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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평가 고민들

‘용산참사’와 1년의 싸움 (1)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연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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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355일의 용산을, 그리고 ‘용산’과 함께 했던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왠지 머뭇거려져. 용산참사는 우리에게 어떤 상자 같은 게 아니었나 싶어. 열어보고 싶지만 열고 싶지 않은, 들여다보면 마음에 회오리가 치지만 한편으로는 참 많은 기억들을 찬찬히 보여주기도 하는 상자. 1년 동안 단 하루의 싸움을 해왔던 것 같은 지금, 내일의 싸움을, 정말, 시작해야 하는 때인 듯해. 쉽지 않지만 ‘용산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또 우리는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살펴봐야 할 때인 것 같아.

‘용산참사’는 어떤 사건이었을까

‘용산참사’가 있던 날, 급하게 상황실이 꾸려진 철도웨딩홀과 참사 현장을 오가며 회의와 집회를 하다가 밤늦게 사무실에 들어왔어. 급하게 기사를 썼지.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말해야 했으니까. ‘국가가 / 개발에 저항하는 / 사람을 죽였다.’ 건설자본과 조합이 일방적으로 철거민들의 삶을 파괴해 들어왔고, 철거민들은 망루를 쌓아 저항했고, 국가는 건설자본과 조합의 편에서 “진압 대상자”의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압해 결국 여섯 명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거지. 이 사건은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었어.

국가에 의한 살인이 전혀 새로운 사건이지는 않아. 87년 민주화항쟁을 촉발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나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사건과 같은 ‘과거’가 2009년 1월 우리 앞에 재현된 거야. 그런데 그 사건의 구조적 배경이 된 개발의 폭력성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 더욱 문제가 될 것이었지. 이명박 정권 들어 더욱 심각해진 개발주의와 건설경기부양정책은 우리 모두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고, 개발과 관련된 법과 제도들은 삶을 지켜낼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었어.

경찰력을 동원한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은 ‘법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이런 사건의 성격이 우리들의 싸움의 과제이기도 했고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어. “사람이 죽었다”에 모아지는 사람들의 애도와 공분을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의 의미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싸움을 풀어나가는 것 말이야.

용산참사 직후 ‘진상 규명’의 어려움과 1년의 싸움

참사 발생 직후 용산범대위(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와 진상조사단이 꾸려졌어. 사건 초기에는 ‘진상 규명’이 화두가 됐지. 진상조사단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만들고 확산시키려고 고민했어. 하지만 ‘진상 규명’이라는 말은 “그때 망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관심이 쏠리는 걸 막을 수 없었어. 검찰이 발화 원인을 밝혀내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잡고 언론이 이 관점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진상 규명’의 의미는 축소됐고 사건의 전체적인 성격이나 맥락을 드러내기 어려워졌어.

이런 조건은 인화물질을 다량 쌓아놓고 있었던 철거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지. 특히 경찰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검찰이 ‘팩트(사실)’들을 발표하면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동안, 국회의원이나 기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수되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진상조사단은 늘 한 발 늦게 발표하며 여론 형성의 주도권을 잃어 갔지.

참사 직후 사람들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원인이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았어. 그리고 경찰의 ‘무리함’을 확인하고 싶어 했지. 그렇지만 발화 원인이나 경찰의 ‘무리함’에 관심이 쏠리는 만큼 이 사건을 바라볼 사회적 프레임을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 이런 시간들을 거치며 검찰이 최종적으로 철거민들에게 발화 책임을 돌리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초기 단계는 끝났던 것 같아. 이제 재판 대응으로 넘어가게 된 거지.

‘진상 규명’과 동시에 ‘개발’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어. 진상조사단도 용산4구역 개발 문제와 한국사회 개발정책의 문제를 드러내려 애썼고, 일부 기자들도 재개발 과정에서의 커넥션이나 건설자본 개입의 물증 등을 잡기 위해 애썼지. 조직적으로는 용산범대위 안팎으로 빈민대책회의를 구성하면서 개발과 관련된 대응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려고 했어. 그러나 개발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막막했던 것 같아. 누구에게나 있는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 정권의 개발 드라이브, 건설자본의 강력한 영향력 등 거대한 아우라를 어디에서부터 뚫고 나갈 수 있을지 막막했지.

게다가 싸울 준비도 충분하지 못했어.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개발과정에서 상가세입자들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책적 접근도 별로 없었고, 철거민조직들 사이의 분화와 갈등이 거대한 기세를 만들어가는 데에 발목을 잡기도 했지. 그렇다 보니 ‘이렇게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일방적으로 사람을 내쫓는 개발은 나쁘다’는 이야기 이상을 하기는 어려웠어. 어느 순간 빈민대책회의도 흐지부지됐고.

참사 후 두어 달이 흐르면서 싸움은 다소 지지부진해지는 듯했어. 모든 집회와 추모제가 경찰의 물리력 앞에 속수무책 금지당하고 정부는 꿈쩍도 않고. 이때 싸움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천주교 사제단들의 결합과 ‘레아’였어. 사제단은 매일 저녁 미사를 올리며, 끝도 보이지 않고 가닥도 잡히지 않던 싸움을, 끝까지(끝이 어디일지 모르더라도) 할 수 있는 안정감을 줬어.

‘레아’는 남일당의 추모 공간과는 다른 거점이 되어, 추모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 최후의 보루인 거점이기보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생산지인 거점. 이때 검찰의 수사기록 미공개도 유리한 영향을 미쳤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검찰이 꿇리는 게 있으니까 공개하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사건의 성격이자 실체’를 사회적으로 알려내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 기획은 부족했던 것 같아.

용산국민법정은 부족하나마, 이 사건을 마주한 한국사회에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아. 용산참사를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한 개발 이야기를 인권의 프레임으로 말하려고 했지. 싸움의 지형을 바꾸거나 새로운 프레임을 구성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철거민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으로 국가폭력을, 구조적 원인으로 개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얘기할 수 있는 자리는 됐던 것 같아. 조금 더 적절한 시기에 용산국민법정을 띄우면서 싸움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단 하루와도 같은 1년의 싸움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1년을 싸워왔어. 누구도 1월 20일의 하루를 닫을 수가 없었지. 그 안에 담긴 355일의 숱한 시간들은 힘겨웠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연대의 시간들이기도 했어. 한 해 동안 지난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지치기도 하지만 도저히 놓을 수는 없었던 싸움을, 그러니까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뭘까.

눈에 띄는 몇 가지가 일단 있어. 천주교 사제들의 결합이나 문화예술계의 활발한 활동, 미디어운동의 등장. 문화예술인들의 행동은 단지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창작, 문화 활동을 통해 정서적 공감대를 계속 만들어내고 감수성의 끈을 놓지 않도록 사람들을 독려했어. 이렇게 만들어진 ‘용산’의 아우라는 당장 눈에 띄는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았더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끌어온 힘이 됐어.

물론 이런 활동은 문화예술‘계’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몸짓이 모두 포함된 거지. 그리고 레아. 초기에 남일당 현장과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으로 거점이 나뉘어져 이도저도 약간은 애매했던 상황에서, 남일당과 레아를 중심으로 현장의 공간적 거점이 마련된 건 큰 힘이 됐어. 몇 년 전과 비교하더라도 달라진 미디어운동의 역할도 컸어. 이 사건이 대중들에게 쉽게 잊혀질 수 없었던 것 자체가 현장의 생중계 영상이었다는 것부터, 운동의 변화된 조건이 아닌가 싶어.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건, 이 싸움이 기존에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만으로 이어져오지 않았다는 거야. 오히려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은 크지 않았어. 이 싸움은 ‘결집된’ 힘보다, 흩어진 채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힘들로 지탱되었던 것 같아. 2008년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대중의 역동이 용산참사를 둘러싼 싸움에서 이어졌던 것 같아. 물론 촛불 그대로도 아니고 그렇게 ‘흥분’된 분위기로 ‘거대하게’ 모여들지도 않았지. 다만, 조직된 대중에 의한 싸움을 넘어 조직해가는 대중들의 싸움이 만들어졌던 것 아닐까 싶어. 이건 뒤집어보면 조직된 대중운동이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지. 노동자들이, 농민들이, 여성들이, 분명히 모여들었지만 ‘조직된’ 형태로 모여들지는 않았다는 것, 여기에서 앞으로의 운동을 위해 고민해야 할 거리가 하나 생기는 것 같아.

이 모든 시간을 버텨온 용산범대위도 빼놓을 수 없지. 안팎의 수많은 갈등들 속에서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게 이 싸움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 됐어. 영향력 있는 ‘지도력’은 갖추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싸움의 분명한 ‘구심점’이 된 거지. 물론 범대위의 활동에도 아쉬움은 조금 남아. 참사 초기에 애도의 자리를 충분히 펼치지 못한 듯도 하고, 초기의 집회와 촛불문화제 중심의 일정들도 아쉽지. 유가족의 이미지가 가부장을 잃은 것으로만 재현된다거나 싸움이나 언어가 경직되어 아쉬울 때도 있었어.

누구보다 유족들과 용산4구역의 세입자들이 이 싸움을 온몸으로 살아낸 이들이라는 점은 굳이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지. 삶이 곧 싸움의 현장이었으니. 그리고 이들이 용산범대위와, 용산으로 모여든 사람들과 만나면서 엮어낸 공감과 연대의 네트워크가 바로 작년 한 해 싸움 그 자체였을 거야.

작성자미류, 유성, 민선, 은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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