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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으로 건네주는 한마디, 겐키데시다까(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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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공식적인 연도가 4월부터 시작된다는 걸 소개한 적이 있었을 텐데요. 그러다 보니 여러 단체에서 총회를 개최하는 시기가 5월이에요. 며칠 전 한 장애인단체의 총회가 있어 저도 참가했답니다. 회장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 사람을 만났어요.

“안녕하세요, 후지이 군?” 생각해 보니 이 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후지이 군을 만난 지 벌써 15년도 넘는 것 같아요. 중증 뇌성마비장애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후지이 군. ㅇㅇ씨라는 호칭보다 친근함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 같기에 저도 따라 부르다 보니, 이제는 어느덧 마흔의 나이가 됐는데도 후지이 군이라고 부르게 되네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니 후지이 군이 커다란 눈으로 반짝반짝 저를 바라보네요.

후지이 군은 중증 장애인으로, 전신 중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상체에서는 목과 얼굴 뿐이고 하체에서는 발목과 엄지발가락을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후지이 군과 의사를 나누는 방법은 후지이 군이 발가락으로 컴퓨터의 마우스를 눌러 글자를 입력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고 후지이 군이 눈동자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움직여서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해요. 이동할 때는 컴퓨터를 쓸 수 없으니까 후지이 군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지 못 하면 후지이 군의 의사를 전혀 파악할 수 없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 합니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그저 후지이 군의 얼굴과 눈만 바라볼 뿐 그 다음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상황, 후지이 군을 만난 지 15년이 넘었지만 참 긴장되고 막막하고 미안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후지이 군과 함께 있는 활동보조인에게 도움을 청하지요. “저, 후지이 군이 뭔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활동보조인은 후지이 군의 눈을 바라보며 확인합니다.

“후지이 씨, 이야기 시작할까요? 아이우에오, 가키쿠케코…, 아 ‘케’입니까? 아이우에오, 가키쿠케코, 사시스세소, 다치츠테토, 나니누네노…?”

그렇게 한 자 한 자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 순서대로 물어보고 눈동자를 보고 확인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겁니다. 후지이 군이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겐키데시다까”(잘 지냈어요?)라는 말이었어요. 후지이 군의 활동보조에 익숙한 사람은 능숙하게 후지이 군의 의사를 확인해서 시원시원하게 전달해 주지요. 참으로 놀라워요. 15년이 넘어도 주저하고 마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고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는 몇 분 사이에 후지이 군과 나눈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짧은 인사, 하지만 아주 정성이 담긴 말 “잘 지냈어요?”. 정말 소중한 한 마디입니다. 사실 일본말은 한국말보다 발음 수가 훨씬 적어요. 아주 생략해서 말하면 기본적인 50개의 발음으로 구성돼 있으니까 50개의 발음을 거듭 제시하며 한 자씩 확인하면서 단어를 파악하면 되는 건데요. 물론 기술적인 부분도 익혀야 하겠지만 그 커뮤니케이션의 바탕에는 그 눈빛을 읽어내려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하며,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정성과 시간, 노력을 들여 주고 받는 대화라는 걸 확인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최근 일본은 고용률이 안정된 편이라고 하고, 그러다 보니 열악한 직업으로 분류되는 복지 관련업계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네요. 복지는 정성이고 봉사하는 마음이라는 오래된 통념이 깊이 박혀 있어 좀처럼 급여의 수준도 올라가지 않고 일자리로서의 사회적 인식이 낮은 편이라는 건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어요.

총회의 보고 내용 중에도 최근 활동보조인의 모집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후지이 군처럼 중증장애인은 특히 더 24시간 활동보조인의 지원이 필요한데 사회적 복지의 확보와 확대라는 게 언제나 과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후지이 군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에게만 제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관심 있는 제소가 5월 12일 있었어요. *투표에 관한 것으로, 현재 일본의 공직선거법에는 상체에 장애가 있어 투표 시

투표용지에 후보자 이름을 쓰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의 경우, 선거관리인 두 사람이 대동 확인해 대리기입 해 주도록 하는 규정이 있거든요. 그에 대해 오사카에 살고 있는 뇌성마비 휠체어 장애인(44세) 남성이 대리기입을 하는 사람을 선거관리인으로만 제한하고 있는 이 규정에 대해, ‘투표인 당사자와 개인적인 신뢰관계가 없는 선거관리인에게 투표의 비밀이 알려지게 되는 것으로 투표자의 권리 침해이며 불합리한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오사카법원에 재판을 건 겁니다. 2013년 이전까지는 활동보조인이나 다른 사람이 대리기입을 해 줘도 괜찮았었는데, 지적장애인의 입주시설에서 대리기입 부정사건이 벌어져 투표부정을 방지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선거관리인의 대리기입 규정이 생겼다고 해요. 하지만 제소한 장애인은 당사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점을 더 중시해야 하며 그런 관점에서 평소부터 장애인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신뢰감이 쌓인 활동보조인도 대리기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재판이 특별한 경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후지이 군처럼 의사소통에 아주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인 경우 아마 처음 만난 선거관리인이 후지이 군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해 투표용지에 대리기입 해준다는 것에는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 누구라도 차별없는 소중한 한 표 한 표, 그 당당하고 확실한 행사를 위해 다가가는 길에는 다양한 입장에서의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합니다.

 

*일본의 투표는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대신 유권자가 후보자 또는 정당의 이름을 직접 기입하는 방식이다. -편집자주

작성자글. 변미양/지체장애인. 일본 오사카에 거주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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