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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故 오길승 교수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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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실천을, 죽음으로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위원회

사실 다소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첫 호로 발행되는 D&I의 페이지를 축하와 격려 받을 이야기가 아닌 이렇게 가슴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과연 맞을까도 싶습니다. 그럼에도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것은 어차피 우리 사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도 늘 행복한 색으로만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 그런 현실 덮어두고 밝고 신나는 이야기만 할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해봅니다.

이 이야기는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두고 너무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신 한 스승을 기리며 2016년 스승의 날 새벽에 제자가 쓰고 있는 글입니다.

故 오길승 교수.

아마도 장애인 분야에서 일 좀 하신 분들이라면 모르지 않는 이름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열정적이고 주장이 강한 성격을 보고 외골수적이라거나 고집이 세다고 혹은 무난하지 않은 성품이라고 평가하고 계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교수님도 제자들과 손녀에겐 한 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이셨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한 면만 보셨던 분들을 위해 제가 기억하는 오길승 교수님을 잠시 이야기해드리고 싶습니다. 2004년 4월, 경기도의 지원으로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재활공학센터로 표기)가 막 개소하여 분주하게 일하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 오 교수님은 경기도에 또 다른 아이템인 직업개발센터도 제안해 놓으셨던 상태입니다. 교수님은 늘 수업에서도, 그리고 외부 직업재활 기관 자문이나 세미나에서도 ‘발달장애인들이 늘 열악한 작업장 같은 환경에서 수익이 크지 않은 단순 임가공과 조립 업종에서만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을 좋아하는 성격의 발달장애인들이 농작물과 동물을 키우는 1차 산업과, 산출물을 가공하는 2차 산업, 그리고 이를 주말농장과 같은 3차 서비스 산업으로 연계시키는 복합적인 6차 산업의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도농 복합의 수도권 입지인 경기도에서 실현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마침 경기도에서 5천만 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그 기별을 받고 오 교수님은 당시 재활공학센터 팀장이었던 제게 직업개발센터도 시작해보고 싶다고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처음에 교수님을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교수님. 5천만 원의 비용은 대학을 갓 졸업한 직원 2명을 채용하는데 필요한 인건비와 기관부담금, 비품구입비를 빼고 나면 1천만 원도 채 남지 않는 금액입니다. 1차 산업을 위해서는 땅도 필요하고, 사무실도 필요하고, 기관의 운영경비도 필요합니다. 거기에 비닐하우스라도 짓고 농작물의 모종이라도 사야 할 텐데 제 계산으로는 그럴 비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첫 시작이 너무 열악하면 이후에도 발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됩니다. 지금 시작한 재활공학센터에 우선 집중하시고, 이후에 좀 더 큰 예산이 확보되면 그 때 시작하시면 어떨까요?”

아주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집으로 가신 교수님은 다음날 아침 다크서클로 온 얼굴이 덮이신 모습으로 다시 사무실에 오셔서 “남 팀장. 어제 얘기 듣고 집에 가서 밤새도록 고민을 해봤는데,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런데 그래도 한 번 해보면 안 될까? 정부가 먼저 나서서 이런 일을 시작해보자고 하는 기회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닌데, 이번에 시작을 안 하면 언제 이런 기회가 우리에게 다시 올지 알 수 없잖아. 내가 늘 발달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직업영역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내가 좀 힘들다고 해서 그 기회를 놓치고 나면 나는 평생 그 사람들에게 미안할 거 같다. 직원들에게 최대한 부담을 안 지울 테니 한 번 해보면 안 될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교수님은 제게 허락을 받으셔야 할 지위에 계신 분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추진을 해보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해 6월과 7월. 오 교수님은 경기도 부동산 정보를 검색해서 인근에 임야에 대한 임대정보가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그 땅을 목발을 짚고 직접 걸어보고, 땅 주인에게 연락해서 본인을 소개한 후에 ‘우리가 발달장애인을 위해 이러이러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다. 우선 땅을 빌려주면 우리가 거기서 사업을 하고, 나중에 예산이 제대로 확보되고 수익이 나오면 땅 임대료를 제대로 지급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당연히 2달 동안 십 수 회를 거절당하고 다니셨지요. 정중한 거절에서 모욕적인 거절까지. 아마 교수님 인생에 가장 짧은 기간에 많은 거절을 당해보신 기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굴과 팔을 구리빛으로 그을려 가며 한여름을 돌아다닌 교수님이 드디어 기적처럼 뜻이 맞는 땅 주인을 만나 불과 5천만 원의 예산으로 시작된 곳이 직업개발연구센터였습니다. 센터를 시작한다고 해서 교수님께 돌아가는 현실적인 유익은 딱히 없었습니다. 워낙 적은 예산에 비상근 센터장이기 때문에 급여를 받을 수도 없었고, 오히려 센터 운영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부담만 지셔야 하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자리였지요. 그 센터 안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먹고살 걱정도 없는 교수님이 발달장애인들의 새로운 직역 창출을 실천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고집스럽게 추진을 하셨더랬죠. 오 교수님에 대해 누가 뭐라고 평가해도 제게 각인된 교수님의 모습, 제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교수님의 모습은 방금 말씀드린 일화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일구신 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90년대 중반, 보호작업장 일변도였던 우리나라에 지원고용 모델을 소개하며 발달장애인들이 통합고용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던 일이나, 장애인 의무고용의 실효를 높이기 위해 적용제외 규정의 문제를 꼼꼼하게 짚어가며 개선을 추진한 일, 1998년에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으로 개정시켜 전문적인 직업재활서비스의 근간을 세워 갔던 일, 본인도 은퇴하고 할 일 없으면 택시라도 운전하시겠다며 양하지 장애인의 1종 면허 취득제한 문제에 맞서 싸워 결국은 제한을 철폐한 일... 현장에서 일하던 시절 교수님 언저리에서 그러한 일을 배우고 함께 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보람 있고 뿌듯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셨습니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문적인 보조공학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의 모델은 이후 서울시나 보건복지부가 참고하여 전국적인 보조공학서비스 확산과 작년에 제정된 ‘장애인·노인 등을 위한 보조기기 지원 및 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마중물이 되기도 하였고, 너무 이른 시절이었던 90년대 중반부터 주구장창 주장하시던 “대형 교회가 설립한 장애인복지관은 제발 교회 옆에 카페 하나 차려서 거기서 발달장애인들이 서빙하게 하면서 서비스 업종에 직업재활 영역 좀 개척해봐라. 교인들이 소모임하면서 마시는 음료와 빵만으로도 직업재활과 장애인식 개선이 함께 가능해진다”는 말씀도 지금은 수많은 직업재활 기관에서 바리스타, 제과 제빵 영역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현실로 달성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직업개발센터의 모델도 다양한 기관들이 새롭게 해석하고 접목해서 발전시켜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요. 어렵고 수고스러운 길이었지만 교수님의 선택이 옳으셨습니다.

2010년대부터 하늘의 부름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또 다른 화두들을 우리사회에 던지고 가셨습니다. 앞서 실행하셨던 6차 산업 직업재활 모델을 발전시켜 가족의 노후, 가족의 사후를 대비할 수 있도록 유럽의 캠프힐과 같은 생활-직업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 장애인이 일만하다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장애인용 자전거(핸드바이크, 특수자전거)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과 여가·운동 동호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장애인들이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앞장서시겠다고 차근차근 준비해 오시던 일.

아마 그렇게 열성을 다해서 교수님이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차별도 없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동등하게 즐거운 세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일궈 놓으신 직업재활과 보조공학의 기반들, 그리고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숙제로 넘겨주신 캠프힐 공동체와 장애인 운동·여가 지원과 같은 일들은 우리 사회의 후배들이 모두 함께 뜻을 이어받아 실현해야할 일이라고 다짐해봅니다.

이제 마무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햇살 참 눈부시게 밝은 날. 교수님은 생전에 늘 스스로를 돌아보시며 좀 더 의지하고자 하셨던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쯤 그 품에서 행복하게 쉬고 계시겠죠.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제자 입장에서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만나 뵈면 더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씀드리려다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그 곳에서는 장애로 인해 차별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없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이겠구나 싶어서요. 그냥 그 곳에서 다시 뵐 때는 교수님도 저도 해보고는 싶었지만 생전에 바빠서 엄두도 못내 본 골프와 낚시나 실컷 즐겨보시는 걸로 하시지요. 그 곳에서 교수님이 먼저 골프랑 낚시 배워 두신 후에 생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그것밖에 못해? 나 정도는 해야지, 한 번 보라고~” 뽐도 내시면서 저희들한테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반갑게 다시 뵐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현실이 어둡더라도 슬퍼만 하지 않고 희망을 쫓아 열정을 뿜어내는 법, 그게 저희가 그 동안 교수님께 배운 것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워하며 장애인의 편에서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2016년 5월, 교수님을 존경하는 제자들.

작성자정책위원회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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