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대화 - 경험의 한계가 글의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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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
개인적으로 가진 몇 가지 습관 중 하나는, 틈만 나면 지도책을 펼쳐놓고 여기저기를 살피는 일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부터 시작해서, 가본 적 없는 머나먼 지역까지 두루 둘러봅니다. 길 따라 시선을 옮기며 주변 건물들 위치를 익히기도 하고, 각각의 국도 갈림길이 어딘지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을 붙잡고 있다가 내리는 결론은 늘 똑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정말 넓고 크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는 것이죠. 정말 평생 돌아다녀도 이 많은 도시들을 구석구석 다 가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국립공원과 도립공원 중에 어느 정도나 직접체험이 가능할까요? 그 많은 해수욕장과 관광지 중 과연 몇 군데나 제 발길이 닿게 될지 장담할 방법도 없습니다.
마음이나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조금 더 찬찬히 둘러봤을 텐데, 일이라는 게 뭔지 항상 목적만 달성하면 되돌아오기 바쁩니다. 단순한 예로 경남 창원의 ‘누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왕복 730km가 넘는 길을 떠난 김에 그 곳의 명소와 주변을 감상하듯 경험했더라면 저한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겁니다. 지역 특산물을 살펴보고 여러 맛집도 방문하면서, 그 도시의 많은 면들을 바라봤다면 저의 견문은 훨씬 넓어졌겠죠.
그런데도 쓸데없이 마음만 급해서, ‘누구’를 만나 대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결국 업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날 하루의 대부분은 고속도로의 지루한 풍경을 낮밤으로 바라본 게 거의 전부였다는 얘기가 되겠죠.
‘여름휴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지리산 중턱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봤던 건 지리산 전체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 광대한 지역에 펼쳐진 지리산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는데, 제가 머문 곳은 계곡 몇 군데와 관광지로 알려진 두어 군데가 전부였으니까요. 그나마 수박 겉핥기라도 했으니 ‘지리산에 갔다 왔다’는 말이라도 하지만, 꼭 가보고 싶은 전국 곳곳의 유명 사찰과 역사 유적지들은 언제 다 찾아갈 수 있을지 남몰래 답답해지곤 합니다. 틈만 나면 지도책을 펼쳐드는 버릇은 그런 과정 중에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 같네요.
2.
우리가 가봤던 곳은 보고 듣고 느꼈던 것 모두를 ‘나의 얘기’로 꺼내는 게 가능합니다.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죠. 반면에 글 또는 TV 화면으로 봤거나, 말로만 전해 들었던 지역은 세세하게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겠죠. 무언가를 통해 접하게 된 건 모두 간접체험일 뿐이니까요.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논할 수 있고, 여행이나 지역 방문도 해본 사람이 그 지역을 평가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과 같이 간접체험의 백 마디보다는, 직접체험의 한마디가 더 큰 무게감을 갖게 되겠죠. 이건 세상 모든 부분에 똑같이 적용될 사항인 겁니다.
색다른 예 한 가지를 들어볼까요? ‘밀리터리 룩’이라고 하는, 군복 스타일의 패션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창일 때는 길거리 젊은이들의 3분의 1 정도가 군복 비슷비슷한 옷과 소품들을 걸치고 다니기도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저는 이런 판단을 내렸던 바 있었습니다. ‘저 옷을 입은 사람들만큼이나,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증거’라고요. 왜냐? 정상적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이라면, 가장 입기 싫은 옷의 0순위가 바로 군복입니다. 꿈에서조차 떠올리기 싫은 게 군복을 다시 입는 행위인데 그걸 패션이라고, 유행이라는 이유로 굳이 입고 다닐 리는 없다는 결론이었죠.
회사 다니기가 정말 싫은 사람이 주말까지 정장 스타일로 돌아다닐 리는 없습니다. 학교 다니는 게 끔찍한 학생들이라면, 휴일에 교복 입고 외출할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이렇듯 복장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각과 직접체험이 일부분이나마 드러나게 됩니다.
불필요한 짐을 배낭에 잔뜩 집어넣는 건 등산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죠. 전문적인 여행의 경험이 많을수록 가방의 무게는 줄어듭니다. 초보자일수록 무조건 크고 값비싼 신제품부터 구입하려 발버둥치지만, 적당한 중고제품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건 전문가들입니다. 기나긴 직접체험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명확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얼마만큼 체험해야만 ‘직접체험’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위에 적어놓은 내용을 보면 직접체험만 중요하고 간접체험은 별 필요도 없다는 식 같은데, 그런 이분법이 정말 맞는 걸까요? 그건 물론 아닙니다.
이 글의 원래 제목을 ‘직접체험만큼의 간접체험을 생활화하세요.’라고 준비했듯이, 저는 오히려 무(無)체험보다는 간접체험이라도 다양하게 겪어보는 게 좋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글 순서를 정했던 겁니다. 직접체험이 가장 확실하다는 건 부연설명도 필요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 눈으로 봤기에 아는 만큼 보이고, 직접 경험했던 만큼 생생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건 인간사(事) 모든 부분에 다 적용됩니다.
인천 앞바다만 봤던 사람이 부산 앞바다의 장관을 설명한다는 건 사실성이 떨어지겠죠. 인천 앞바다를 봤다는 건 직접체험이지만, 부산 앞바다의 풍경을 말한다는 건 방송이나 사진 등을 통한 간접체험이 분명할 테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 중요한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를 직접 봤다는 체험이 있기 때문에, 부산 앞바다의 모습을 사진만으로도 연상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다’라는 대상을 아예 몰랐다면, 바다 자체를 논한다는 건 모든 게 상상의 수준으로 머물게 되죠. 대신 ‘하나’를 분명히 알기에 ‘둘’을 유추하며 얘기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직접체험만큼의 간접체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직접체험이 간접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거, 그건 개인적 경험이 생각의 폭을 그만큼 넓힌다는 뜻과 같게 됩니다.
3.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나’를 표현하는 게 가능해지듯, 스스로 경험한 게 있어야 세상 일부분이라도 묘사하는 것 또한 가능해집니다. 모든 걸 다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건 필요가 없습니다. 간접적인 것도 아닌 어설픈 경험 몇 가지보다는, 차라리 직접적인 경험 하나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는 법이니까요.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가급적 직접체험의 현장으로 나가는 게 물론 가장 좋겠지만, 그런 상황이 안 된다면 인터넷이든 신문이든 방송이든 월간지든 뭐든 간에, 간접적인 체험과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 간의 대화나 독서의 필요성은 이럴 때 특히 강조돼야 할 사항이겠죠.
글의 한계는 경험의 한계입니다. 아프리카를 갔다 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제가 만약 어느 기고의 글 안에 아프리카의 장단점을 직접 확인했다는 듯 구구절절 떠든다는 건 일종의 사기행각이 될 겁니다. 대신 아프리카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 나름의 연구를 한 뒤에 글을 적는다면, 그건 간접경험을 진지하게 반복한 뒤 내린 결론이니까 가치 있는 내용이 되겠죠. 마찬가지로 간접경험이 쌓이다 보면, 직접경험으로 향하는 길이 보다 가깝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늘 기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직접경험은 ‘엘리베이터’가 되겠지만, 간접경험은 ‘계단으로 천천히 오르기’ 정도의 속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며 직접적인 소통과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경험만큼의 간접경험을 쌓아야 하고 그 결론이 자신의 철학과 이론적 논리로 남겨져야 합니다. 스스로 문 밖으로 나가 최초로 찍은 바닥의 발자국 하나, 그 영상은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경험의 발자국은 그렇게 하나씩 찍고 쌓아가며,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인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일입니다. 경험은 ‘인생의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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