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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Faces, Place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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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는 21세기 문화 권력의 정점에 서있습니다. 세상을 대상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몸으로 느끼는 오감의 예술이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음악을 넣고 사진이라는 ‘인화된 그림’을 모아서 ‘움직이게 만든(motion pictures)’ 종합예술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기본은 단연코 사진입니다. 사진은 카메라가 만들어지면서 가능해졌지만 이것은 200년에 불과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을 이용해 사물을 그려보려는 생각은 2000년이 넘습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마치 1800년대의 사진인화 작업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의 일상에 담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프랑스의 1960년대 누벨바그 영화를 이끈 여성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작가 JR(장 르네)이 만나 한 편의 사진을 아니,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것인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 2018)’입니다. 로드무비의 양식을 빌린 이 독특한 다큐멘터리는 영화 속 사진에 감독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영화를 촬영하는 바르다와 JR이 사진으로 담아내는 바르다, 그리고 영화 속 사진에 다시 존재하는 바르다가 등장합니다. 동일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바르다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히 ‘차이’와 ‘반복’을 느끼게 만드는 일상생활의 힘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88세의 바르다는 33세의 JR과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5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포토트럭(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공간이 담긴 특수한 트럭입니다)을 타고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외딴 장소를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얼굴을 찍고 커다랗게 출력해서 벽 혹은 기차, 컨테이너, 수조탱크 등에 붙이고 다시 떠나는 영상이 반복됩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 때로는 무너지고, 이제는 멀리 떠나야 하는 곳도 있고, 변화된 새로운 일터를 마주치기도 합니다. 모두 살아온 이유가 다르지만 영화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진과 영화는 피사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타자에 대한 예술입니다.

그것이 상상이든 현실이든 타자의 존재 유무는 사진과 영화를 다른 예술의 장르와 구분하게 합니다. 탄광촌의 어느 허름한 집에 아버지의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여성은 자신의 얼굴이 붙은 집의 벽을 바라보며 회한의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 의해 나 자신이 기억된다는 희망 속에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해야 하고 나 또한 기억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지요. 이미지의 힘은 현실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닙니다. 800헥타르의 넓은 땅에 온종일 혼자 일하는 농부는 창고 앞에 붙은 자신의 얼굴 앞에서 외로움을 잊습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억될 것입니다. 바르다와 JR은 자신들의 사진을 찍는 것 또한 빠뜨리지 않습니다.

영상작업을 하는 바르다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것은 어쩌면 치매환자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에 비유할 만합니다. 그녀는 분명 사랑하는 것들, 사랑했던 것들을 기억하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겁니다. 33세의 JR은 타인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선글라스 뒤의 숨겨진 자신의 눈을 바르다를 위해 보여줍니다. 현실의 눈으로는 희미하게 보이는 JR의 얼굴이 바르다의 머릿속에서는 선명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인간의 존엄함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자기-대상(self-object)’이 만들어질 때 우리는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기가 그렇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그러하지요. 심각한 치매 환자들에게서도 이와 같은 ‘자기-대상’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과 사건이 공존하는 장소가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잠재기억이라는 철학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린 시절 방과 후 교정에 울려 퍼지던 노랫말, 철지난 웃음을 보이던 동무들, 퇴근하던 아버지의 힘든 뒷모습을 따라 걷던 나의 발자국들. 잊은 듯 살고 있지만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마을이 있었고 그 속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버려진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생각났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잠시 바르다 감독에 감정이입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야겠다는 뒤늦은 각오를 해봅니다.

작성자이영문/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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