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석 아저씨의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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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 최초의 통장은? 내역에 적힌 나의 최초의 수입은? 그 돈으로 했던 최초의 지출은? 개인적으로 그 때를 기념하는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아 애석하지만 그렇게 통장에 수입과 지출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가는 동안 ‘고르는 재미’, 그리고 받는 기쁨 보다 더 큰 ‘주는 기쁨’에 대해 알게 됐다. 경북지역 축사 학대 피해 장애인 영석 아저씨, 그는 결국 시설을 선택했지만 이번 여정에는 그 기쁨들이 함께할지 모르겠다.
영석 아저씨의 가출
지적장애인 영석(가명. 63세) 아저씨의 사례는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의 애초 목표에 어긋났으니 어쩌면 실패한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출까지 불사하고 가해자에게 돌아가겠다는 주장에 센터도 결국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영석 아저씨의 가출 사건은 위기거주홈에서 생활하시던 영석 아저씨가 홀로 산책을 나갔다 갑자기 행적이 묘연해지며 시작됐다. 영석 아저씨는 그렇게 혼자 천안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아저씨가 위기거주홈의 전화를 피하는 통에 쉼터는 쑥대밭이 됐고, 경찰 측에 요청을 해 아저씨의 동선을 확인했다. 쉼터는 곧 아저씨를 모시러 내려갔다.
“같이 산 사람은 가족이여”
경북에 소재한 주민센터에 고령의 지적장애인이 축사에 더부살이처럼 살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그리고 사건을 인계한 경북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와 경북장애인권익옹호기관 등은 축사의 컨테이너박스에서 방치된 삶을 살던 영석 아저씨를 발견했다. 그가 살던 허름한 컨테이너박스는 양계장 및 창고로도 겸용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현재 농장주의 돌아가신 부친이 그곳을 꾸려갈 때도 영석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니 최소 20년 이상 그곳에 기거했다고 볼 수 있다.
발견된 아저씨는 치아도 다 상해 있었고, 이렇다 할 옷도 없었다. 장애등록조차 안 돼 있었으니 주민 센터의 관심 대상도 아니었다. 오랜 기간 무임금으로 농장과 축사 일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됐으나 아저씨는 시종일관 그 일가를 고소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의지는 굉장히 강력하고 일관됐다.
이로 인해 아저씨를 지원하는 기관들은 정식 수사절차를 진행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렇게 위기거주홈에 입소해 치과 치료와 자립 지원을 받는 과정 중에 있던 아저씨는 언제부터인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어느 날무작정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 가출을 계기로 센터는 영석 아저씨의 집요한 의지에 손을 들었다. 고소는 취하됐고, 아저씨는 치과 치료를 마치고 그곳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대신 아저씨가 줄곧 가족이라 명명했던 가해자 측은 고소취하의 조건으로 1년간의 유예기간 동안 영석 아저씨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으며, 수급비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경북센터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씩 그를 만나 사례지원을 한다.
하지만 위기거주홈 측은 이후에도 수차례 서울에서 자립하시기를 권하기도, 혹시나 가해자 측의 강요가 없었는지 확인하기도 했는데 늘 소심해보였던 아저씨가 그것에만은 완강하게 선을 그었다. “가족은 처벌할 수 없고, 같이 산 사람은 가족이여.” 영석 아저씨는 그렇게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았다.
영석 아저씨가 기거했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은 오랫동안 의지할 곳 없이 지내왔던 그에게 가해자가 있는 그곳이 유일하게 애착관계가 형성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결정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학대피해장애인들의 선택지가 넓어질 수 있도록, 지역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방향과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육만 오천 원”
영석 아저씨가 어느 날 부터인가 달라졌다. 늘 시선을 땅에 두고 고개를 수그린 채 다녔던 아저씨가 허리가 꼿꼿해지신 거 같다. 어쩐지 발음도 명확해지셨다 했더니 오랜 치료 끝에 틀니를 맞추셨단다. 그러고 보니 10년은 젊어 보이고 신수도 훤해지셨다. 이제는 제대로 고기를 씹어 드실 수도 있다고 한다. 그 무렵은 고향에 내려간다는 기약을 받아낸 뒤였다. 장애등록을 함으로써 수급비를 모았고 그 전 단계인 자신의 통장이 개설됐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 최초일지 모를 쇼핑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어느 날 그는 담당 간사에게 라디오 구매 의사를 밝혔고, 대형 마트에서 손수 마음에 드는 라디오를 구입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뒤 그 날 처음 기자는 아저씨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아저씨는 창 너머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어둑한 방에 머리만 내놓은 채 등을 보이고 누워 계셨다. 등 뒤로 덩그러니 서있는 하얗고 투박하게 생긴 네모난 라디오에서는 알 수없는 선율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라디오 사셨어요?” 물었는데 딱히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저씨, 라디오 좋아 보여요. 얼마주고 사셨어요?”라고 묻자 그제야 그는 반응했다. 무덤덤하게 그러나 큰 소리로 “육만 오천 원.”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 때가 기자의 기억으로 아저씨와 처음 말문을 텄던 순간이었다.
“안 뎌! 못 줘”
당장이라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아저씨를 설득한 끝에 머물 집을 짓는 1년의 유예기간 동안 그는 경북지역의 한 시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담당 간사와 그 시설을 함께 둘러보고 난 뒤 심경의 변화를 보이셨다. 그간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차례 그 집에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고, 여행지에서는 풍경 사진을 찍어 보내줄 정도로 그가 명명한 가족에 대한 각별한 정을 보이셨는데 경북에서 머물 시설을 둘러보고 온 뒤 그 집에 가지 않고 계속 시설에 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셨다. 아저씨에게 그 연유를 묻자 안가겠다는 말씀만 반복하고 말뿐이다. 담당 간사의 추측처럼 위기거주홈이 문을 닫는다는 말에 내심 불안을 느끼면서 손수 끼니를 해서 먹을 자신은 없었다던 아저씨가 고향에서 가깝고 사방 지리에 훤한 경북지역으로 돌아가고서야 마음이 놓였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가셔서 서울이 그리울 경우 이곳에서 자립하겠다는 다짐도 받아두었다.
10월의 가을, 아저씨는 경북에서 머물 시설에 내려가실 준비로 분주했다. 장롱 속에 가지런하게 걸어 둔 직접 구입한 옷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영수증을 붙인 가계부 들춰보며 그간의 소비를 복기하기도 했다. 다행히 한글을 읽을 줄 아신다. 그 영수증 중에는 그가 수급비를 아껴가면서도 위기거주홈 식구들을 위해 양손에 들고 온 빵과 과일, 과자의 내역도 있다. 어느 날은 쉼터에 치킨 두 마리를 사들고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쉼터에서 아저씨는 돈을 아끼면서도 쓸 때 쓸 줄 아는 대인배로 통한다.
그런 아저씨에게 기자는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 건들거리며(?) 틀니와 라디오의 두 가지 선택지를 주고 둘 중에 하나를 작별의 기념으로 주실 수 있는지, 혹은 저렴하게 파실 수 있는지 틈만 나면 조금 짓궂은 요청을 했다. 대인배라던 아저씨도 그 부탁에는 시종일관 “안 뎌(돼)! 못 줘!”라고 퇴짜를 놓고, “안 뎌(돼)! 내 돈으로 샀어. 내 거여”, “공짜는 없어. 돈을 줘야지”, 심지어 “기자가 도대체 왜 그려”라며 어이없는지 웃기도 하신다. 거절의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틀니까지 하시니 목청까지 쩌렁쩌렁하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퇴짜가 들을수록 반갑고 좋으니 말이다.
2018년 3월부터 시작했던 <학대피해장애인, 그 후>가 이번 달로 연재를 마감합니다. 그간 만났던 총 열한 분의 기사와 후일담 등 더 많은 이야기와 그림이 담긴 스토리북(제목 미정)이 내년 1월에 출간됩니다. 스토리북은 장애인 유관기관 등에 무료로 배포될 예정이며, 그밖에 원하시는 분들 중 선정을 거쳐 배송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학대피해장애인, 그 후>에 애정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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