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났다
본문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말로 표현하십시오.”
난 이 문구가 계속 불편하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물론 여기서‘ 말’이란 입으로 하는 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시민들에게 투표참여를 촉구하는 홍보 플래카드의 문구는 또한 “투표로 말하십시오”였다. 여기서 하는‘ 말’이란 주인으로서 주어진 권리인 투표권 행사로 진정 시민이 원하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표현하라는 뜻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불편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누군가는 그 문구를 보며 소외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어쩌면 말을 할 수 없는 누군가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문구일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이는 ‘수화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가 느낀 불편함은 무엇일까를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내내 편하지 않는 마음으로 선거 기간이 끝났다.
많은 홍보문구에서 또는 구호에서 그리고 캠페인에서, 여러 문장들 안에서‘ 보다’,‘ 서다’,‘ 걷다’,‘ 말하다’,‘ 듣다’ 등등 쓰이는데, 이런 말을 사용할 때마다 점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한 번의 고려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나의 생각이 지나친 것이라고 한다면, 딱히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어느 덧 6.2지방선거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놓은 캠페인 문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져 가는데, 나는 아직 정신 줄을 못 잡고 있다.
문득 어려서 자주 느꼈던 기분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애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하는 대신에 성장하면서 조금씩 어머니를 도와 가사 일을 했었다. 나 같은 중증장애여성이 과연 가사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겠지만 앉아서 하는 일은 많았다.
야채 다듬는 것은 기본이고, 빨래 정리, 다리미질, 동생들 공부와 과제물 챙기는 것, 집안 구석구석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그래서 뭔가를 찾아야 할 때 내 이름이 불려졌다. 그 외의 소소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느라 바쁜 일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거나, 항상 난 심심하겠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러 일을 하고 있음에도.
특히 어머니가 맏며느리였기에 집안의 경조사를 나는 함께 준비해야 했다.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제사와 명절, 집안 어른들의 생신, 어르신들을 모시는 예절, 계절에 따라 담그는 장과 김장, 친척들의 경조사 챙기는 것, 이러한 일들을 준비하고 행사 진행을 도왔다.
어떤 행사이든지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제사 며칠 전부터 시장 봐야 할 것들을 계획하고, 경비는 얼마나 드는지, 어떤 물건부터 사들이고, 미리 저장해야 할 것과 당일 사야만 신선한 것들을 구분해서 어머니께 그때마다 챙기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채소와 양념을 미리 다듬고 준비하는 것도, 지짐을 부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어머니가 제수 그릇을 씻어 주시면 하나씩 닦아 쌓아놓는다.
사용하기 편하게 그리고 행사에 오실 어른들께 며칠 전에 연락을 드리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제사를 지내는 당일 날,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대가족이다. 많은 어른들이 한마디씩만 말씀해도 정신없는데,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고, 싸우고, 울고, 이 순간에는 다른 생각할 틈도 없다. 그런중에도 어른들은 어김없이 내 머리 쓰다듬으며(내 나이가 들어도) 혀를 차고 한숨을 쉬신다. 그리고 조심스레 돌아서서 치마를 올리시고, 속바지 고쟁이 깊은 주머니에서 자손들에게 받아 꼬깃꼬깃 접어두신 지폐 몇 장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셔서 짭짤한 수입도 생겼다.
매 행사 때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제사를 지내고, 음식 차리고, 어른들을 모시고 식사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느 때는 애들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하고, 애들 싸움이 어른싸움이 되어 언성들이 높아지기도 하고, 오랜 세월 묵켜두었던 갈등이 터지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평생 원수가 될 것처럼 누군가는 많이 아프고, 남자들은 술 마신 핑계로 싸움판도 벌이고…
그런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면서도 그래도 또 보고 또 만나면서 늙어가고 이해하고 순응하며 그렇게 사랑도 하고 안쓰러워하면서 보내는 경조사를 수 없이 치러냈다.
어머니와 나는 늘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에 집을 돌아보며 한숨을 짓곤 했다. 어수선히 널려있는 것들을 어디서부터 어떤 순서로 정리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었다.
나는 지금이 마치 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돌아보며 한숨을 돌리던 그때 느낌과 같다. 그때는 그 막막하던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랜 경험으로 아시고 능숙하게 처리하시던 어머니가 계셨다.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물건들을 깨끗이 닦고 제자리에 잘 정리해둬야 다음에 쓸 수
있다는 것,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아껴서 두고 먹어야 할 것은 잘 보관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문제와 갈등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후속작업까지 마무리하시던 어머니의 노력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그 다음 행사에도 모일 수 있었고 일 년에 몇 차례나 있는 이런 행사들을 계속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잔치 끝난 후의 그 어수선한 느낌 한가운데 놓여있는데 해결해줄 어머니가 없다.
지난달 5월 20일부터 시작 된‘ 2010 6.2지방선거’가 6월 2일 끝날때까지 마음이 분주했다. 나는 아직 초보정치인이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무거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 빠뜨리는 것은 없는지, 막막하기도 하고 생각이 복잡했다.
그러나 선거라는 기간은 정치인에게는 가장 힘들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고 평가 받
는다는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한다. 그래서 선거는 정치에서 축제의 시간인 것 같다.
축제는 즐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기획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고 그리고 장(場)을 벌이는 것이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담론이 있고, 헌신이 있고, 다양한 삶들이 있고,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그리고 자본이 작동하는 현장이다.
가진 것보다 부족한 것이 더 많은 소수정당이 할 수 있는 것은 반MB 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잡기, 거기에 멀리 보는 기획까지 더하려니 논의와 논의가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출마후보 발굴부터 진보정당다운 정책구상까지 많은 것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겪고 있던 소수자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정치 안에서도 여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소수정당으로서 무엇을 해도 권력에 긴장을 주지 않고 존재는 무시되며 여기 있긴 있는
데 여기 없는 외로운 외침이 되는 것이다. 우리 정당의 존재를 어떻게 하면 알릴 것인가, 그리고 우리 정당도 대안정당으로 가능하다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또 고민하면서 내가 예전에 그렇게 몸부림쳤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나는‘ 누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하게 되었다.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고 두려움이 줄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방법이 선거 기간에는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정치를 하는 정당이 선거 기간에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생존이 위태롭기 때문이란다(아직 정당의 생리를 충분히 알지는 못해서 누가 그렇다고 하니까 반론은 못하지만 정말 그럴까 싶
다).
하여튼 이번 선거의 거대한 반MB 물결은 정책 없는 선거를 만들었다. 시민의 삶을 계획하는 정책이 부재한 선거가 과연 이 사회에서 약자들이 살아갈 수 있게 무엇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너무나 거대한 명분으로 출마한 후보들에 대한 검증도, 정책에 대한 검증도 되지 않고 진행되었던 선거이기에 가슴이 부글거려서 더욱 피로를 느꼈다.
당내에서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지만, 중요하게 놓쳐서 안 되는 것이 전체 출마자의 5% 장애인 할당제였다. 장애인 후보 발굴이 그만큼 되겠느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장애인 정치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가 되었다.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장애인 후보 발굴을 위한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각 지역위원
회에서 장애인 할당제를 지키려는 의지가 그렇게 높지 않았고, 벌칙을 받지 않으려고 급조하여 사람은 세워도 지원이 없기 일쑤였다.
여성정치에도 30% 할당제가 있어 여성정치인이 확대되긴 하지만 과연 이것이 맞는가 하는 고민이 있듯 장애인 할당제도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할당제를 지키려고 정치적인 전망도, 고민도 없는 사람, 자기 정체성도 없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장애인이라고, 여성이라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정책에 대해 고민 없는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비례후보가 되어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이 사람들이 가진 영향력이 장애인의, 여성의 대표성을 가지게 되면서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할당제조차 없다면, 철저한 조직력과 권력과 자본의 조화로 구성되어 있는 정치현장에 여성이나 장애인 또는 다른 계층은 접근조차 못 할 것이다.
할당제라는 적극적 정치 접근권을 만들려면 정당들이 당내에서 예비후보들을 미리 발굴하고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어쩌면 꿈같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할당제를 하기 위한 지원구상을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정당이 다양한 계층의 인재들을 얼마나 확보하고 공감되는 정책들을 생산해내고 미래 비전을 끌어낼 수 있느냐가 진보정당들의 생존이 아닐까. 기존의 권력체계의 답습에서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당내에서 할당제를 지키고 나니 또 고민은 선거 기간에 비례후보의 역할이었다.
시, 도, 구, 군, 비례 출마 후보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다른 정당 비례후보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어떤 이는 할 일 없다고 하고 어떤 이는 명함을 열심히 돌린단다. 또 어떤 이는 당에서 인사하라는 곳에 가 인사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때, 비례대표 후보로서 전국을 다니며 지역 출마 후보들 지원유세를 하고, 명함을 열심히 돌렸고, 인사도 열심히 다녔다. 비례후보는 당에서 정해주는 일정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지역에서 비례후보를 부르지를 않았다.
물론 지역 현황을 잘 모르는 비례후보를 굳이 부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비례후보란 당의 전략 추천이기 때문에 꼭 어떤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 지지를 받기 위해서 활용되어져야 한다면 당에서 전략적 계획 아래 활동해야 맞을 텐데 그러한 모습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장애인 비례후보들은 어디서 오라 하지 않아도 혼자서 활동보조와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열심히 전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청주에서, 서울 강동에서 장애인 비례후보들은 휠체어로 언덕길을 넘으며 때론 언어장애로 말 한마디 없이 명함을 내밀며 열심히 다녔다.
어눌한 언어로 자기 이름을 말하면 시간이 걸려 안 들어줄 것 같아 넓은 판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적어 활동보조에게 들게 하고 인사를 열심히 하는 장애여성의 모습이 겸손하고 진정성 있어 보여서 참 좋았다.
이른 아침 남편과 나가서 유세하고 집에 돌어와 밥을 먹고, 또 활동보조와 나가서 유세하고,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등지고 놀이방에서 네 살짜리 아들을 전동휠체어 옆에 세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녀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이번 선거 출마도 재미있어요.
당선 안 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요. 일단 열심히 해 볼래요.”
그녀의 환한 미소에서 즐거운 선거를 발견했다.
복잡한 여러 가지 고민들에 머리만 아파하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나도 마음이 가벼워져 남
은 선거 기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그녀 같은 장애여성의 정치입문이 이후 진보정치 재구성에 좋은 자리매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역시 어떤 일에서든지 좋은 인재의 발굴은 항상 중요하다.
놓치지 말아야할 성과이다.
반면 당내 기초단체장 후보들의 홍보물에 점자 홍보물을 꼭 하도록 챙기자던 선거전 계획은 선거 막바지라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다. 진보신당 장애인위원회는 당내 지방선거 출마자를 상대로 장애인지교육을 하여 유세기간에 장애에 대한 용어사용에 실수가 없도록 하자는 계
획도 있었으나 여러 다양한 상황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우선 장애인위원회의 준비 부족도 있었고 후보 교육까지 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열악한 현실도 있지만 중요한 가치기준에서 제외된 측면도 있었다.
장애인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진보주의자, 진보정당인, 인권지수, 감수성, 민감성, 이러한 단어로 말한다는 것, 이러한 범위에 있다는 사람들에게 우선순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젠 식상하다.
아직도 나는 선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갑자기 길에서 무슨 관광 나이트 광고판을 달고 음악소리를 크게 내며 달리는 차들을 보면 뭔가 익숙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 많던 후보들이 형형색색으로 온갖 문구로 장식하고 외치고 또 외치던 말, 말, 말. 지금도 귓전에 왕왕 울린다.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호소하는 말들에 냉소적이던 시민들의 발걸음. 그리고 표정들. 어느덧 여기저기 사거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가장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던 후보들의 얼굴이 새겨진 플래카드들이 이젠 사라지고 없다(간간이 당선사례와 낙선 사례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많은 약속을 하던 후보들이 당선되고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심정이 다른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될 텐데 하는 때 이른 걱정도 해본다. 우리 어머니는 잔치가 끝나면 꼭 왔던 사람 중에 마음에 걸리던 사람을 생각하고 혼잣말처럼 걱정하시던 것과 같이 어느덧 나도 어머니처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집안에서 잔치가 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지시하시는 것만 하면 되었다. 살아가면서 어머니가 시키는 것만 할 때가 제일 편할 때라는 것을 더욱 실감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알아서 계획하고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것이 된다.
이번 선거는 지방선거로는 처음 해보는 것이고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지도부로서 책임 있는 자세로 당을 위해서라면’이란 마음 하나로 감히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언제나 집안행사가 한 차례 끝나면 과로로 입술이 부풀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머니로서는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맏며느리라는 책임이 최선을 다하면 기본이고, 조금만 문제 있으면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선거라는 잔치는 끝났다.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어수선하고 정신없을 만큼 어질러졌다. 잔치는 늘 많은 갈등과 문제를 남긴다. 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잘 정리해놓지 않으면 다음 잔치를 치러낼 수 없다. 여기저기 구하고 찾느라 지칠 것이기 때문이다. 잔치는 벌이기보다는 뒷정리가 깨끗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설거지 하나라도 거들어 준다면 정리가 쉽다.
단 차근차근히 경험자의 지도를 인정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 넣는 것이다. 정리가 다 끝나면 차를 마시며 함께 했다는 기쁨의 자리까지 잊지 말자.
그립다. 어머니와 나는 제사 이튿날부터 남은 나물이 상하기 전에 해치우려고 매 끼니 때마다 고추장에 비벼 먹어야 했고, 마무리는 남은 나물과 지짐과 몇 가지를 김치찌개에 몽땅 넣어 잡탕으로 끓여 먹어야했다.
그때는 지겨웠다. 학교 다니는 동생들은 안 먹고, 집에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공동책임으로 먹어야 했던 그 음식, 요즘 그 잡탕의 구수함이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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