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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타살

[르포] 한 쪽방촌 사람의 죽음과 어떤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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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지난 1월 27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살던 최성우 씨. 동사무소(주민센터)에서 자활로 일을 하다 갑작스럽게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지만 살아나지 못했다. 부검을 통해 밝혀진 건 심근경색. 2007년 용산구에서 클린사업 표창장을
받은 노동자였지만, 자활근로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갑자기 심장이 멈춘 사람들

같은 날 저녁 수원에서는, 사흘 앞서 심장마비로 고인이 된 수원시 신동지구 철거민대책위원회 정대영 씨를 추모하는 문화제를 연다고 했다. 정대영 씨는 지난해 ‘용산’ 남일당 망루에 올랐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6월에 살던 집이 강제철거 되어 그동안 철거민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지냈다는데 쓰러지기 사흘 전에 철거 계고장을 받았다고 한다. 모두 3월 31일까지 신동에서 떠나라는 거다.

최성우 씨와 정대영 씨. 한 사람은 월 15만 원 돈을 내고 좁디좁은 쪽방을 얻어 살았고, 한 사람은 살던 집을 강제철거 당해 철거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살아야했다.

50대 초반인 두 사람이 며칠을 사이에 두고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다. 그이들 심장을 멈추게 한 건 대체 무얼까. 갑작스런 병사가 아니라 오랜 타살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얼굴 모르는 두 사람, 찾아갈까 말까 망설이다 가지 못했는데 마음속에 안타까움이 작게 일었다.

방, 한 사람이 살다간 자취

참 우연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난 1월에 두 번 찾아갔던 쪽방 건물에 살던 사람이었다. 세 번째 찾아 간 날이 최성우 씨가 살던 쪽방 유품을 정리하는 날이었다. 2월 1일 낮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자물쇠로 잠긴 방문을 쪽방 이웃들이 열쇠로 열었다.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살림들이 거기 있었다. 낡은 나무 방문, 문 안쪽에 거울을 붙여놓았다. 방에 거울을 걸어놓을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니 그게 지혜다. 청테이프로 네 모서리를 꼼꼼하게 붙여놓았다. 크기가 좀 더 작은 거울이 1호 방에도 붙어있다.

방 들머리, 2ℓ생수병 세 개에 물이 조금씩 남아있다. 생전에 방주인은 이 물병을 들고 언덕 아래 골목에 있는 ‘동자동 사랑방’(쪽방 주민을 위한 동자동SOS센터) 정수기에서 물을 길어먹었다 한다. 물이 든 병을 들고 맞은편 맨 끝에 있는 세면실로 갔다. 시멘트 바닥 수챗구멍에 대고 그 물을 버렸다. 층마다 방이 12개,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설거지를 하는 곳. 44년 동안 오로지 찬물만 나오는 곳. 그동안 수챗구멍으로 흘러내려간 물에는 간간이 누군가 흘린 눈물도 섞였으리라.

작은 비키니옷장이라도 놓아둘 만한 공간이 안 되는 쪽방이라 옷이 모두 벽에 걸렸다. 박아둔 못에 세탁소 비닐이 씌워진 검은 양복, 셔츠, 점퍼, 통이 큰 바지, 반바지 ……,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입을 옷들이 겹겹이 걸렸다. 그렇다고 어수선하거나 너저분하지는 않다. 오히려 딱 필요한 옷들로 깔끔하다. 방에 매달아 놓은 빨랫줄에는 빈 옷걸이들이 많다. 양말이든 속옷이든 겉옷이든 빨래를 하면 죄다 방에서 말려야 하니 요모조모 쓸모가 많았을 게다.

방에는 담요가 깔려있다. 한 사람 누우면 딱 맞을 자리다. 노숙 당사자모임인 ‘한울타리’ 동료들과 교육을 받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고인이 몸집이 크다. 불편하고 좁은 자리였겠다. 몸집이 작은 사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방에 놓인 모든 사물을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그토록 좁다, 쪽방은. 쪽방에 사는 다른 이의 말처럼 “찬 땅바닥에서 자는 것만 피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도…….

이부자리가 펴진 자리 위로 넓은 선반이 벽 중간에 달렸다. 좁은 방을 넓힐 길이 없으니 공중에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벽지를 바른 선반 위에는 개킨 이불 몇 채와 하얀색 플라스틱 서랍장이 하나 올라가 있다.

쪽방 건물에는 부엌이 없다.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방들이 늘어서 있고, 세면실이 하나, 계단 올라오는 길에 재래식 화장실이 두 개씩 있다. 부엌이 없으니 음식을 만드는 것도 방안에서 해야 한다. 선반 자리 맞은편 벽에 걸어놓은 검은색 철제선반에는 그릇, 유리컵, 플라스틱 반찬통, 빨간색 플라스틱 채반, 쟁반, 프라이팬이 있다.

선반에 고리를 달아 주걱이며 칼, 가위, 강판, 뒤집개처럼 부엌살림들을 걸어놓았다. 나무로 만든 도마와 주전자, 양은솥 모두 크다. 방은 좁지만 주인을 닮은 살림들이 크다. 혼자 사는 몸, 사먹고 말지 할지 모르지만, 여기 사는 이들은 돈이 넉넉지 않다.

대부분이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받는 돈에서 방값을 제하고 나면 맘 놓고 어디 움직일 교통비도 넉넉지 않다. 그렇다고 만들어 먹는 것도 아주 싼 건 아니다. 혼자 먹든 여럿이 먹든 양이 적다뿐이지, 음식을 하는 데에 들어가야 할 건 별 다르지 않으니. 이 좁은 방에서 저 도구들을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일은 돈을 아끼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조물조물 삶을 무치고, 알맞게 삶을 뜸 들이고, 자기를 키우는 일이지 않을까.

어떻게 그렇게 딱 맞게 놨을까 싶게 나무로 만든 낮은 서랍장과 냉장고가 방 한 면에 자리를 잡았다. 서랍장 위에는 작은 물건을 담아두기 알맞은 플라스틱 서랍장이 하나 더 있다. 그 안에 양말이며 팬티, 수건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양말은 잘 개어 양말목으로 감쌌고, 팬티는 똑같은 크기로 돌돌돌 말아 어디 비어져 나온 데 없이 마무리를 야무지게 해놓았다. 대충 손길 간 게 없다. 팬티도 수건도 삶은 것처럼 깨끗하다.

살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을 거라 짐작한다. 두 번 접고 끝, 하는 나는 저렇게 옷을 개어 본 일이 없다. 정성스럽게 챙겨놓은 속옷과 양말, 벽에 걸린 구김 없이 깔끔한 옷들, 문 밖 벽에 달아놓은 선반에 놓인 깨끗한 검은 구두 ……. 이 방 주인은 외출할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먼젓번에 다른 쪽방 건물에 들렀을 때 좁은 통로에서 마주쳐 살짝 비껴서면서 인사를 했던 한 남자가 떠오른다. 오후 5시 무렵, 일찍 일을 마치고 왔는지, 일거리가 없어서 다른 일을 보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낯선 사람이 건네는 인사에 모른 척 하지 않고 고개 끄덕이던 남자는 매무새가 정갈했다. 좋은 옷이나 신발로가 아니었다. 사람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지닌 존재다.

방 맨 안쪽(‘맨’이라는 낱말을 붙이고 나니 한참 저쪽처럼 느껴지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 앞에 서서 봐도 냉장고는 바로 눈앞에 있다)에 자리한 냉장고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20㎏ 쌀 한 부대와 아직 뜯지 않은, 비닐에 담겨 종이상자에 포장된 김장김치가 있다. 손잡이 달린 크고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는 빨래 가루비누가 반쯤 남았다.

올리브유 새 거 한 통과 쓰다 남은 식용유, 설거지용 물비누, 두루마리 휴지들, 곽 티슈들, 검은색 새 양말들, 비닐가방에 들어있는 야외용 깔개, 김밥 마는 발 …….

쪽방에 사는 한울타리 동료가 김발을 보며 “이런 것도 있다”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김발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일이 없는 듯하다. 어느 날, 한울타리에서 경기도 의왕에 마련했다는 텃밭에 갈 때 김밥을 말아갈 꿈을 꾸었는지. 천 원 주면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는 흔한 김밥이라지만, 직접 재료를 마련해 김밥을 싸는 일은 때로는 의식 같고, 아스라한 기억 속 배고픔과 아픔을 쓰다듬는 일 같기도 하다.

낡은 텔레비전, 검정비닐로 싸 놓은 전기난로, 선풍기, 휴대용 가스레인지, 일회용 부탄가스 몇 줄, 흰색 전기주전자 ……. 빨간 전기밥통에 불이 들어와 있다. 뚜껑을 여니 한 숟가락도 푸지 않은 밥이 한 가득이다. 닷새 전 아침에 해 두고 나갔을 밥. 밥을 해 두고 늦어 못 먹고 출근했을까, 퇴근해 집에 오면 바로 먹으려고 미리 해두었을까.

배고픈 날, 외로운 날, 서러운 날, 우울한 날, 화난 날, 시무룩한 날, 속상한 날, 그이에게도 밥이 약이었을까. 그날 저녁에는 이웃한 친구들을 불러다 함께 밥을 먹으려 그리 많이 했을까, 며칠 밥을 미리 해 두었을까. 끝내 저 밥을 못 먹고 놔두고 가버린 사람.

살림을 하나하나 들어내니, 벽에 세워놓은 파란색 플라스틱 상자(이삿짐센터에서 주로 쓰는) 하나와 분해된 행거가 나온다. 다가구 임대매입주택으로 이사하면 쓰려고 했던 물건들이다. 정부에서 실행하는 ‘쪽방·비닐하우스 거주가구 지원대책’으로 좀 더 넓고 깨끗하고 안전한 방, 모르는 이들과 함께 방 하나씩 나누어 살더라도(다가구 임대매입주택은 방이 세 개 있는 집이라면 방 하나에 한 사람씩 모두 세 사람을 들인다. 한 사람이 방 세 개를 모두 쓰려면 그만큼에 해당하는 보증금과 임차료를 내야 한다.) ‘집’을 꿈꾸었을 텐데. 이삿짐을 쌀 때 쓰려고 얻어다 놓은 플라스틱 상자도, 이사 가면 방에 놓으려고 얻어다 놓은 행거도 이제 다른 주인을 찾아야 한다.

쪽방 이웃들이 배낭 두 개와 옷가지들, 살림살이들을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담는다. 망치와 공구들도 따로 챙긴다. 살림살이들은 쪽방 이웃주민들 중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거고, 배낭과 옷가지들은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에게 건네줄 거다. 밖으로 빼내지 않은 서랍장이나 철제 선반, 냉장고는 방을 찾아 이곳으로 올 사람에게 남겨둔다.

2007이라는 숫자가 적힌 다이어리에는 아무 흔적이 없다. 노숙하면서, 쪽방에서 5년을 살면서 할 말도 많았으련만 고인은 모두 가슴에 꼭 안고 갔나보다. 글자로 남기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누어질 이 살림살이들은 그 마음을 다 알 거다.

노숙을 할 때는 가질 수 없었던 살림살이들, 내 밥그릇, 내 수저, 내 컵, 내 이부자리……, 무심코 살아도 어찌 각별하지 않았겠는가.

3층 8호실 문을 닫는다.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이, 나는 모르나 때로는 고단하고 괴롭고 때로는 기쁘고 설레며 살았을 방문을 닫는다. 방문을 열기 전과 마찬가지로 쪽방 이웃이 자물쇠로 잠근다.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새 사람이 오면 다시 이 방문을 열겠지.

여인숙보다는 쪽방이 훨씬 싸다고 하니 금방 사람이 찰 거다. 3층 8호실 방이 비었다는 소식은 벌써 알려졌을 테니. 한 사람이 남긴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15분. 20ℓ쓰레기봉투 두 장에 헐겁게 채워진 것들도 가버린 이에겐 쓸 만했던 것들이었으리라.

어떤 권리

동자동 쪽방 골목을 등지고 걸어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서울역 11번 들머리로 가니 계단 중간 너른 공간에 한 사람이 침낭 속에 파묻혀 누워있다. 고치를 틀고 잠자는 애벌레처럼. 침낭 옆에는 운동화 두 짝이 나란히. 아까 여길 지나 쪽방에 갈 때도 저랬는데 몇 시간 계속 똑같은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자는 건지, 어쩐 건지 흔들어 봐야 하는 걸까. 그 사람 앞에 멈춰 있다가, 설마 별일이야 있겠는가, 속으로 혼잣말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못가 되돌아갔다. 동자동 사랑방에 전화를 해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볼까, 내 갈 길로 가다 다시 되돌아오기를 몇 차례. 마침 지하철 경찰대 사무실이 보여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경찰 두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몇 시간째 사람이 자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들렀다고 하니, 자기들이 잘 아는 사람이고 아까 확인해 봤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따가 다시 가보겠다며. 그 말에 나는 조금 불편했던 마음을 얍삽하게 내려놓는다.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 쪽방에서 사는 사람들, 철거되어 집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오른 방값에 더 싼 집을 찾아 살던 곳에서 밀려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 그 처지가 서로 다르지 않다. 당장 겉으로 사는 모습은 다르게 보여도 ‘주거’가 ‘주택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 사회에서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은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나도 거기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몇 해 전, 저 멀리 있는 가난한 마을에서 적어 온 ‘권리’가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바호플로레스라는 지역에 볼리비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동자동처럼 쪽방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주거환경이 열악하다.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집, 짓다가만 집들이 많다. 학교를 마치고 온 아이들이 낮 동안 공부방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는데 거기에 ‘어린이 권리’가 적힌 판이 하나 걸려 있다. 어린이 권리라지만 어른에게도 마땅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권리
추위를 느낄 때 따뜻한 옷을 입을 권리
장난감을 가질 수 있고, 웃고 즐길 수 있는 권리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아름다운 순간을 나눌 수 있는 권리
부모한테 사랑받을 권리
학교에 가고 좋은 것을 배울 권리
좋은 취급을 받고, 추악한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권리
상처를 받고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
신을 믿고, 나한테 부족하고 필요한 것을 간청할 수 있는 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권리


아무도 맛있는 음식을 비싸거나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읽지는 않을 거다. 따뜻한 옷을 유명한 상표가 달린 옷이라 잘못 읽지 않을 거다. 수수해 보이는 저 권리를 누리는 일이 참 어렵다. 저 열한 가지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누구나 안전한 곳에서 주거할 권리는 아무래도 기본이겠다.

강제철거 된 집, 그만 머물고 떠나라는 계고장, 안전하지 않으며 생활하기에 열악한 주거환경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계속 강요된다면, 오늘도 어디서 누군가 심장이 멈출 거다. 그건 갑작스런 병사가 아니라 오랜 타살이다.

작성자박수정 (르포작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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