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인협회, 전국 중증장애인배우자 초청대회 개최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지체장애인협회, 전국 중증장애인배우자 초청대회 개최

10월 18일 서울 올림픽파크텔 올림피아홀서...장한 배우자상에 안순희씨 선정

본문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1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 올림피아홀에서 2010 전국중증장애인배우자초청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 2009년 전국중증장애인배우자대회 모습 (사진제공=한국지체장애인협회)
사회적 시스템의 미비로 인해 부부 중 한사람이 중증장애가 있는 경우 그 배우자가 생계와 자녀교육까지 홀로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처해있는 장애인배우자를 위로하고, 삶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지난 1994년부터 개최돼 왔다.

이번 행사에는 울산광역시 중구에 살고 있는 안순희씨에게 대회 최고상인 장한 배우자상을 비롯해 8명의 배우자에게 배우자상을 수상한다.

또 전국 지회에서 추천받은 장애인부부 50쌍을 초청, 이들을 위한 축하공연과 서울대공원 나들이에 나설 예정이다.

다음은 장한 배우자 상을 수상한 안순희씨의 사연인다.

행복의 터널
고외택․안순희 부부

당한 사람만이 안다! 이 표현이 딱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덧 만 13년이 넘어 14년째 입니다. 교통사고로, 그것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큰아이 막 7살, 작은아이 갓 4살 되었을 때입니다. 결혼해서 직장생활을 잘하다 아는 형님과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었습니다. 사업이 실패하여 이곳 울산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곧바로 새 직장을 얻어 안정적으로 나름 재미있게 생활하던 때였습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행복했었던 부러울 거 없었던 결혼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버스가 중앙선을 침범하여서, 큰 사고를 당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뇌를 다쳐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아니 깨어나기 힘들다는 의사의 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심한....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고통의 시간, 사막의 시간....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입학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병원은 부산에 있었고, 아이들은 어리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은 딱히 없었고, 애들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다친 아들 때문에 마음을 못 잡고 계셨다.

사실 어머니와 우리 부부는 신앙이 달랐습니다. 그것 때문에 항상 못마땅해 하셨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울산으로 내려와 이런 사고를 당하니 더욱 더 저를 힘들게 하셨습니다.

결국 양산에 있는 고모가 와서 아이들을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거의 석 달여를 중환자실에 있다 보니 고모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시어머니도 누워있는 자식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고 저만을 나무라던 시절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다리가 부러졌기에 수술을 해야 했지만, 환자의 상태도 여의치 않아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을 찾아가 일단 수술이라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열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수술해달라고, 일단 병실로 옮겨와야 그 다음의 생활들이 진척 될듯 싶었습니다.

병실에 돌아와서도 의식을 찾지 못하는 남편은 말 그대로 식물인간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자식을 보며 어머니는 못내 못마땅한 얼굴을 보이셨고 그로 인해 저는 어린 아이들과 부산을 오가며 힘든 삶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수술하고 환자의 상태가 조금씩 안정되니 퇴원하라는 병원의 말에, 퇴원을 하지도 못하지도 못하는 이러저런 상황 속에서 결국 울산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나마 울산에 있는 병원으로 오니 마음은 힘들었지만, 생활은 안정되었고 아이들도 항상 엄마를 보니 안정되어가는 듯했습니다. 미처 경제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당한 사고였기에 경제적으로도 힘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다니던 회사에서 잠시나마 융통해주어 물질적으로는 힘든 것이 덜하였지만, 이해를 못해 주는 어머니 때문에 마음은 항상 상당히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딸 아이와 어린 아들,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는 남편, 매일 아침마다 보는 시어머니의 못마땅한 시선, 눈도 마주쳐 주지 않는 시어머니, 물어도 대답 안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밤사이 환자의 상태를 옆 환자 보호자한테 들어야만 했던 병원생활, 낮에는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하고 저녁 즈음 돌아오면 어지러워진 방안,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

정말 죽고 싶었던 낭떠러지의 벼랑 앞에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정말 글로써는 표현하기 어려운, 말로써도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신앙이 있었기에 버텨졌고, 멀리서 함께해 주지 못해 눈물과 걱정으로 신경써주시는 친정 부모님, 한 번씩 찾아와주셔서 기도해주시고 가는 교회 분들, 새벽마다 기도해주시는 여러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즐거운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계속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고, 낮에는 병원에서,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챙기며 힘에 겨운 무거운 생활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퇴원해도 괜찮다 하고, 다른 동료 환자들도 집에 돌아가서 잘 있는 것을 보고 퇴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반대만 하는 시댁식구들 때문에 더없이 힘들 때였습니다. 몸이 두 개이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퇴원하는 건 무조건 반대하고...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15개월의 병원생활을 뒤로 하고 집으로 퇴원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하니 아이들도 심신이 안정되고 저도 몸은 고되었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함께 돌볼 수 있으니 참 좋았습니다. 매일 남편의 식사와 함께 어머니의 식사도 챙겨야 했고 병원에서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운동도 시켰습니다.

아직도 못마땅해 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 한 편이 불편하였지만, 아직도 의식을 못 찾고 누워만 있는 남편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돌보면서, 아이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조금씩 생활에 안정이 되어가는 듯 했습니다.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남편도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근 2년여를 의식 없이 코 줄 영양죽만 먹다가 어느덧 미음에서 밥으로 옮겨 왔으며, 뚫렸던 목도 메꾸어 지고 나니 간단한 단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긴 긴 터널이었고 끝이 없는 암흑이었습니다. 조금씩 좋아지는 자식을 보니 그때서야 어머니도 환한 웃음을 띠시며 마음이 녹는 듯 하였습니다.

그렇게 바쁜 나날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까지는 챙기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딸 친구 엄마의 도움으로, 아이들도 상당히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만 힘든 줄 알았고 나만 슬프다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제대로 말로 표현을 못하는 어린 나이였기에 상처도 그만큼 컷 던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나마 아이들의 마음도, 스트레스도, 상처도 감싸주려 애를 썼습니다. 아빠의 몫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은 저녁을 먹고 남편의 침상을 정리한 후에는, 잠깐 시간 내어 아이들과 함께 배드민턴도 쳐주며 놀아주었습니다. 처음엔 아빠 없이 노는 것조차 어색하고 쓸쓸하였지만, 저나 아이들에게는 무언의 서로를 위로해주는 연결 도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덧 큰아이는 대학생, 작은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때때로 힘들 때는 아이들이 도와주기도 하고,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름 심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IMF때라 모두가 힘들었고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TV에서 보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했습니다.

‘죽었다 생각하자 어차피 죽으면 땅에 묻힐 인생이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라 하지 않았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생각하며, 노력하며 죽기 살기로 살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 위로 아닌 위로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올 해에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가족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옛날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거였지만, 그나마 남편의 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가벼운 휠체어가 생겨서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컸다고 강행한 여행이었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휠체어에 남편을 태우고 다니면,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들 때문에 참으로 안 좋았고, 불편한 시설들 때문에 좋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여러 도와주는 분들이 계셔서 레일바이크라는 것도 탈 수 있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하여야 하기에 여러 여건상 차안에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가족 여행을 다녀오고 사진도 생기고 하니,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가족 모두가 뿌듯하고 모두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힘들지만,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열심히 운동해 주는 남편에게 감사하고,
많이 좋아진 장애에 대한 인식에도 감사하고,
여러모로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물론 아직도 장애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 남편이 장애인이고 아빠가 장애인이지만, 현실은 가족 모두가 장애인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 여건이지만, 앞으로 장애인시설들이, 복지시설들이 더 좋아지고 현실적으로 많이 개선되어 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