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으로 장사하던 한 사이비 목사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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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장애인들이 오갈 데가 없어 골방에만 갇혀 있던 시절. 종교의 탈을 쓴 무슨 무슨 장애인 공동체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숭고한 공동체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열악한 미인가 수용시설이었다. 오갈 데 없는 장애인을 수 명 내지 수십 명을 시설에 수용한 후에 사이비 목사가 장애인을 내세워 장사했던 것이다.
“불쌍한 장애인들을 데리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전국에 있는 교회에 무차별 배포했다. 목사가 직접 종교시설을 찾아다니며 눈물로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공동체에 있는 장애인들이 굶고 있다”는 사이비 목사 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너도나도 지갑을 열어 기부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후원금이 시설로, 정확하게는 사이비 목사 계좌에 쌓였다.
당연히 사이비 목사는 그 후원금을 장애인을 위해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개인 집과 땅을 사고 유흥을 즐기는 데 악용했다. 장애인들을 시켜 전단을 전국에 한 번씩 우편 발송할 때마다 후원금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넘쳐났다.
막대한 후원금이 시설에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된 한 자원봉사자가 목사에게 물었단다. “돈이 많이 들어오는데 왜 시설에 제대로 된 수세식 화장실 하나 없습니까?” 그랬더니 목사 왈 “이렇게 없이 살아야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지. 그래서 화장실 만들 돈이 있지만 일부러 안 만드는 거야”라고 대답했단다.
넘쳐나는 후원금으로 잘나가던 미인가 시설 중한 곳에서 사달이 났다. 영광스럽게도 이 시설은 방송을 비롯한 언론을 통해 시설 이름을 교회를 넘어 전 국민에게 알렸다. 양상이 달랐던 건 시설 이름은 널리 알렸지만 이번에는 후원금 대신 쇠고랑이 사이비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충남 천안의 김 아무개 사이비 목사, 그는 한 번도 어려운데 십 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두 번이나 같은 죄목으로 감옥에 갔다. 경찰 조사 기록을 보면 범죄 행위가 어마무시하다.
‘피의자는 성환 영락교회 사무실에서 피의자가 위탁보호하고 있는 우수족마비 장애인 피해자 이00(여, 당시 21세)을 목사라는 신분의 지위를 이용해 그곳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입에 키스하고 (중략) 피의자와의 성관계를 외부 사람에게 발설하였다는 이유로 직경 약 3센티미터, 길이 약 50센티미터의 나무막대와 주먹과 발로 그녀의 얼굴과 어깨 팔, 허벅지, 양발바닥 등 전신을 수십 회 구타하여서 그로 인하여 그녀에게 요치 약 4주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후두부 타박상 및 내출혈 등의 상해를 가한자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는 자임.’
하지만 지옥 같은 곳에도 착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 당시 평택에 살던 주부 이 아무개 씨, 한 종교방송에서 하루 밥 세 끼 먹을 것을 한 끼를 줄여 우표와 편지지를 사서 자기들처럼 불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영락교회 소개의 말을 듣고 영락교회를 찾아 돕기 시작했다. 6월 어느 날 교회를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던 이 씨를 피해자 은희(가명)양이 불렀다.
“저 아주머니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아빠한테 전화하려고 그러는데 돈이 없어요. 아주머니 돈 가진 것 있으면 조금만 주실래요?”
“가지고 있는 돈이 3천 원 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괜찮으면 줄게.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아빠한테 전화하려고 그러니?”
“목사님이 막 때렸어요. 옷도 벗기고….”
다음 날 그이는 김 목사를 만나서 따졌다.
“목사님 이 일이 사실이라면 회개하셔야겠습니다.”
김 목사는 정색하며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그이는 의심이 들었지만 자신이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어서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막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은희가 헐레벌떡 달려 나오더니 "아줌마 나 오늘도 이렇게 매 맞았어요 아줌마 가고 나면 나 또 매 맞을 거예요. 또 매 맞으면 난 이제 살 수 없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사정하며 그를 붙잡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그이는 김 목사에게 가서 사정했다.
“은희가 매를 맞고 공포심에 떨고 있으니까 집에 데려가서 이삼일 안정을 취하게 한 후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김 목사는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모았는데 네가 마음대로 데려가느냐. 안 돼!”
당시 경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 목사에게 폭행 및 성폭행을 당한 장애인은 모두 7명이었다. 또 김 목사가 86년 11월 5일 빚 2천5백만 원을 얻어 시작한 장애인 사업은 3년이 지난 후 빚을 모두 청산한 것은 물론 드러난 재산만 해도 5백여 평의 밭과 3천5백만 원 상당의 개인 주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탁월한 장사 수완을 발휘했음이 드러났다.
이쯤에서 기자가 등장한다. 당시 워낙 유명했던 사건이어서 현장 확인이 필수였다. 찾았을 당시 교회는 일반 신도 없이 스물세 명의 장애인만 수용하고 있었다. 김 목사의 부인이라는 사람이 대문께에서 출입을 막아섰다. 잠시 후 운 좋게도 골목길에서 나들이 나온 한 원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전한 원생들의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예배를 드리고 식사와 청소를 하고 난 후 여자들은 주로 빨래를 하고 남자들은 인접해 있는 밭에 나가 김장채소, 가지, 고추 등을 심고 가꾸는 밭일을 한다. 점심 먹고 또 일을 하고 오후 일곱 시쯤 다시 예배를 보고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당시 기자는 김 목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천안 경찰서를 찾아갔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김 목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범죄사실을 인정하나?”
“나한테 지금 중요한 것은 범죄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내가 데리고 있는 장애인들의 안부다.”
“피해자를 때리고 성폭행한 사실을 부인하는 건가?”
“그 애는 과대망상증이 있는 아이다. 더 이상 대답하기 싫다. 지금 점심을 먹어야 되니까 내가 나간 뒤에 다시 보자.”
김 목사는 기자에게 벌컥 화를 냈고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당시에는 그나마 법의 심판이 준엄해서 사이비김 목사는 감옥에 갔고 시설은 해체됐다. 그때 워낙 유명했던 이 사건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장애인을 상품으로 내세워 장사하고 장애인 인권을 유린하는 미인가 시설 비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미인가 시설 비리 사건은 엮인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뱉어졌다. 천안 사이비 목사 사건은 그 서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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