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의 인권이야기] 이상한 냄새와 색다른 냄새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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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활동하는 인권운동사랑방 반차별 팀에서는 ‘별!똥!별’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우리 사회의 반차별 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고 있다. 최근에 여기에 노숙인(홈리스) 차별 문제를 다룬 글을 올렸다.
(관련글 http://blog.jinbo.net/banchabyul/?pid=37 )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전철에 딱 탔는데 한 쪽에 노숙인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냄새를 참기 힘들어서 다른 칸으로 간 적 있어요(보통 참으려고 노력함). 가면서도 이래도 될까 하는 마음과 찜찜함이 많이 들었는데,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참았어야 할까요?”
여기에 이런 저런 댓글이 달렸다. 주로 나온 이야기는 냄새에 대한 반응은 신체적인 것인가 심리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숙인 관련 기사들에서도 ‘퀴퀴한’과 같이 냄새와 관련된 수식어가 많이 등장한다.
언제부턴가 냄새, 정확히 말하면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지 않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면서 냄새는 어느덧 사람을 구분 짓고 ‘냄새나’, ‘더러워’처럼 외국인, 홈리스, 저소득층에 대한 차별의 상징적 표현이 되고 있다.
나도 가끔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맡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그 냄새는 ‘나쁜’ 것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외국인들이 우리들의 몸 내음에 익숙하지 않아 싫어하듯이 말이다.
서양에서 목욕이 일반화된 것이 200년도 안 된 일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냄새, 위생에 대한 생각은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냄새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익숙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 화장품 회사들은 이러한 것을 조장하며 성분은 같으면서 농도만 다른 수십 종의 화장품 세트를 팔고 있다. 우리는 점점 ‘기본적인 사람들이 지닌 냄새’를 넘어 ‘좋은 냄새’를 풍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 냄새는, 옷, 화장품 등에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된다. 결국 그러한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차별의 시선을 받게 된다. 외국인들, 특히 제3세계(?)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체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이상한 냄새와 색다른 냄새의 차이
언제부턴가 ‘저 사람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저 사람은 우리랑 다른 이상한 사람이야’와 동일시 되어버렸다. 하나의 도덕처럼 냄새에도 ‘올바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냄새는 차별과 배제의 기준으로 작동하여 ‘올바른 냄새’로 자신을 포장해야 하고 나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제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기에 그것이 차별 의식에서 나왔다고 여겨지기 보다는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차별 팀 블로그에 누군가 쓴 댓글처럼 ‘이러한 생각이 신체적인 것인지, 심리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으로 내면화되어버린 것이라 말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냄새’를 ‘색다른 냄새’로 달리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주변을 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2009년 12월 22일 노숙인 추모제가 서울역에서 열렸다. 이날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추모행사에 참여한 10여명을 연행해 갔다. 선긋기의 작동 방식을 뛰어넘으려면
여행을 하다보면 농촌 지역에서는 특유의 거름 냄새가 난다. 어촌 지역에서는 특유의 비린내가 난다. 하지만 그 냄새는 그 환경이 만들어낸 냄새로, 도시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냄새인 것이지 ‘올바르지 못한’ 냄새는 아니다. 홈리스 문제에 대해서도 그 냄새를 말하기 전에 그 환경을 먼저 말해야 한다. 지금도 3,000원짜리 다방이나 6,000~7,000원짜리 만화방에서 자는 홈리스들이 있다. 거리에서 지하보도에서 추위 속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옷을 빨고 널거나 몸을 씻을 안정적인 공간을 가질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다. 적절한 의료 행위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이 냄새에 묻어난다.
냄새가 이상한 것을 넘어 불결하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제대로 된 주거권과 건강권을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반인권적인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좋은 냄새’를 풍길 것을 강요하는 것은 ‘선 긋기’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우리와는 다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로 누군가를 쉽게 배제하고 선을 그어버린다면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냄새’를 구분해 낼 코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 우리 사회가 누군가에게 건강하고 위생적인 주거 환경이 제공되지 못하는 반인권적인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고쳐 나가려는 가슴과 작은 움직임일 것이다.
어제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서울역에서 있었다. 올 한해도 많은 이들이 ‘익숙한 냄새’를 풍겨야할 의무를 강요당할 뿐 건강권을 유지할 권리도, 안정적인 주거 공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죽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코를 막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그 순간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주거권,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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