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교사와 10대 남학생, ‘반차별의 눈’과 만나다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30대 여교사와 10대 남학생, ‘반차별의 눈’과 만나다

본문

[인권오름]

‘이 곳, 현실’ 에서 30대 여교사 남학생 사건을 말한다는 것

30대 여교사 남학생 사건을 이야기 할 때, “그들이 정말로 사랑했을까?” 같은 낯 간지런 물음은 부디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사랑을 논하는 낭만의 영역은 ‘이 곳,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금기에 관대해지는 건 어디까지나 드라마 같은 가상현실에서 뿐이다. (사제 간의 사랑은 영화, 드라마에서 그동안 꽤 자주 써먹었던 소재다.) 이번 일에 대한 기사 몇 개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시피, 가상이 아닌 실제에서는 사랑이고 자시고 명백한 ‘죄인’에 대한 제대로 된 ‘단죄’ 만이 이야기되고 있지 않나? 피해야 할 질문 한가지 더, “이번 일의 어떤 점이 제일 문제인거지? 미성년자랑 자서? 아니면 두 사람이 교사였고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림] 키스 해링(Keith Haring)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 사회적 지위, 성별 등 한 가지 요소만이 아닌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지금과 같은 파장을 일으켰다.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을 말한다는 건, 이번 일을 통해 ‘이 곳, 현실’을 되비쳐보는 일을 뜻한다. 이 사회가 ‘30대 여교사’ 와 ‘10대 남학생’ 을 어떤 존재로 규정짓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묻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 분노, 처벌을 말하는 강경한 태도 등은 사회적으로 깔린 그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숙의 아이콘 ‘여교사’와 순결의 아이콘 ‘아이’의 만남

여교사가 ‘정숙’의 아이콘이라면, 아이(학생)는 ‘순결’의 아이콘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쏟아지는 세간의 분노는 대체로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하나는 윤리적 차원의 분노, 상식이 똑바로 박힌 어른이라면 미성년자와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다는 식의 태도다. 두번째는 여교사라는 ‘여성’을 향해 쏟아지는 남성들의 분노다. 이 사건이 알려지고 터져 나온 반응 중 하나가 ‘그 여자 (나이도 많은데다) 못 생겼던데’ 였다는 얘기는 이 일을 바라볼 때 여성에 대한 남성주의적 사회의 경멸, 차별 문제를 빼놓고 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윤리적 분노에서 중요한 건, 아직 올바로 된 판단력도 갖추지 못 했을 어린애를 감히 성적 대상으로 본 어른의 ‘부도덕’이다. 그리고 그 ‘어른들의 도덕’은 성인 아닌 자들은 판단의 주체도, 성적 주체도 될 수 없다는 억압적인 요구를 품고 있다. 한 마디로 ‘애들은 어른들의 보호 아래 하라는 것만 해야 해’ 로 이어지는 그렇고, 그런 훈계가 도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성적인 것에 대한 통제는 이 사회가 도덕을 확립시키는 주요한 방식이었다.

성과 도덕과 질서의 상관관계, 사회적 비주체들의 허가 받지 못 한 섹스

도덕이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이런 식의 연결은 어떨까? 나이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성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왔다. 사춘기 남자애의 왕성한 성욕은 도덕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왜?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 법칙 때문이니까. 반면 성 경험을 했다는 게 드러난 여학생들은 ‘걸레’ 소리를 들으며 주위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 이토록 차별적인 도덕이 유지하는 사회질서는 대체 누구의 질서인가? 여교사를 향해 “여자 노릇, 부인 노릇, 선생 노릇 못 했다.”고 지탄하는 사회가 보여주는 것은 공자 왈 시절의 유교 같은 남성 중심적 가부장들의 도덕이다.

이런 면에서 상식적인 것이라는 듯 보편성의 얼굴을 한 윤리적 분노와 남성들의 차별적인 분노는 각각의 개별적인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연결된다. 남자들이 자신보다 어린 여성과 자고 싶어 하는 건 사회적으로 이미 공공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자신보다 어린 남성과 자고 싶어 하는 욕망은 섹시하고 능력 있는 여성에게만 그럴 자격이 주어질뿐더러, 대개는 숨겨져야 할 위험한 욕망이 된다. 여성의 ‘주제 넘은 성적 주체성’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의 권력관계를 어그러뜨린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분노를 산다. 여교사와 (남)학생의 섹스는 사회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의 성적 결합이었다. 그 금지된 섹스는 이 사회 ‘도덕’의 이름으로도 남성들의 ‘심기’에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인가, 또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누구인가(누구로 규정 당했나)’ 만큼이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의 문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학교라는 신성한 공간에 속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성’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사회로부터 성적인 권리를 빼앗긴 학생들은 물론이요, 성인인 교사들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학교의 목표는 모두가 알다시피, ‘학생들 공부시켜서 산업사회의 유용한 인력 배출하기’ 다. 학교 안의 모든 인간들은 그 절대적인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존재 각각 ‘학생’ 과 ‘교사’ 로 재구성된다.

그러나 암만 학교를 순결한 성역으로 만들어도, 성적인 사건은 학교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여학생의 임신 혹은 낙태, 남교사의 성추행 사건, 남자애들만 편애하는 여교사에 대한 소문, 또한 남학생들의 음담패설은 학교 안의 모든 여성을 재물 삼아 이루어진다. 탈성화된 학교 공간 안에서도 학생과 학생,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성적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향하며 은밀히 교차되고 있다. 때로는 어떠한 공간의 목표나 사회적 역할 따위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부정하고, 어떤 존재인지까지도 규정짓는 어마무시한 권력을 행사할 때가 있다. 학생과 교사에게서 인간으로서 가진 성적인 면을 지워낸 결과가 바로 신성한 학교라는 거짓된 허울이다.

허술한 법체계를 논하라? NO! 차별적인 사회체계를 바라보자! YES!

청소년활동가들이 만든 공부모임 ‘저공비행’에서 얼마 전에 반차별을 주제로 공부했었다. 그 때 초대했던 활동가 분이 가져온 참고자료의 제목이 ‘특정 집단을 구획 짓는 권력에 대한 성찰’ 이었다. 한 인간이 청소년, 성인, 여성, 교사, 학생 등의 요소로 따로따로 분리 되서 파악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다. 이번 사건은 두 사람을 구성하는 각각의 정체성들(연령, 성별, 사회적 지위, 결혼 여부), 섹스라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 심지어 학교 공간의 특수성까지도 한꺼번에 작용한 복합적인 사건이다. 이 복합성을 무시하고 이 사건을 얘기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 이분법은 누가 가했고 누가 당했는가를 얘기하며, 여교사를 처벌하지 못 하는 허술한 법체계를 논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두 사람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죄인이 아닌데 왜 처벌할 법이 필요한가?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죄악시 되는 맥락 속에 이 사회가 가진 ‘차별체계’가 있다. 정작 이야기 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30대 여교사와 10대 남학생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그런 그들의 관계를 대하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차별 또한 복합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키워드, ‘소외’

   
[그림] 프란치스 Francis/ oil on board/ 35cmx45cm/ 2004년 [출처] http://www2.ktrwa.or.kr/
이토록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키워드는 ‘소외’ 다. 이번 일이 만약 남교사와 여학생 간의 일이었다면, 이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수 있었을까? 기사가 터지는 순간부터 이 일을 성폭력 사건으로 단정 짓고, 여학생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검색어 순위를 다 장식하진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다른 사건들 속에서 방금 예로 든 여학생처럼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건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조금씩만 달라져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반응은 제각각으로 달라진다.

그렇다고 모든 걸 ‘그 때 그 때 달라요’ 라고만 말하기에는 이런 사건들을 특정 방향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지배적인 질서가 있다. 그 것은 앞서 말한 ‘가부장들의 도덕’ 같은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질서이며,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갖고 주변의 존재들을 끈임 없이 소외시키는 사회구조다. ‘차별의 눈’이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외면하고, 사회적 강자들의 시선에서 유리한 부분만을 취사선택해서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눈에 대항해 소외된 자들의 문제를 바라볼 ‘반차별의 눈’ 아닐까.
작성자엠건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