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피해장애인과 선택권
본문
사진 장명훈 위기거주홈은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학대피해장애인의 쉼터입니다. 함께걸음은 348호부터 위기거주홈의 생생한 일상이 담긴 ‘위기거주홈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다. 오늘 점심메뉴를 뭘 먹을지 고민하는 가벼운 것에서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의 심각한 고민까지 선택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 선택권을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면 당연히 되찾아 와야 한다.
소금 사티아그라하 행진
19세기 초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삼키는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인도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중요 식민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자부심으로 여기던 셰익스피어와도 가치를 저울질할 정도였으니, 영국에게는 인도가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모양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직접적인 수탈 외에도 별의별 물건에 세금을 매겨 간접적인 이득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서류와 우편물에 부과하는 인지세, 마시는 차에다가 차세를 물렸다. 이는 미국인들이 차 상자를 모조리 보스턴 항에 집어 던지고 신대륙 독립을 추진하는 불씨가 된다.
인도에서는 소금세가 있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판매되는 소금을 전량 영국 정부의 이름으로 전매화하고 소금세를 납부하지 않은 소금의 사사로운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이 때 마하트마 간디는 군중을 이끌고 390킬로미터 거리를 걸어가 한줌의 바닷물을 말려 미량의 소금을 만들고 그것을 본인의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 비록 그것은 작은 행동이었지만 영국 정부로부터 빼앗긴 소금에 관한 인도인들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 즉 간디의 선택이었다.
선택의 첫 경험
갓 탈시설한 고등학생이 위기거주홈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학생의 활동보조인이 정해지지 않아 당직자와 함께 새벽에 도착하는 특수학교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 늘 바쁘게 움직였던 때의 일이다. 나에게 본인이 학교에 입고 갈 옷을 골라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누군가가 옷을 골라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생. 역시 본인 옷은 본인이 골라 입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때?”
“음… 저는 제가 옷을 사 입어 본 적도, 제가 입을 옷을 골라본 적도 없어요. 늘 시설에서 사다 주는 옷을 입고, 시설 종사자가 입히기 편한 옷, 벗기기 편한 옷, 골라 주는 옷만 입어봐서요.”
“남이 골라 주는 옷 입다가 창피를 당한 사람이 있거든. 학생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사람이야.”
“그래도 전 잘 모르겠어요.”
“작년 겨울에 한창 뉴스에서 많이 나오던데…. 저기 TV에 나온다!”
“아!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 후로 그 학생은 본인이 원하는 옷을 잠들기 전 미리 옷장에서 머리맡에 꺼내 놓고 그 옷을 아침에 입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본인이 원하는 옷을 구입하고 이제는 번화가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열심히 관찰해 예쁜 옷을 스스로 사 입고 다닌다. 타인에 의해 결정되던 자신의 패션을 학생은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택의 단계
실무자로서 학대피해장애인 당사자들이 스스로 선택을 수월하게 할 때까지는 몇 가지의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째. 모방한다. 타인을 모방해 보는 것이다. 실무자가 될 수도 있고 위기거주홈 동료가 될 수도 있다. 둘째, 기억한다. 근무자나 위기거주홈 동료가 일상생활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것들을 모두 접해보고 본인에게 특히 좋았던 것들을 기억한다. 셋째, 여태까지 경험해 보았다가 좋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낸다. 이 단계에 이르면 좋았던 경험들을 말하고 본인이 원하는 걸 직접 말할 수 있다.
위기거주홈에서는 학대피해장애인 당사자의 욕구를 최대한 반영하여 지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위 과정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분들도 종종 만난다. “다 좋아!”, “다 좋아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아요!”라고 말씀하셔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도무지 파악하기 힘든 분, 어떤 걸 보여 드려도 아무 반응 없이 조용하신 분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고 하시는 분 역시 파악이 어렵다. “아무거나!”, “알아서!”, “마음대로 해주세요!”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결국 느리고 더디더라도 꾸준히 지원하다 보면 이분들이 직접 선택하시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하셔서 알아서 해달라고 하시면 한두 번은 선택해 드려야 할 수도 있겠지만 종래에는 선택권을 당사자 분께 되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선택해야 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번 여쭤 보면 어느 날은 선택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기
간식으로 “콜라를 드시겠어요? 사이다를 드시겠어요?” 같은 아주 사소한 선택부터 시작해 보자. 선택지가 적을수록, 또 두 선택의 기회비용이 엇비슷하거나 동등할 때, 즉 어느 것을 선택해도 손해 보지 않는다고 판단하신다면 훨씬 선택을 쉽게 하는 편이다. 반대로 이분을 가게에 모시고 가서 ‘원하는 음료를 집어보세요’라고 한다면 한참동안 고민하시는데, 이는 비용차이가 많이 나는 다량의 재화들이 같은 공간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가지 선택이 빠르고 쉽게 가능해지면, 세 가지, 네 가지로 확장해 선택해 보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식당의 메뉴판 사진, 추후에는 유형의 가치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 즉 본인의 삶에 대한 나름 가지고 계시고 꿈꾸고 계셨던 계획들도 어렴풋하게나마 말씀 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에 맞춰 당사자를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잃어버린 선택권 되찾기
여태까지의 삶에 이분들의 선택은 없었다. 가해자가 음식이랍시고 던져 주는 온갖 불쾌한 것들을 생존을 위해 먹었고, 가해자가 물리력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나날들을 겪으며 불안에 떨었고, 가해자의 이익을 위해 원치 않는 노동을 하고, 쉬고 자는 것조차 본인이 선택하지 못한 채로 살아야 했다. 그런 분들에게 본인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자유의지의 표현이자 작은 한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수급비가 나왔다고 한 분이 내게 건네던 커피가 기억이 난다. 길거리를 오가는 젊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많이 마시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시커먼 음료가 가게에서 파는 커피라는 걸 알아낸 것이다. 그렇게 커피를 구입한 뒤 그것을 나에게 말없이 건넸다. 쓰다고 본인은 잘 드시지도 않는 그걸 구매하시려고 얼마나 집중해서 사고파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셨을까. 커피를 받아든 나는 감사를 표했다. 물론 나도 받으면서도 좀 마음은 편치 않아 그냥 아저씨 맛난 거 좀 사드시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싶다. 그분의 자유의지이고 그냥 그분의 선택이니까.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