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를 가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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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정신질환이 있거나 정신질환자로 오해받았던 사람 세 명이 있다. 이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거짓말 같았다. 소설 속에서나 펼쳐질 법한 일들이 그들의 인생 속에서 벌어졌고, 그들은 그 일들 탓에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아무런 정신질환이 없는데도 제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고 자식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키고, 이웃의 부추김에 의해 병이 부풀려져 강제입원 되고, 사회로부터 배신당해 정신질환을 얻어 치료받았지만, 사회에서 다시 배척당하고, 정신질환이 자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어 버린 이들.
이들이 겪어왔던 삶은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세상과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사회가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웠고, 법마저도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을 뿐이다.
네 번의 강제 입원, 뒤틀려 버린 내 인생 - 김진현(가명, 28)
나는 서울 모 종합병원 원장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모자람이 없는 생활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부모님의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집안에서조차 차별받으며 살았다. 사춘기 소년이 흔히 느끼는 그런 차별이 아니다. 부모님의 기대와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면 무자비한 폭행과 학대를 당했고, 내 의견은 철저히 배제당하고 무시당했다.
가죽 허리띠로 온몸이 찢어질 정도로 맞기도 하고, 물건을 내게 집어 던지거나 흉기로 위협하기까지 했다. 폭행과 학대의 이유는 사소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 집사에게 말했다고 때리고, 글씨가 작다고, 표정이 좋지 않다고 맞았다.
난 태어날 때부터 한쪽 귀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도 자신이 없어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나를 가족들조차 외면하고 무시했기에 난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 가족은 멀쩡한 나를 정신이상자로 몰아세웠고 안팎으로 내가 정신질환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바람이 나 부부 사이도 원만하지 못하게 되자 그 여파는 고스란히 폭행과 학대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Y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다. 법조인이 되길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학교를 계속 못 다닐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으니 집에 가서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웬일인지 어머니는 내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나는 집으로 가 재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나는 갑작스레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 됐다. 부모님은 내가 정신병이 있어 자신들을 때린다며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원주로 다시 돌아가 법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퇴원시켜 주겠다고 협박했다. 병원장과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나를 정신질환자로 몰아세우고 정신병원이라는 교도소를 이용해 나를 조정하려 한 것이다. 결국,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음 해 일어난 두 번째 강제입원 상황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는 정신병원 응급호송단을 동원해 나를 반 기절시켜 목과 손발을 묶은 뒤 병원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이때도 나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계속되는 협박 때문에 D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또다시 내가 정신질환자라고 교수 등 학교 측에 알렸다. 도대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화가 나 견딜 수 없어 나를 정신질환자로 몰아세운 어머니에게 대들었고 싸움은 크게 번지고 말았다. 그 싸움을 빌미로 나는 세 번째 강제입원을 당했다. 입원 사유에는 ‘여성에 대한 집착’이라고 적혔다. 그러나 퇴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모두 인정을 해야만 했다.
나를 비방하고 정신질환자로 몰아세우는 일들이 반복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내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모두 낱낱이 밝혔다. 물론 부모님의 신상정보까지 모두 공개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곧 네 번째 강제입원으로 이어졌다. 내가 쓴 글은 모두 사실임에도 담당 의사는 모두 거짓임을 인정하라고 협박했고, 나는 퇴원하기 위해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는 얼마간 집을 비운 사이 내가 아끼던 강아지가 보이지 않아 강아지의 행방에 대해 부모님께 캐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갑자기 화를 내며 “너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한다”며 칼을 내 목에 들이댔고 아버지는 뒤에서 팔짱만 낀 채 이를 지켜보고기만 했다. 다섯 번째 강제입원을 당할 뻔했지만 동생이 말려 소동은 거기서 마무리됐다.
지금까지 총 일곱 번의 강제입원 시도, 네 번의 입원. 그 과정에 겪었던 고통과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계속되는 정신과 약물치료로 머리가 둔해지고 행동조차 느려졌다.
나는 아무런 정신질환이 없다. 그러나 허술한 법체계 때문에 반복적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되면서 내 삶은 엉망이 돼 버렸다. 내 잃어버린 삶은 어디서 돌려받아야 하나?
사회가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웠다 - 지은성(가명, 35)
나는 의사의 진단조차 없이 부모님의 전화 한 통만으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 있던 어느 날, 외출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속옷만 입은 채 욕실 문을 나섰을 때다. 덩치 큰 남성 3명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병원에서 일하는 파란색 보호사 복장을 하고 있었고, 무작정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 때문에 날 잡아가려 하는지,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저항했지만,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덩치 큰 장정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난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곧바로 난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원 승합차 안으로 던져졌다. 그렇게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난 차 바닥에 짓눌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난 곧바로 독방에 갇혔다. 의사의 진단 같은 것은 없었다. 병원 직원들은 내 옷을 강제로 벗기고 기저귀를 채웠다. 그리고 사지를 모두 침대에 묶어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제야 간호사가 들어와 내 상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당시 내가 갖고 있던 정신질환은 불면증뿐이었기 때문이다.
입원하기 몇 년 전 나는 보통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불미스런 일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살길이 막막했다. 이 사회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큰 상실감 때문에 불면증까지 생겼고 치료도 받았다. 이런 사회에 대한 울분은 술과 폭력으로 나타났다.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졌고, 주사도 늘어 부모님에게 소리를 지르고 가재도구들을 부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웃들은 나를 ‘정신병자’라고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과 이웃들의 부추김 탓에 부모님이 나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킨 것이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흔히 생각하는 병원과 달랐다. 침대조차 없었다. 좁은 온돌방에 환자들을 일고여덟 명씩, 많게는 열한 명씩 벌집처럼 쑤셔 넣어 마치 수용시설 같았다. 그렇게 입원한 환자들이 200여 명에 달했다. 방은 이십여 개 남짓뿐이었는데 말이다.
약 처방도 의사 마음대로였다. 약이 맞지 않아 부작용이 일어나는데도 의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를 입원시킨 부모님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화가 나고 답답했지만, 병원 생활 동안 아무런 말썽도, 잡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그래야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병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지자체에 퇴원 심사 청구서를 신청했지만, 병원 측의 방해로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겨우 심사를 받아도 ‘계속 입원’이란 결과만 나왔다. 거기서 그만둘 수 없어 도지사에게 퇴원 심사 청구서를 보냈더니 병원 대표가 직접 찾아와 청구서를 철회라면 퇴원시켜 주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난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강제입원 후 퇴원하기까지 7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퇴원 후 진료기록을 보니 더욱 기가 막혔다. 초진기록에는 술에 취해 한 행동이 충동성과 행동조절 장애 등으로 크게 부풀려 기록돼 있었고, 전혀 없었던 과거 기록까지 날조돼 있었다. 게다가 입원통지서 서명란에는 다른 사람의 글씨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입원동의서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의사의 동의만 있을 뿐이었다. 특히 병원 측에서 작성한 계속입원치료심사청구서에는 내가 굉장한 중증정신질환을 가진 것으로 진단돼 있었다.
결국, 내 증상이나 의견에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내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정신병원에 인권은 없었다 - 이성원(가명·35)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믿고 의지했던 죽마고우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정신질환은 그렇게 나를 덮쳐왔었다.
친구에게 상처를 입으면서 마냥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당시 폭행에 의한 상처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형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피부와 눈, 머리카락 색이 다르긴 했지만 내가 보고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피부색이 완전히 검었고 눈은 노랗고, 머리는 하얀데다 벌거벗고 있었는데 병실 밖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게 저승사자인 줄 알았다. 내가 원하던 대로 정말 죽을 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보았던 그 형상이 내게 아주 천천히 다가오더니 “같이 가자”고 속삭이는 거였다. “네가 여기서 인생을 포기하면, 포기한 만큼의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했던 일곱 번의 자살시도는 그렇게 시작됐다. 친구로부터의 너무 큰 배신감에, 정체모를 그 형상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나에게 대인공포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괴물이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건지, 내 머릿속이 잘못된 건지 몰랐지만, 사람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뱀의 형상을 한 사람도 있었고,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너무 많은 소리라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는 내게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너무 무서워서 집안에 갇혀 지냈는데 폭식증까지 생기고 말았다. 계속 먹기만 했다. 토하고 먹고, 토하고 먹기를 반복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생활이 2년, 주변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봤으면 좋겠다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입원까지의 시간도 오래 걸렸다. 당시는 내가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정신질환자로 취급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큰 배신을 당하고 정신질환이 생기기 전, 내 생활은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직장도 잘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일상생활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오히려 남들에게는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일들도 거뜬히 넘기곤 했다. 하지만 변화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내 인생이 뒤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자살시도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원에서의 치료과정도 수치스럽기만 했다.
내가 있던 곳은 폐쇄 병동이었다. 병실이지만 출입이 자유롭지가 않다는 것이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다. 전화, 면회, 외출 등 모든 것이 금지됐다. 내가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정신질환자와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의사는 단절된 병실에서 치료가 필요하다가 했지만 나는 그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남에 의해 나를 강제적으로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입원 처음에는 신경안정제 등 약을 많이 먹었다. 정신질환 치료약도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정신과 신체 모두 힘이 빠져 무기력한 상태가 돼 버린다. 일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어지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극히 작아지게 된다. 그냥 움직임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멍한 상태만 온종일 이어질 뿐이다. 당시 불면증도 있었는데 잠자는 데만 도움이 될 뿐, 다른 질환 치료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입원해 있는 동안 환자에 대한 의사의 진료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의사와 심층 면담이나 대화도 나눠보지 못했던 데다가 의사는 아침에 그저 환자들을 둘러보고 나갈 뿐, 그 어떤 상담치료도 없었다. 그것도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모든 환자를 그렇게 대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격리실도 있었는데, 벌주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란스럽거나 관리가 잘 안 되는 환자에게 “자꾸 그러면 격리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런 통제는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격리실에 묶어 놓는 환자도 있었다.
그런 병원 생활이 너무 싫고 이해할 수 없어서 입원해 있는 동안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며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냈다. 말 잘 듣는 아이에 대한 보상일까? 한 달 동안의 정신병원 생활을 마치고 난 퇴원할 수 있었다.
당사자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정신질환,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법률, 제도, 사회적 기반 등 모든 것이 이들을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제 당사자가 나서야 할 때라고 당사자들은 외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정신장애 문제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반민주적, 반인권적인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 체계를 뒤바꿔놓을 수 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만나본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서로 의지하고 위로해가며, 자신들의 경험과 인생을 세상에 알리며, 사회의 부당함을 외치며 한발씩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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