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시청각장애인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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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운전석이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있고, 도로 위에 새겨진 한글이 아닌 언어를 보면서 일본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바다 바로 건너에 있는 나라 일본, 이곳 지바현에서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제1회 아시아 시청각장애인 컨퍼런스 겸 제27회 일본 전국 시청각장애인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 시청각장애인 5명이 통역 및 활동지원을 해줄 사람들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아시아 시청각장애인 컨퍼런스
이번 컨퍼런스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네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등 각 국가의 시청각장애인들이 참가했습니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되는데, 그것도 같은 장애유형인 시청각장애인들끼리 만난다는 사실이 큰 기대감을 안겨 줬습니다.
각 나라에는 시청각장애에 대한 지원이나 정책이 제대로 돼 있는지, 시청각장애인은 몇 명이 있고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등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시각과 청각 모두 장애가 있는 유형인만큼 다양한 국가의 시청각장애인이 교류한다면, 시청각장애인이 생활하기 좋은 팁을 배우고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컨퍼런스에서 각 나라 시청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청각장애인으로서 어렵고 힘든 삶에 대한 공감만 가득했습니다. 본인과 같은 시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분도 있었고, 시청각장애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국가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국가의 시청각장애인들과 교류하며 친구가 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싱가포르에서 온 프란시스입니다. 저와 같이 운동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척 호감이 가서 제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던 친구입니다. 축구와 마라톤, 웨이트 트레이닝을 좋아하는 저와 마라톤과 사이클, 수영을 좋아하는 프란시스 사이에는 마라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축구 등의 구기 종목이 어렵고 수영이나 사이클처럼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을 즐긴다고 합니다. 마라톤은 파트너와 밧줄 같은 것으로 서로 손목을 연결해 함께 달린다고 하는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달리자고 제가 제안했습니다. 저와 프란시스가 파트너가 되어서 말이죠.
프란시스와 제가 어떻게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니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또 시청각장애도 있습니다. 수어를 사용해도 저는 한국수어, 프란시스는 국제수어를 사용하기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위해 무려 4명이 옆에서 통역을 해줬습니다.
먼저 제가 한국어로 말하면, 일본어로 통역합니다. 그럼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통역하고, 영어를 국제수어로 프란시스에게 통역합니다. 프란시스는 상대방이 구사하는 수어를 손으로 만져서 이해하는 ‘촉수어’로 대화합니다.
반대로 프란시스가 국제수어를 하면 그와 촉수어로 대화하던 분이 영어로 그 뜻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일본어로 통역하고, 일본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합니다. 그 한국어를 제 옆에 있던 분이 한국수어로 통역해줍니다. 이때 저는 제 시력에 맞는 거리에서 수어를 구사하는 ‘근접수어’로 통역을 받았습니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대화하는 내내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처럼 ‘시청각장애인’이고, 저처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을, 그것도 ‘외국인’을 만났으니까요. 국제수어는 ‘Hi(안녕하세요)’, ‘Nice to meet you(만나서 반갑습니다)’, ‘I love you(사랑합니다)’ 같은 기본적인 것밖에 모르지만, 이것만이라도 활용해 직접 대화가 될 때는 너무 기뻤습니다.
대화 중에 프란시스가 가방에서 밧줄 비슷한 것을 꺼내 자기 왼쪽 손과 제 오른손을 연결해 자신이 러닝할 때 파트너와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마라톤에 나간다면 세계 최초 시청각장애인 ‘파트너’ 마라토너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요?
네팔의 시청각장애인 ‘푸스파’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습니다. 네팔 의상인지 항상 특이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다녔고, 역시 네팔의 문화인지 환영식 등에서 제공되는 소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푸스파와 처음 악수할 때,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손에 털이 가득했거든요. 심지어 새끼손가락에도 털이 풍성했습니다. 털이라고 하면 한가락 한다고 자부하는 저조차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것 역시 ‘다름’일 뿐이기에 유쾌하게 인사를 나누고 금방 친구가 됐습니다.
일본 전국 시청각장애인 대회
이번에 제가 참가한 일본 전국대회가 27회라는 사실이 증명하듯이, 일본은 시청각장애에 대한 정책과 지원이 잘돼있습니다. 시청각장애인 센터, 시청각장애인 협회 등 우리나라라면 너무나 생소할 수 있는 기관과 단체가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 있었습니다. 시청각장애인 당사자가 자립하고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니, 당사자로서 부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일본 시청각장애인을 통역하는 전문인력입니다. 점화, 근접수어, 촉수어, 문자통역 등시청각장애의 정도와 특성에 따라 선호하는 의사소통 및 통역방법에 특화된 인력이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활동지원사와는 별개로, 시청각장애인이 원활한 의사소통과 통역이 가능하도록 일본에서 맞춤형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통역을 지원하는 분 중에는 청각장애인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말할 때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힌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힌 다음 말을 시작합니다. 시청각장애인은 통역해주는 사람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통역을 받을 때 통역하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임의로 특정해서(예를 들면 학생, 남자, 여자 등) 통역을 해주는데, 일본에서는 발언자가 발언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국가 사람들도 자기 이름을 밝히고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시청각장애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기억할 수 있었고, 통역하는 사람도 막힘없이 편안하게 통역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저녁, 일본 시청각장애인들과 아시아 시청각장애인들이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아시아 시청각장애인들이 일본의 시청각장애인들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가 바로 저였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지진에 대한 시청각장애인의 대처 방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일본도 얼마 전 오사카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었죠. 일본이 시청각장애에 대한 지원과 제도적인 시스템이 잘돼 있는 만큼, 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 등이 매뉴얼화 돼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쉽게도 일본에서도 따로 매뉴얼로 돼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나라에서 먼저 아이디어를 내어 매뉴얼해 보자는 욕심 아닌 욕심도 가져봤습니다.
다른 시청각장애인들도 일본의 시청각장애인의 통역이나 활동지원을 위한 전문인력 양성과정, 시청각장애인의 직업과 자립 등에 대해 질문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사자들의 발언을 통역받으면서 일본에 대한 큰 부러움을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년 전 미국으로 ‘시청각장애인의 자립지원 교육’이라는 주제로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시청각장애인 헬렌 켈러로 유명한 미국은 그야말로 시청각장애인에게는 꿈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거주시설도 있고, 시청각장애인임을 알리는 시청각장애인(Deaf-Blind) 명찰까지 있으니까요. 그렇게 멀게만 느꼈던 미국 못지않게 시청각장애에 대한 체계가 잘된 나라가 바로 바다 건너에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기대되는 시청각장애인 네트워크
아시아 시청각장애인 컨퍼런스가 제1회였던 만큼, 앞으로 어떻게 지속해나갈지, 각 나라 시청각장애인들 간에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할지 등 네트워크에 대해 토론을 하며 컨퍼런스를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제1회라는 상징성보다 아시아의 다양한 시청각장애인들을 만나 친구가 됐다는 사실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특히 프란시스와 함께 국제 마라톤에 참가해보고 싶네요.
이번 컨퍼런스 겸 전국대회 참가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시청각장애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시청각장애인 관련 기관이나 단체가 세워지면 너무나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시청각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맛집’을 방문하고, 여행가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는 등 아주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조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집 안에만 있는 시청각장애인이 많습니다. 그들이 통역이나 활동지원을 받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의 한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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