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 이몽룡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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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지민 |
위의 제목을 보며 그런가 보다 덤덤하게 넘어간 분이 계실 테고, 뭔가 이상한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한 분도 계실 테며, 이게 말이 되냐고 단번에 지적한 분 또한 계실 겁니다. 너무나 태연하게 심청이 이몽룡을 만났다고 적어놓았으니까요. ‘심청’이라 하면 곧장 연상되는 단어들이 몇 가지 있죠. 심봉사, 공양미 삼 백석, 임당수 같은 명칭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이몽룡’이라 하면 춘향, 변사또, 향단, 남원 같은 말들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때와 장소가 완전히 다른 인물들인데, 어떻게 그들이 만났다고 제목을 달았을까요?
글은 무한대의 상상이 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과 계백장군이 만나 세상사를 토론할 수 있고, 나이팅게일과 심사임당이 마주앉아 깊이 있는 인생의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만화 속 주인공을 불러들여 우리 모두와 함께 어울리는 게 가능해지고, 소설 속 주인공을 책 밖으로 초대해서 선술집 술자리를 같이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면 얼마나 환희에 젖어 있었는지를 함께 들어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한테 같이 부탁하자고 외치면 됩니다. 남해바다 땅끝마을 어느 백사장에서 만나고 싶다고요. 그럼 베르테르가 눈앞에 등장할 겁니다. 성큼성큼 뛰어오면서 말입니다.
수십 년 전 ‘공상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던 영화나 만화 속 이야기들은 말도 안 되는 첨단(?)의 미래를 꾸며놓았던 바 있습니다. 밖에 나와 이동하면서 전화를 한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일이었죠. 컴퓨터라는 기계 앞에 앉아,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 나눈다는 건 말 그대로 공상과학일 뿐이었습니다. 로봇이 지구를 구하는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보면서도, 그 어린 마음속 전제는 항상 ‘이건 만화니까’였으니까요. 지금은 어떤 세상이 됐고 앞으론 어떻게, 얼마나 빠른 번개처럼 변화할까요? 그런 발전의 속도에 익숙해지지 못하면, 길을 걸으며 DMB라는 방송화면을 보는 모습들을 여전히 신기해하는 저 같은 입장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지털’이라는 대세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한 저의 별칭이 ‘원시인’으로 정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2.
세상에는 법과 규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윤리가 있고 일반적인 상식 또한 존재합니다.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영역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죠. 세상 질서를 이룩하고 생존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약속이자 사회적 합의인 셈입니다. 지켜야 할 사항들은 반드시 지켜야겠죠. ‘나 하나쯤이야’라는 예외조항은 없습니다. ‘우리끼리 따로’라는 건 사(私)적인 동호회나 소규모 모임 안에서만 통용될 별도의 규범이겠죠. 그렇다 해도 법과 윤리 및 일반상식에서 벗어나는 일탈마저 용납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적 삶은 상상 따위가 개입될 여지조차 없는 냉혹한 ‘현실 그 자체’의 오늘, 현재, 지금, 당장의 피 말리는 전쟁터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예외의 세상’으로 모두를 인도합니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허락하고, 그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며 풀어내는 게 가능합니다. 아무런 제한도 없습니다. 서쪽에서 해가 뜨고 남쪽으로 저물어도 상관없습니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철새들이 바다 속을 헤엄쳐도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먼 우주에서 찾아온 외계인과 차 한 잔을 마시고, 투명인간의 등에 업혀서 시내 한복판 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습니다. 한겨울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한여름 인파 속에 두터운 코트를 입고 다녀도 쳐다보는 이 하나 없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뉴스에 나올 만한 일이 될 텐데, 상상의 글쓰기에선 모든 게 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언급한다면, 일체의 윤리와 도덕 따위는 모두 허물고 내버려도 괜찮습니다. 법과 질서는 공허한 소품에 불과할 테고, 일반상식 같은 건 아예 무시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겁니다. 온갖 음흉한 생각과 비윤리적 욕망도 허용됩니다. 왜냐하면 상상이기 때문이죠.
다만 여기서 반드시 내세워야 할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모든 건 ‘혼자만의’ 생각과 글쓰기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또한 그 전제를 절대로 망각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3자에게 공개할 글이라면 엄연히 존재하는 법과 규칙, 윤리와 일반상식 같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반드시 따라야겠죠. 왜냐? 개인적인 상상을 품는 것과 그 상상을 공유하는 건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혼자만의 생각 안에서는 추하게 일그러진 그 어떤 걸 떠올려도, 그걸 적고 묘사한다 해도 누구한테든 지적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한마디로 개인적인 프라이버시(privacy : 개인의 사생활이나 사적인 일이 공개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을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프라이버시를 글로 적어 자발적으로 공개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3자가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면 얼마든지 환영받겠지만,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범주까지 이 사회가 받아들일 순 없는 일이니까요.
극단적인 예 한 가지만 들까요? 너무너무 밉고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가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가정하죠. 혼자만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생각이든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런 내용을 공개적인 글로 적어 인터넷 같은 열린 공간에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부터 그 글을 쓴 당사자 본인은 사회적 가치판단의 잣대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명예훼손이라는 반박을 듣거나, 범죄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내몰릴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가 되죠. ‘무한대의 상상’이라는 건 1차적으로 개인 하나만의 영역에 국한돼야 합니다. 그 상상이 세상과 만나기 위해선, 이 사회가 공유하는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잊으시면 안 된다는 뜻이 됩니다.
3.
저는 여러 아이들과 얘기할 때마다 이런 예를 종종 들곤 합니다. 너희들이 크면 우리가 금니를 씌우는 것과 똑같은 아주 얇은 물체 하나를 어금니에 씌울지도 모른다고, 그 안에 컴퓨터와 휴대전화와 오디오 같은 모든 게 최첨단으로 집약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흔하게 보던 선글라스인데, 그것 하나에 영화관 같은 초대형 화면과 최고급 카메라 겸 캠코더 기능이 각각 내장되어 있을지 누가 알까요? 쌀알 하나의 크기인데,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 한입 가득 맛있는 고기 덩어리가 되는 식으로 종류별 음식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가능할까요? 저는 뭐든 다 가능하다고 미리 상상하게 됐습니다. 현재 기준의 모든 최첨단 제품들은 불과 십여 년 전까지는 불확실한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으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심청으로 하여금 이몽룡과 만나게 만드는 건 글 쓰는 이들의 상상력입니다.
심청이 이몽룡 아닌 고구려 신라 백제의 모든 백성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몽룡이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대륙에 진출한 인물이라 설정할 수 있고, 근대로 넘어와서 김구 선생님과 함께 하는 수행기자 1인이 되어 38선을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아예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들여서 이 사회의 모든 부정부패를 말끔하게 도려내는, ‘마패’를 손에 쥔 정의의 사도로 그의 존재가 되살아날 수도 있겠죠.
상상이 개인적 공상 수준에 머문다면, 발전이 없는 좁은 틀 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필요한 상상은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힘겹고 우울한 상상의 공개는 제3자들마저 지치게 만들지만, 희망적이고 미래가 보이는 상상은 모두에게 꿈과 기대치를 전달합니다.
피드백(feedback)이라는 말이 있죠. 어떤 행위를 한 뒤에, 그 결과의 반응을 보며 다음의 행동을 결정하는 걸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상상의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좋을지, 암울한 방향으로 빠지는 게 나을지의 질문은 불필요한 우문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늘진 음지(陰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햇살 가득한 양지(陽地)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인지를 알게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지향하는 상상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하셔야 할 일입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어떤 내용을 선택하시더라도, 그 선택의 결과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몫이 되니까요. 글을 적을 때 어떤 내용을 적고 싶으신가요? ‘무한대의 상상’, 그건 방종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무조건의 자유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상상’은 여러분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고, 그 결과로 글쓰기의 내용까지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상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 그 선택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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