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 않은 그 배움에 관하여
본문
“그것도 몰라요?”
핸드폰을 교체한 지 얼마 안 돼 다른 단체 활동가에게 작동법을 물었을 때 들은 물음, 아니 질타다. 새 모델이라 적응이 쉽지 않다는 변명을 덧붙였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토론회 때보면 굉장히 논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인데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냐며 실망이라고 놀린다.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하다. 그러나 어쩌랴! 기계만 보면 자꾸 움츠려드는 이 마음을. 게다가 얼마 전에 뭔가를 잘못 설치해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모두 날려버린 터라 더 자신이 없었다.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있고 못하는 게 있는 법이라고, 기술이 너무 빨리 발달해서 나 같은 기계치는 따라가기 힘들다, 나이가 들어 그런 걸 쫓아가기 힘들다 등등. 굳이 새로운 기계를 개발해야 하느냐, 그것도 다자본주의 상품판매 논리가 아니냐 등 목에 힘을 주어 말해도 놀림은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기계가 등장하니 기계치이고 새로운 물건을 두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점점설 자리가 줄어든다. 정말 인생이란 끊임없이 배움의 연속이다. 초중고 정규교육을 이수했든 안 했든 살아가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은 나이가 들어도 줄지 않는다.
배움은 단지 지식암기만이 아니라 더 힘들다. 익숙해진 사고나 몸놀림을 바꿔야하는 것도 있다. 은행창구에서 돈을 찾고 보내던 습관을 핸드폰으로 보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편하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특히 우리 엄마처럼 나이든 할머니는 꿈꿀 수 없는 일이다. 핸드폰의 각종 아이콘을 이해해야 하고 잘 안 보이는 글과 숫자를 읽을 수 있는 시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듯 나이가 든다는 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 힘이 약해지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배우는 사소한 배움
그런 점에서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내 주변에 사소한 것을 가르쳐주는 친구들이 많다. 핀잔 없이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나도 누군가 내가 아는 걸 물어오면 친절하게 자세히 가르쳐주는 편이라 ‘모르면 묻자’가 몸에 배였다. 서로의 민폐가 서로의 연으로 이어지는 게 인생이 아닌가. 게다가 내 동료들의 나이와 성별, 직업은 다양하다. 나이와 성별 등의 요소를 넘어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이렇듯 배움은 학교 같은 정해진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알려진 앎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아니다. 그냥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들이다. 누군가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을 옆에서 보고 배우기도 한다. 텔레비전 켜는 법을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는다. 식당에 가서 음식 주문하기, 핸드폰으로 전화걸기, 도서관에서 책 빌려오기 등도 그렇다. 옆에 있는 사람이나 친구들이 하는 걸 보면서 배우는 일이다. 그냥 세상과, 사람과 섞여서 살면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에서 배우는 사소한 배움들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나를 있게 한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도련님들이 버스 타는 법을 몰라 당황하는 것도 그들의 삶에서 필요 없는 대중교통수단이라 타 본적이 없어서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다면 카드나 현금을 내고 탄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무엇을 배우고 배우지 못하는가와 이어진다.
그 사소한 배움조차 박탈당한 사람들
시설에서의 삶은 그 사소한 배움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어려서부터 시설에 갇혀서 산 장애인들은 모르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살면서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거의 모두 배우지 못한다. 얼마 전 만난 장애인활동가가 들려준 탈시설 지원의 내용은 시설에서의 삶이 시설 밖의 삶을 어렵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가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을 지원하는 내용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됐다. 핸드폰 개설부터 버스 타는 법, 통장 개설방법과 돈을 찾는 일, 엘리베이터 타는 법, 동네지리 등.
비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어울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들을 시설에 갇혔던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나온 후에 한꺼번에 외우고 익혀야 한다. ‘갇힌다’는 것은 일상을 빼앗기는 일이자 배움을 빼앗기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그 사소한 배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는다.
게다가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들에게 나처럼 궁금하거나 잘 모르는 것들을 알려줄 친구나 동료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 정착한 동네에 이웃이 바로 생기기는 어렵다. 드나드는 상점이나 미용실이 생기면 자연스레 얼굴을 익히면서 이웃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니 세월이 필요하다. 만약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으면 이웃이나 친구를 만들기는 더 어렵다. 아니 그들은 장애인과 이웃이 되길 거부한다.
얼마 전 동네 문화수련관을 가는 버스에서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그랬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지적장애인이 얼마 전부터 동네 마을버스 정류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다면서, 왜 그 집은 그 장애인을 밖으로 나다니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마도 최근에 아파트에 이사를 온 집에 장애인 자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말끝에 그 정도 장애면 시설에 보내야 하지 않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장애인은 낮에 주로 마을버스 정거장에 자주 있는데 주민들에게 그다지 피해를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하는 행동은 단순했다. 마을버스가 서면 버스 운전사에게 손을 흔들고 버스가 출발하면 잠시 쫓아가 뛸 때도 있다. 마을버스 기사와는 안면을 터서인지 기사가 손을 흔들며 웃어주기도 한다고 했다. 유일하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라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물론 낯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건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행동이 장애유형에 따른 것이라면 이웃으로서 환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동네 주민모임에서 이러저러한 유형의 장애인이 입주했으니 이해하고 배려하자고 공유할 수도 있고, 부모들이 주민들에게 하는 행동 중 이러저러한 행동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 있으니 하지 말자거나 그렇게 서로 협의하고 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웃이 된다는 건
이렇게 장애인을 가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탈시설 후의 장애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짐작된다.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자신이 있던 시설에 친구들을 만나러 놀러가는 이유가 이런 영향도 있겠구나 싶다. 새로 정착한 지역에서 말벗이 되어줄 친구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이니까.
시설 밖으로 나왔지만 삶을 나눌 인간관계가 비장애인들로까지 넓어지지 않는다. 삶의 공간은 확대됐지만 살면서 맺는 인간관계의 한계는 쉽게 넓혀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나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웃이 된다는 건 서로의 삶을 나누고 배움을 나누는 것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만나며 배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성의 힘이 얼마나 하찮은지, 장애라는 명명이 얼마나 모호한 경계인지를 배울 것이다. 무엇보다 비장애인의 시각으로만 보았던 세상을 그래서 불편함이 그리 많지 않았던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사회복지제도의 민낯, 시설에서의 비인간적 대우, 장애인들을 둘러싼 편견 등 세상의 실체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가 뿜는 새로운 기운을 맞볼 수 있다. 삶을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시선이 주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삶의 다양성을 깨닫고 배울 수 있다. 장애인의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는 비장애인들은 배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바란다.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배움을 나누는 주체가 되기를.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환대,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실존에 대한 인정뿐이다. 나는 소나무만 있는 숲의 기운만이 아니라 벚나무나 오동나무도 있는 숲이 뿜는 기운도 맛볼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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