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생활시설서 누리지 못한 일상의 행복 누리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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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여행
길희진
부끄럽지 않은 자들이 모인다
자유로운 자들이 모인다
억압받던 삶에서 해방된 자들이 모인다
구속에서 벗어난 자들이 모인다
옆에 비가 없어도 당당한 자들이 여행을 떠난다
*비-비장애인을 뜻함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마리스타 교육수사회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그동안의 ‘탈시설 담론’이 전문가 중심이거나 소모임 또는 간담회 수준에서 진행됐다면 현재 장애인생활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들과 자립생활에 성공한 이들의 눈높이에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자립생활의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가 사상 최초로 열린 것.
‘제1회 탈시설자립생활 활동가 대회’라는 명칭답게 참석자들 대부분은 현재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생활하고 있거나,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혼자였다면 이야기하기 불편했을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경험담과 미래에 대한 꿈을 <함께걸음>이 담아봤다.
▲ ⓒ김태현 기자 "이음여행 통해 자립생활 자신 얻었다"
윤인상(가명, 남, 34세, 뇌병변 1급, 현재 장애인생활시설서 생활 중)
어릴 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불화로 점차 집안 사정이 나빠지게 됐다. 결국 부모님 사이가 멀어져 별거를 하게 되자, 내 밑으로 동생은 3명이나 됐고...나를 제대로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됐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내가 집에 있게 되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괜찮은 시설이 있다고 소개를 했고,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심정으로 15살 때 시설에 입소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시설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다가 잠을 자고... 그런 생활을 반복했는데 그때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더 들자 그런 생활이 답답해졌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혼자 활동하지 못 하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했다. 너무 답답했다. 그나마 어린 사람들은 공부방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성인들에겐 별도의 공부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시설에서는) 검정고시 반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시설 몰래 자립생활 준비 중...집과 생활비, 활동보조서비스가 가장 마음에 걸려
그러다 지난 2004년 한국뇌성마비연합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자립생활을 꿈꾸게 됐다. 시설에서 먼저 나온 형이 있는데, 그 형이 자립생활에 대해 많이 알려줬다. 이 행사도 그 형이 소개해줘서 참가하게 된 거고, 그 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계획하고 있는 탈시설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시설에서는 내가 자립생활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금도 조금 그렇지만 예전에는 시설에서 알게 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무척 겁이 났다. 시설에선 여기 참가한 것도 모른다. 가족들도 내가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고 하면 ‘너 혼자 살다가 아프면 어떻게 할 거냐’며 말릴 거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여러 가지가 걱정되긴 한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역시 집과 생활비다. 현재 나는 장애수당만 받고 있고 활동보조서비스는 180시간을 받고 있다. 하루에 6시간 정도 서비스를 받는 거다. 내 경우 몸을 거의 쓰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 6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시설에 갇혀 있는 많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에서 활동보조서비스를 확대하고 장애인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제대로 지원해 줘야 한다.
만약 자립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공부다. 사회복지, 그 중에서도 장애인 복지에 대해 배우고 싶다. 또 하나의 꿈을 얘기하자면, 지금 나에겐 너무 큰 꿈일지 몰라도 우리처럼 자립생활을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그룹홈을 만들어 운영해보고 싶다. 이번 이음여행에 참가함으로써 내 꿈에 도전해볼 용기를 더 갖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 무릎쓰고 시설 '탈출'...집 없어 남편과 떨어져 있지만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해
장애경(여, 41세, 뇌병변 1급, 2009년 7월 자립생활 시작), 김탄진(남, 42세, 뇌병변 1급, 2009년 5월 자립생활 시작) 부부
집안의 맏딸이었다. 부모님은 일하시랴 동생 돌보시랴 힘드셨고,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며 평생 부모님과 함께 살며 짐이 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장애인생활시설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27살 때 뇌병변장애인과 지적장애인들이 섞여 있는 시설에 들어가 14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곳은 뇌병변장애인보다 지적장애인들이 많았고,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없어 답답했다. 슈퍼에도 가고 싶고, 산책도 하고 싶었지만 뇌병변장애인들의 외출은 1년에 2번, 단체로 나가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또 시설 안에서는 어떠한 대화를 나누든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그게 전부 생활교사들 귀에 들어갔다. 같이 생활하던 장애인들이 전부 고자질하는 게 문제였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눈치 보며 살아야 했다.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항상 나에게 덮어씌웠던 거다. 지적장애인들이 사고를 쳐도, 혼나는 건 항상 나 같은 뇌병변장애인이었다. 게다가 내가 받아야 했던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 역시 제대로 받지 못했다. 수급비는 ‘우리가 시설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을 사야 한다’며 주지 않았고, 그나마 작년 7월부터 통장에 입금됐던 돈도 고작 17만원이었다.
그러다 한 친구를 만났다. 시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시설 입소하기 전 보치아 선수였다고 했다. 그래서 시설 안에서 함께 보치아 게임도 즐기고 이야기도 하면서 12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좋은 감정이 생겨 사귀게 됐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웃음)
(조금 후 한 남성이 인터뷰 장소로 다가왔다. 애경 씨는 그 사람이 남편이라며 밝게 웃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른다며 놀려댔다.)
▲ 김탄진 씨(좌) 장애경 씨(우) 부부 ⓒ김태현 기자 |
하지만 나는 바로 나올 수 없었다. 시설에서도 못 나가게 했고, 부모님들도 좋아하지 않아서 내가 ‘나가겠다’고 할 때마다 시설 측과 가족들과 엄청나게 싸웠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날 보러 시설에 올 때마다 ‘여기서 나가게 해주겠다’고 다짐한 게 작은 위안이었다. 부모님 역시 내가 시설에서 (내가 받아야 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행복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시설 측에 오히려 ‘날 잘 부탁한다’며 돈을 더 주곤 했다. 그러던 중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밤중에 몰래 도망쳤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남편이 보고 싶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지금 나는 혜화동에서, 남편은 아차산 부근에서 각각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집을 알아보고 있다. 어쨌든 시설에서 나오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친구도 되고 남편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은 내가 남편 집으로 가고 한 번은 남편이 우리 집으로 오며 만나고 있는데, 시설에서 나와 처음 맞는 이번 추석에는 남편과 한강에 놀러 갔다. 며칠 동안 남편과 함께 지내며 공원에도 놀러가고 너무너무 좋았다. 얼른 집이 구해져서 같이 살고 싶다.
▲ 길희진 씨 ⓒ김태현 기자 시설비리 몸소 체험...자립생활 어렵지만 시인 꿈 키워가고 있어
길희진(남, 34세, 뇌병변 1급, 현재 자립생활 중)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가 한 달 간 병원에 입원하실 수밖에 없게 되자 날 외갓집에 맡겼고, 외갓집 식구들은 내가 장애인생활시설에 입소하길 바랐다. 그래서 22살되던 1997년, 강원도에 있는 대형 시설에 들어갔다.
그 시설에는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이 고루 있었다. 그런데 원래 비인가 시설이었던 곳이 인가를 받으면서 지적장애인생활시설로 전환했는데, 그때 시설 측에서 나를 지적장애인으로 분류시켰다. 그렇게 된 뇌병변장애인들이 몇몇 있었지만 180여 명이 넘는 지적장애인들 사이에서 뇌병변장애인들은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대화 상대도 없고, 외출도 일 년에 한 두 차례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장 기분이 나빴던 일은 시설에 입소하기 전 보치아 선수를 했던 것을 이용해 시설을 홍보하고 후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국가대표 선발에서 국제경험이 많았던 다른 선수에게 우선권을 빼앗겨 속이 상해 그만 뒀던 일이라 하기 싫다고 했는데도, 시설에서는 내가 아직까지 보치아 선수를 하고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고 홍보해서 그만큼 더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 시설은 예전 원장 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장이 바뀐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 돈을 횡령하거나, 학대 하는 일이 잦아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을 받았지만 시설을 나오기 직전의 내 통장은 비어있었다. 시설에서 나올 때 시설 측은 내 통장에 100만원을 넣어줬다. 그간 내가 받아야 할 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나왔다.
지금은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마려해준 집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고 있다. 260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많은 시간을 받고 있는 거지만 자립생활을 하기에 결코 많은 시간은 아니다. 또한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을 합쳐 6~70만원을 받고 있지만, 그 중에 월세로 40만원을 내야 하는 게 많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시설에 있을 때보다는 너무 좋다. 시설에서 나온 지 2년이 넘었지만 동네 지리도 제대로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외출하고 싶을 때 외출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지금은 시설에 들어가서부터 쓰던 시도 본격적으로 많이 쓰고 있고, 민들레에서 만난 여자친구도 있다. 앞으로 직업을 가져서 돈을 벌어 결혼도 하고 싶고, 남들처럼 마트도 가고, 공원도 가고, 영화도 보며 평범하게 살고 싶다. 아, 제일 해보고 싶은 건 전국일주를 하면서 시를 쓰고 싶다.
시설을 나와 자립생활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들이 자립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음먹은 대로 소신껏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방을 구하는 게 급선무이고 다른 준비를 해나가는 데 힘든 점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우선 용기를 내어 밀어붙이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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