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환 씨는 이제 양복 스웨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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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자신만의 소중한 옷이 있다. 누구나 입으면 왠지 스스로가 멋져 보이는 옷이 있다. 2016년 사회의 공분을 샀던 타이어 수리점 노예, 일명 ‘타이어 노예’였던 성환 씨에게도 드디어 그런 스웨그 넘치는 옷이 생긴 모양이다. 그에게 그 옷은 어떤 의미일지, 사건 이후 현재까지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스웨그(Swag)는 ‘약탈품’ 혹은 ‘전리품’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대중문화, 특히 힙합에서 재해석돼 현재는 본능적인 자유로움이나 자신감, 자기 과시 등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출처 : 다음백과)
“집에서 여의도는 아홉 칸(정거장)”
성환(가명. 40대 중반) 씨의 두 번째 인터뷰가 있던 날은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던 금요일이었다. 그의 직장이 여의도이고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가 있는 이룸센터를 곧잘 찾아왔기에 인터뷰 장소를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그곳으로 잡았는데 예정보다 그가 좀 늦겠다고 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조금 뒤 모습을 비춘 성환 씨는 그야말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출근할 때 비가 오지 않아 우산을 준비해가지 않았다고 했다. 역 근처에서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라도 마시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룸센터를 나왔는데 반사적으로 여의도 쪽으로 방향을 트는 그를 보며 그제야 기자는 아차 싶었다. 성환 씨가 직장 소재지인 여의도에서 이룸센터가 있는 국회의사당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지하철이 무료이기 때문에 차비를 아끼려는 심산도 아니었다. 그가 거주하는 그룹홈의 소재지도 5호선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5호선 타는 훈련만 잘 돼 있었고 그간 숱하게 이룸센터를 방문하면서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구간을 9호선이 아닌 보행으로 다다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토록 비에 홀딱 젖은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2016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애인학대피해 사례가 있었다. 표제마다 ‘타이어 노예’라는 타이틀이 붙은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피해 당사자인 지적장애인 성환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개로 2008년 해당 타이어 수리점으로 가게 됐고, 근 10년 동안 타이어 수리점 사장 부부로부터 노동착취, 폭행에 기초생활수급비, 장애수당 등을 갈취 당해왔다.
당시를 기억하는 기자에게 다른 어떤 기사보다 충격적으로 남은 잔상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속에는 ‘인간제조기’, ‘거짓말정신봉’이라 명명하는 무시무시한 농기구 자루와 막대가 있었다. 글씨체는 유난히 반듯해 그 비인간적인 흉기가 더욱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기자는 그렇게 안타까움과 아이러니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성환 씨와 만난 이후 난 그 흉기에 잔혹함 외에 정체모를 쓸쓸함을 느낀다. 한글을 모르는 성환 씨가 지하철 노선에서 ‘국회의사당’, ‘여의도’를 마치 하나의 상형문자처럼 인지하듯이 그 흉기들의 이름까지 그렇게 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양복? 편하니까!”
성환 씨는 ‘싸나이’다. 사나이가 아닌 싸나이가 걸맞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양복’으로 점철되는 싸나이라고 볼 수 있다. 태풍이 상륙한 날임에도 예정했던 인터뷰를 미룰 수 없었던 이유는 다시 약속을 잡기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유별난 양복 사랑의 연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 후 기자는 그를 잘 아는 활동가로부터 그의 양복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본론은 이렇다. 성환 씨가 그룹홈 식구들과 제주도에 이어 중국 여행을 했는데 매번 그의 여행 복장은 늘 단벌의 양복이었다. 그는 그렇게 양복을 입은 채자전거로 우도를 한 바퀴 돌았고, 중국에서도 취침 때 빼고는 양복을 장착했다. 그렇다고 그 양복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위기거주홈 입소 당시 근무했던 실장이 입소자들에게 양복은 한 벌 씩 장만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고, 그렇게 그는 그 유일무이한 양복을 마련하게 됐다. 그 뒤로 그는 근무할 때 빼고는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 늘 양복을 입는다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형사소송으로 청주 법원을 몇 차례 출석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예외 없이 양복 차림이었다. 함께했던 위기거주홈의 담당 간사가 법원 정문 앞에서 양복에 선글라스 차림인 성환 씨를 사진에 담았던 모양인데 해당 사진은 두고두고 위기거주홈에서 “도대체 누가 검사냐”는 우스갯소리로 회자됐다고 한다.
그래서 애지중지하는 양복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묻고자 했는데 성환 씨는 싱겁게 “편하니까!”로 일축한다. 그래서 우도를 자전거로 한 바퀴나 돌기에는 양복이 편하지 않았을 거라고 좀 더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러자 딴전을 부리던 성환 씨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어떻게 그것까지 알았어?”라며 실없이 웃고는 그래도 어김없이 “편하니까!”이다. 그러더니 그룹 젝키 콘서트에도 양복을 입고 갔다 왔다며 2주 뒤로 예정된 그룹홈의 부산 여행에도 양복을 입을 거라고 한 술 더 뜬다. 그래서 기자도 조금 짓궂었던 질문의 의도를 밝혔다. 사실 아저씨가(성환 씨)가 양복이 굉장히 잘 어울리신다고 말이다. 사실 양복을 좋아하는 게 무리가 아닐 만큼 그는 양복 맵시가 좋다.
“밥은 내가 해. 아무도 할 줄 모르니까”
“(유년기에) 유리창 네 개 다섯 개 깼을걸. 깨부수고. 숨고. 시골에서 벌집 건드려서 숨고. 몇 명 친구들 쏘이고. 숨어있으면 쏘이는 거야. 말벌 말고 그냥 벌집. (웃음) 중학교 때는 기억이 많지. 엄마 아빠 다 살아계셨고. 엄마 중학교 때 졸업하고 며칠 뒤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현재) 납골당에 계시고. 형은 (납골당에) 가는데 나는 못 가. 거리가 멀어서. 형은 아버지 사진을 못 찾아. 나는 딱 보면 아는데.”
성환 씨는 유년기를 회상하며 웃음을 보였다. 그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사건 당시 형 부부와 연락이 닿았으나 현재는 명절이나 휴일에 가끔 만나는 정도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본인의 자립의사 확인 후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가 사회복지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위기거주홈을 거쳐 현재 그는 교남재단에서 운영하는 그룹홈에서 생활하고 있다. 해당 그룹홈에는 성환 씨를 포함 4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막내가 어떤 이유인지 성환 씨에게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모양이다.
“밥은 내가 해. 아무도 할 줄 모르니까. 차려주면 먹지. 여기서도(위기거주홈) 가끔 했었어. 캠핑 가서는 청국장도 했었어. 애들 먹이고, 잘 먹으면 좋고. 두 명은 괜찮은데 한명은 혼자만 먹어. (그 동생이) 마음에 안 들어. 잘 먹으면 좋은데 한 녀석은 말도 안하는 걸. 맛있다는 말도 없어. (사진을 보여주며) 김치전 내가한 거야. 김치 썰어서 밀가루 풀어서. 애들은 뒤집는 것도 못해. 알려주면 뭐해. 실천해야 하는데 안 해.”
첫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성환 씨는 함께 사는 그 막내에 대한 서운한 속내를 내비췄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오해가 생길 법하다. 막내 동생 격인 입소자가 자폐성향이 있는데 성환 씨로서는 처음 그런 장애 유형의 당사자를 만난 셈이었다. 게다가 신체적 정신적 학대 피해가 컸기 때문인지 성환 씨 본인도 처음에 언행이 다소 과격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성환 씨는 심리적 외상에 대한 심리치료가 8회기에 걸쳐 진행 중이다.
“아프냐고? 나는 안 다쳐”
성환 씨는 양복 외에도 약간의 ‘허세’(?)로 점철되는 싸나이다. 그것에 대한 증언은 한 둘이 아니다. 본인이 만든 음식에 자신만만하지만 정작 간이 잘 안 맞는다는 소문도 횡행하고 있다. 그렇게 떠보자 성환 씨는 “나는 만들기만 해. 그래도 잘들 먹어”라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태풍으로 비를 홀딱 맞고 온 날은 다행히도 양복 차림은 아니었다. 차를 마시고 그에게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구간을 전철로 이용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동행했다. 그는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해도 괜찮다며 손사래 치더니 입구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노란 우비를 주어서는 집까지 방편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양손이 우비에 일회용 컵에 어수선했는데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다 그는 결국 접질려 주저앉았다. 아플 법도 한데 그는 한사코 아니라며 “안 아파. 나는 안 다쳐”라고 연신 대꾸했다.
허세의 비화는 그가 곧 잘 들르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쐐기를 박았다. 그가 언젠가 연구소에 들렀을 때 마침 한 간사가 우체국에 갈 참이었던 모양이다. 성환 씨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자기가 대신 가주겠다며 양 손에 잔뜩 우편물을 가지고 떠났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다. 결국 간사들이 찾으러 나섰는데 그는 우체국 근처가 아닌 엉뚱한 데서 목격됐다. 그리고 그는 간사들을 마주치자 우편물을 감추며 당황해하더니 길을 잃었냐는 걱정에 “아냐. 나 운동 했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음식 간도 안 맞으면서 터무니없이 당당하고, 길을 잃고도 운동했다고 발뺌하는 그이지만 사실 그래서 더 정감이 가기도 한다. 성환 씨는 현재 한 레스토랑에서 주방보조 일을 하는데 재계약 과정은 순탄했다고 한다. 장명훈 간사는 그가 일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하고 성실하다고 전했다. “일을 워낙 열심히 해서 말릴 정도에요. 밀리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새벽부터 나가시죠. 설거지 쌓인 것을 못 보고 미리미리 하는 성격인데… 강박은 아닌 것 같고, 가끔은 그 일을 좋아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다고 돈 더 안준다고 말려도 그러세요.”
현재 학대 가해자에 대한 형사소송이 진행 중이며 성환 씨는 고대하던 임대아파트 순번을 받아 대기 중에 있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인 소망인 좋은 인연을 만나기 위한 공약을 내 걸기도 했다. “난 (결혼하면) 설거지 안 시킬 거야. 요리 안 시킬 거야. 빨래도 내가 하고. (손에) 물 안 묻히게 할 거야. 청소도 하고 다 할 거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다 버리고. 힘든 것은 시키기 싫어. 아무튼 내가 다 할 거야.”
“스트라이크도 잘 쳐!”
장명훈 간사는 성환 씨가 2년 사이에 딴 사람이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되게 거칠고 사회성도 낮으셨어요. 눈도 안 마주치고 외면하고 딴 데 보고 그러셨는데 이제 안 그러세요.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는데 느린 거 같지만 정말 빠르게 성환 씨가 변하고 있어요. 사람이 안정된 환경, 위협받지 않는 환경에 있으면 저렇게 천천히나마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환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장애인 볼링 모임에 가는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스트라이크를 잘 쳐, (볼링을) 12시간 칠 때도 있고 10시간 칠 때도 있어”라며 자신만만한데 그건 아무래도 기자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취미인 볼링이 화제에 오른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들떠 보인다.
여의도 일대는 그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특히 학대피해자지원센터가 있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자주 방문하는데 장 간사는 그 부분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두었다. “앞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연구소에 가실 거예요. 예전과 다르게 문제가 있으면 호소할 곳이 생기신 게 어쩌면 자립 과정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싶어요.”
성환 씨는 싸나이답게 단답형으로 일관했고, 초면임에도 기자에게 불쑥 말을 놓았다. 그러다보니 그 자리가 더 편하기도 했고 인터뷰 역시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단벌의 양복과 약간의 허세로 점철된 싸나이 성환 씨의 인생이 앞으로도 스웨그 넘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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