은 깨철이 아니라 마을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깨철은 억압받은 여성들이 남성 중심주의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덫이 아니었을까? 소설과 영화에서 깨철의 몸과 마음을 통해 구체화되는 덫에 걸린 여성들은 미시적으로는 스스로와 서로를 감시·통제하고 거시적으로는 남성주의에 예속·종속 당한다. 물론 덫은 그 안에 놓여 있는 덫 미끼 덕분에 그 자체로 달콤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 번 걸려들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사냥꾼은 자신의 기호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덫 안에 갇힌 유약한 사슴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다. 즉 덫은 사슴의 운명을 결정하는 하나의 가시적 징표이자 비가시적 근거가 되는 셈이다. 깨철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나 이를 거부한 여성 그리고 이와 무관한 여성 모두 마을의 잠재적인 처벌대상자라는 점은 마을 (비장애) 남성들과 장애남성 깨철이 원래부터 한 통속이었다는 추론을 더욱 합리적으로 보이게 한다.

 

결론: 자유와 해방의 섬들과 마을들을 향하여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은 기존의 장애재현과는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 장애와 장애인을 접근한다. 해당 소설과 영화의 장애재현은 복합적이고 맥락적이기 때문에 여러 비평적인 쟁점들을 양산한다. 특히, 정상성, 장애화 과정, 공모와 결탁 등이 정밀하게 다뤄진다는 점은 이 소설과 영화의 최고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 모두 장애 재현에 있어 스테레오 타입화된 이미지와 관념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장애를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은유하거나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소설과 영화가 장애 인물들의 입장과 견해를 다각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문열과 임권택이 제시하는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은 남성 중심적, 비장애 중심적 권력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서열화 되어 있고,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서로 경쟁하고 억압한다. 소수자들이 덫에 걸린 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상호 경쟁과 억압에 몰두하는 동안 남성 중심주의와 비장애 중심주의는 정당성을 굳건히 하고 상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약육강식과 공모와 결탁으로 얼룩진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이 독자와 관객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독자와 관객들은 작가와 감독이 제공하는 비평적이지만 디스토피아적인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자유롭고 해방적인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창조적 재구성과 비평적 확장을 위해 우리는 소통과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안타깝게도 「익명의 섬」과 <안개마을>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소통과 협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경험한 ‘시행착오’와 이에 대한 자기반영적 ‘성찰’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향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만일 산월과 화천댁이 서로의 장애를 통해 친구가 된다면 그녀들 사이에 어떠한 공감과 연대가 형성될까? 한수옥이 깨철과 대화를 시도하고 그의 문제점들을 진정성을 가지고 비판한다면 깨철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배우자의 외도로 상처 입은 화천과 동만댁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 안아 준다면 화천댁과 산월의 운명은 어떻게 바뀔까? 마을 남성들이 여성들을 옹호하고 마을의 폐쇄성을 함께 비판한다면 소설과 영화의 결말은 어떻게 전환될까? 이러한 창의적인 상상과 주체적인 물음들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새로운 토론과 창작의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토론과 창작에서 촉발되는 긍정적, 전환적 에너지는 소설과 영화를 뛰어 넘어 사회적 공감과 연대로 엮여진 자유와 해방의 섬들과 마을들을 조성할 것이다. 본고와 앞으로 선보일 장애학에 기댄 기고문들이 독자와 관객둘에게 세상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각과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안할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문헌

이문열. 「익명의 섬」. 아침나라, 2001.

임권택. <안개마을>, 1983.

Atkinson, J., & Calafell. B. (2009). Darth Vader made me do it!: Anakin Skywalker’s avoidance of responsibility and the gray areas of hegemonic masculinity in the Star Wars universe. Communication, Culture and Critique, 2, 1-20.

Mitchell, D., & Snyder, S. (2001). Narrative prosthesis: Disability and the dependencies of discourse. Ann Arbor. MI: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Siebers, T. (2008). Disability theory. Ann Arbor, MI: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Woo, C. (2012). “Seeing another/seeing oneself”: Nondisabled audiences’ perspectives on disability in South Korean films. (Unpublished doctoral dissertation). Syracuse, NY: Syracuse University Press.

우충완  장애학 박사

작성자우충완 장애학 박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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