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아니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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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개월간 우리와 함께했던 당사자 한 분이 위기거주홈을 떠나 지역에 있는 자립생활주택으로 가게 됐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께서는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 당사자의 앞으로의 삶과 지역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축복하고 응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 한 방울
부처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물 한 방울을 마르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물 한 방울은 쉽게 깨어지고 흩어지는 연약한 존재. 풀잎에 맺힌 새벽녘의 이슬조차 아침에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는 게 물 한 방울이 아니던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제자에게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바다로 보내면 된다네. 물 한 방울의 수명은 짧고 유한하지만 바다와 물 한 방울이 만난다면 드넓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다의 일부가 된다네.”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의 차이는 이와 같은 지혜에서 오는 것인가.
새벽녘 이슬
2017년 10월 자정이 한참 넘은 새벽 시간, 고요한내 방의 정적을 깨는 핸드폰 알림 소리에 잠이 깼다. 생활시설에서 학대를 당한 당사자(이하 키위)가 늦은 시간 한 활동가와 동행해 위기거주홈으로 입소했다는 야간 당직자의 공유였다. ‘아이구… 아무리 급해도 당사자분들 주무시고 계셨는데 잠 다 깨웠겠네. 그분들 한번 놀라면 다시 주무시기 힘드신데 야간 근무자 죽을 맛이겠네’라고 웅얼거리며 그대로 자리에서 돌아누웠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처음 만난 키위는 휠체어에 앉아 내게 어색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전 내내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근무자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는 등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고등학교 재학 중인 미성년자. 이동 시 휠체어가 반드시 필요한 뇌병변장애인. 현재 활동보조인 부재. 알코올 중독자인 부친에게 상습적으로 학대받아 장애인 생활시설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곳에서 또 한 번 상처를 받고 낯선 이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경계심. 새벽에 급작스럽게 나타난, 그야말로 새벽녘 이슬 같았다.
나는 파티가 싫어요
키위가 입소한 10월 말경, 위기거주홈에서는 처음으로 지역 내에 보금자리를 얻어 떠나는 분들을 축하하기 위한 작은 파티가 열렸다. 경사스러운 날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끝나고 야간 당직자인 나만 남고 다들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무섭고 싫다고(특히 직함 끝에 ‘장’자 들어가는 높아 보이는 사람들) 방에 들어가 숨어있던 키위가 기어서 거실로 나왔다.
“자는 거 아니었어?”
“풍선 다 터뜨려 버리고 싶어요. 풍선은 싫어요. 파티 분위기 싫어요.”
“응? 좋지도 않은 폐활량 가지고 하늘이 노래지도록 힘들게 불어서 터뜨리긴 아까운데 좀만 봐주면 안 될까? 부끄럽지만 내가 여기서 이뤄놓은 얼마 안 되는 맘에 드는 결과물이라고.”
이 당시 키위가 왜 파티가 싫고 풍선이 싫어 몽땅 터뜨려버리고 싶었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볼펜을 가져와 모조리 풍선을 터뜨린 후 말했다.
“다음에는 깃발 장식 같은, 그 메리크리스마스 같은 거 써져 있는 걸로 사다가 붙이련다.”
특이한 근무자
위기거주홈에 입소한 지 한 달 정도 흐르면 당사자들 마음에도 소소하나마 작은 안정이 생긴다. 그쯤 됐을까? 흡연하러 다른 분들이 나가셨을 무렵 과일 간식을 준비하며 평소 즐겨 시청하던 영상을 TV로 틀었는데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그걸 슬쩍 곁눈질한 키위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입소한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한참 동안 숨이 넘어가게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던 키위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장 간사님은 정말 특이한 거 같아요. 제가 본 시설 사람들은 겉으로만 친절하게 행동하고, 장황한 말투에 오히려 부담스러워요. 먹기 싫은데도 먹어보라며 억지로 권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실제로는 착하지도 않고 속으로는 자기 자랑할 거리, 욕심만 챙기면서.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하는 건가? 그 사람들 하여튼 맘에 안 들어요! 착하지도 않으면서.”
이전에 있던 곳 실무자들을 떠올리며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많이 높아졌다.
“억지로 권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호불호 너무 강한 사람에게 이것저것 권하는 건 경험상 나도 피곤하고 귀찮아.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쓸데없이 내 활력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거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그리고 내 말투는 원래 그래. 억지로 오글거리는 말투 쓰는 건 질색이야. 게다가 어렵고 장황한 말로 하면 지적장애인 당사자들이 이해하시기 힘들기도 하고.”
“하여튼 특이해요. 저를 도와주겠다는 분들 중에 간사님 같은 분은 처음 봤어요. 등만 밀어주면 혼자 씻겠다니까 진짜로 등만 쓱쓱 밀어주고 욕실에서 나가시더라고요. 간사님이 그렇다고 막 나가거나 못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자연스러운 거 같아요. 그래야 맞는 거 같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 왜 풍선이 싫고 파티가 싫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됐다. 착하지도 않은데 착한 척하는 이들에게 받은 상처와 아무 의미 없어 보이고 이벤트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사진을 찍고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참석자가 됐던 파티들, 혹은 거동이 불편한 장애를 안고 있다는 이유로 여행이나 소풍에서 배제됐던 여러 일들 때문에 키위는 상당히 소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마침 위기거주홈에서 자립 축하 파티가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간이 흐른 나중에 그때 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그래서 그런 게 맞다고 했다.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얼마 전까지 키위와 키위의 위기거주홈 사례담당 간사는 옆자리 근무자인 내가 봐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키위는 서울에 소재한 자립지원주택에 입주하기 원했지만 서울 소재에 인가된 생활시설에서 탈시설한 장애인만 입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키위는 타지역에서 탈시설했으므로 서울시 측에서는 입주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잘 해결됐다. 키위는 이제 새로운 생활을 꿈꾸고 있다. 공간상 어쩔 수 없이 공동생활을 해야 했던 위기거주홈과 달리 이제는 작게나마 어엿한 본인 전용의 생활공간이 생긴다.
“간사님, 이사 가면 제 방에다 장식해 놓을 멋진 원피스(일본 만화) 피규어를 사고 싶은데 결제 좀 도와줄 수 있나요?”
“비록 내 지갑을 털어서 하나 사주진 못해도 대신 결제는 해줄 수 있다.”
작별, 바다로 가면 되나니
얼마 전 키위가 찾아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쉼터 떠나는 거 아쉽지만 새로운 곳에 입주하면 축하 파티를 할 거예요. 간사님도 꼭 오셔야 돼요. 저랑 나중에도 연락하고, 만나서 가끔 식사도 하실 거죠?”
“너 저번에 파티 싫다며.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너 뭔가 심사가 배배 꼬여있었다고.”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고서 예전의 파티가 싫다고 풍선 터뜨리자고 짜증내던 일이 본인도 생각났는지 키위가 웃으며 잡아뗀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요즘에는 아주 능글맞아졌다. 약간 괘씸하긴 하지만 얼마 안 남은 그날이 온다면 주인공은 키위가 되리라.
지금 키위는 위기거주홈을 거쳐, 지역에 있는 자립지원주택을 거쳐 지역사회와 단절된 장애인 생활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내에 홀로 자립하여 살아가는 방향을 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고 항상 순탄한 일만 있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그래도 순풍이 부는 계절인 모양이다.
지금 물방울은 이제 막 연못을 벗어나 냇가로 간다. 비록 냇가의 물 흐르는 속도는 더딜지 모르나 냇가를 벗어나면 강에 도착할 것이고, 결국 강은 물방울을 바다로 안내할 것이다. 키위도 많은 이들의 노력과 도움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부처님이 제자에게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아니하려면 바다로 가면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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