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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더 강해질 수 있도록

[기고] 반도체 뒤의 황폐함, [Challenging the chip] 번역 후기

본문

[참세상]

왜 항상 세상은 내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일을 맡길까. 국가인권위 소속으로 교도소 재소자 건강 조사사업을 참여했을 때에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논문을 쓸 때에도 수없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나보다 좀 더 경험이 많고 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들려줄 게 있다며 녹음기를 켰다. 거기에서는 앳된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23살에 백혈병으로 죽은 황유미씨의 동료였다,

“그 방사선 막아주는 기계 있잖아요”

“그 방사선 막아주는 소리 내는 장치 있잖아요. 그게 일하는 내내 계속 울렸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는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들 눈치 챘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방사선 장치는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하고 있는 그녀 주위의 방사선 허용정도가 이미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 장치이다. 그 경고장치가 일하는 내내 계속 울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고 말하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게 아니라고 그 소리가 나는 동안에 당신은 계속 위험한 수준의 방사선에 노출되고 있었던 거라고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다음 이야기가 들려왔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20명이면 그 중 14명 정도가 그.. 생리 불순에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이게 작업 때문에 그런 거면 20명 전부가 그래야지, 6명은 괜찮으니까 이게 일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착한 목소리가 안쓰럽고 또 미안했다. <전태일 평전>이 떠올랐다.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고개 한번 펴지 못하고 일하던 여공들의 고충을 조사하던 1960년대의 전태일이 떠오르며, 세상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다 거짓말인가 싶었다.

    ▲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테드 스미스 외 지음, 공유정옥 외 옮김, 메이데이 실리콘 밸리와 삼성의 공통점 : 세가지 신화

노동자 건강단체에서 일하는 그 친구는 사람들이 반도체 공장 같은 첨단 산업에서 직업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낯설어 한다는 말을 했다. 피해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병이 직업 때문에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책을 한권 보여줬다. 실리콘밸리의 사회운동가가 전 세계 전자산업의 직업병/환경문제 사례를 모아 만든 두꺼운 책 이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 좋겠는데, 사람들을 모으는 일도 출판사는 구하는 일도 고민이라고 했다. 책을 군데군데 살펴보다가 한 페이지에서 눈이 멈쳤다.

"실리콘 밸리에는 세가지 신화가 있다. 첫 번째 신화는 산타 클라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 곳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산업 이주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값을 감당해야 한다. 두 번째 신화는 전자 산업은 매우 깨끗하다는 착각이다. 제품 생산과정에서 독성 화학물질을 엄청나게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진실의 왜곡이다. 또 다른 정치적인 면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세 번째 신화가 있다. 바로 실리콘 밸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노동운동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실리콘 밸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면 내용이 얼마나 달라져야 할까. 황유미씨는 일 년에 2천만 원이라는 ‘고임금’을 받으며, 클린룸(Clean room)에서 일한지 2년만에 백혈병에 걸렸다. 반도체 칩(Chip)에게는 더 없이 깨끗한 그곳이 과연 그녀에게도 깨끗한 일자리였을까. 그리고 화장실에 CCTV를 설치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막는 삼성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공언한 이병철 전회장의 이야기가 과연 이 책에서 나오는 사례보다 덜 한가. 책을 읽으며, 스코틀랜드의, 대만의, 인도의 사례를 읽으며 무슨 놈의 세상이 다 이렇게 똑같이 더럽나 싶었다.

“형, 돈 안 되고 힘들고 욕먹을 수도 있는 일인데. 도와주세요”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난 후, 가장 큰 문제는 분명히 돈이 되지 않을 번역작업을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삼성과 싸우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해줄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의과대학 시절 친하던 형과 친구들을, 보건대학원 동료들을 찾아가 말했다. “저.. 형, 돈 안 되고 힘들고 욕먹을 수도 있는 일인데 도와주세요.” 감사하게도 누구 한명 거절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야, 그런 건 당연히 한가한 공보의가 해야지, 왜 네가 하려고 해.” 웃으며 답하고 샤브샤브를 사주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에 모인 사람이 10명이었다. 반올림(*)에 관여하고 있는 사회단체에서 자원한 사람들 그리고 나와 친하다는 이유로 얽힌, 고마운 사람들이 모여 첫 회의를 했다. 다 같이 고인이 된 황유미씨의 동영상을 보고서 현재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유미와 짝을 지어 일하던 이숙영씨 역시 백혈병에 걸린 것과 삼성에서는 직업병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번역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몇몇 분에게는 미리 이야기 드렸지만, 이 책을 번역하게 되어 생겨나는 모든 수익은 현재 싸움을 하고 있는 반올림 분들께 드리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아예 계약서에서부터 통장 계약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조금은 걱정했었는데, 누구도 고개를 젓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걱정을 했다. ‘출판사는 구했냐? 이 책을 출판해줄 데가 있겠냐? 혹시 마땅한 곳을 못 찾으면 나도 알아보겠다.’

출판사 메이데이를 만난 것을 그 때 즈음이었다. 번역/출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내내, 메이데이의 김영선씨는 이 책이 돈이 안 될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 수익이 안 남을 것 같으면 번역료를 아예 받지 않겠다는 것이 내가 준비한 답변이었는데, 그녀는 이 책을 왜 번역하려고 하는지, 또 우리들끼리 번역본을 제본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 책을 왜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물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질문을 하는 그녀 앞에서 진땀을 빼야 했다.

Ted Smith, 한국에도 그런 일이 있어요

책의 편집자인 테드 스미스에게 책을 번역 출판하고 싶다며, 이메일을 보냈다. 혹시라도 철자나 문법이 틀렸을까 조심조심 써서 보낸 이메일에 그는 다음날 곧바로 답을 주었다. 반올림의 활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알려달라고 답을 했다. 혹시 현재 투병중인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을 한마디 해줄 수 있냐는 부탁에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분들에게 이 말을 꼭 전달해주십시오. 전 세계에는 그 분들처럼 전자제품을 만드는 거대한 기업에서 일하다가 병에 걸리신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기업들에 맞서 모든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국경을 넘어 서로 연대하고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계속해서 이 투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러분들의 투쟁이 노동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몫을 쟁취하고,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존중하도록 삼성을 바꾸어내는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Please tell them that there are many people all around the world who are suffering the same consequences from working at the big electronics companies and that people are uniting across national boundaries to build solidarity with each other to fight for justice for all workers. I look forward to hearing more about this struggle and I’m confident that the workers will eventually win their cases and make Samsung respect the workers and their families.

In solidarity,

Ted Smith
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당신과 내가 지금보다 더 따뜻해지도록, 더 강해지도록

번역 작업은 두렵고 지난한 일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글을 읽으면서 비문들이 등장할 때 마다 마음 편히 비난했던 기억이 부메랑처럼 떠올랐다. 여러 사람들이 번역에 참가한 만큼 문체도, 번역의 질도 모두 달랐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마무리 작업을 꼼꼼하게 해야 했다. 당시에 요양병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딸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될 준비를 해야 했고, 대학원 수업과 석사논문도 남아있었다. 초벌을 간신히 끝내고, 작년 8월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했다.

그렇게 남겨진 원고는 지난 1년간 친구의 정성스런 수정 작업을 거쳐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 사이 한국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철거민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불에 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고 일하게 해달라는 소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돗물이 끊긴 공장에서 77일을 버티었던 노동자들은 구속과 함께 회사와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이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투병하고 있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신과 내가 지금보다 더 따뜻해질 수 있는,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작성자김승섭(하버드 보건대학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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