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이의 있습니다
본문
아들: 아빠, 이 개새야~
나: 뭐? 이 쉑히가 초등학교 들어가더니 간땡이가 부었나? 일로와, 방금 뭐라 캤어? 뭐? 이 개새야? 이게 정신이 잠깐 외출했나?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어?
아들: 아빠~ 아~ 그게 아니고. 이게 개새라고~~~ 아빠 미워~
나: 어? 이 이게 개새?
억울해하던 아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아빠한테 선물로 받은 개새를 보여주고 싶었으면 그랬을까’라고 생각하니 괜히 애꿎은 개새가 미워집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참 쉽지 않습니다. 여덟 살배기 땅꼬마라도 절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지요. 뭘 알겠나 싶어도 알 건 다 압니다. 그 표현방법이 내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그것과 같지 않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 그러니 암만 내 자식들이라도 ‘뛰어봐야 벼룩’이니 ‘부처님 손바닥에 손오공’이니 라는 생각은 오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조건. 어쩌면 그것은 아이들의 언어, 문화, 사고, 표현법 등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수용하며 포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교과서적인 발언인가요? 하하.
포용
현재 우리나라 국가정책의 중요한 방향이 바로 ‘포용’국가입니다. 포용이 주는 뉘앙스가 참 좋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이렇습니다.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거나 받아들임’ 유의어로는 ‘관용’, ‘용납’, ‘용서’ 등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입장만이 아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포용이 주는 따뜻함입니다.
그러고 보면 포용에 어울리는 해시태그는 ‘#국가정책’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치’, ‘#정치인’, ‘#국회’, ‘#국회의원’, ‘#정당’ 뭐 이런 종류의 해시태그들이 포용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좌우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한쪽으로만 편향된 사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좌우가 있으니 진보와 보수가 있고 여야가 있습니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라면, ‘포용’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속시킬 수 있는 기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과 북의 거리만큼이나 좁혀지지 않는 좌우와 진보·보수의 대립적 이데올로기의 간극은 결국 포용으로 메워야 할 부분입니다.
포용에 관한 두 가지 사색
포용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저는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둡니다. 첫째, 포용은 쌍방이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세상 무서운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져 천지에 홀로 남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치고받고 싸울 사람이 없는데 누가 누굴 감싸고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포용은 혼밥, 혼술일 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쌍방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날선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며 고성방가가 뒤엉킨 혼돈의 무대에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포용입니다.
둘째, 포용은 너그러움을 동반합니다. 강제성이 약하다고나 할까요? 실수는 애교로 봐주고, 큰 잘못은 너그럽게 봐주는. 가끔 흉악범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너무 관대해 속이 뒤집어질 때가 있습니다.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도 가해자의 인권까지 걱정해 주는 너그러움은 ‘이게 나라냐?’라는 울분을 쏟아내게 합니다. 이처럼 포용은 실수와 잘못에 너그러운 잣대를 갖다 댑니다.
포용에 대한 이 두 가지 사색을 바탕으로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이하 ‘5차 종합계획’)」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자 합니다.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이의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은 5년마다 보건복지부장관이 장애인의 권익과 복지증진을 위해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수립·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 포함된 5차 종합계획에 해당합니다.
5차 종합계획의 비전은 현 정부의 국가정책 기조인 포용국가에 맞춰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이루어지는 포용사회’입니다. 장애등급제의 단계적 폐지, 탈지원센터 설치, 장애인연금 기초급여의 인상,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도입 등을 그 주요내용으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실제적인 자립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국가가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주요기치로 정책을 수립·시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큽니다. 다름 아닌 ‘포용’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 의도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모여 장애인정책의 종합계획을 수렴하고 그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 선택한 단어가 가져오게 될 파급효과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금만 더 감수성을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요.
앞서 포용은 동등한 입장의 당사자들이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이루어지는 포용사회’, 딱 이 문구만 놓고 본다면 결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해 보이진 않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사정해 도움을 구하고, 무조건적인 양해와 수용을 바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으니 여전히 장애인은 ‘보호하고 포용해 주어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또한 포용은 너그러움이 동반된다 했습니다. 강제성이 없으니 하면 좋고 하지 않으면 그만. 장애인복지 관련법들 중에 비슷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할 수 있다’, ‘노력해야 한다’ 등.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왜 이리 두루뭉술한 표현들을 써서 희망을 안고 찾아가는 사람들의 돌아서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일까요?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이루어지는 사회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이 전제되거나 누군가의 이해와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포용 받아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월드컵까지 치른 군사력 세계 7위, 경제력 세계 11위의 대한민국에서 시민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권리를 타인의 양해와 포용에 양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이루어지는 포용사회”.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이루어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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