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베스트 선택, 첼로(1)
본문
인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내렸던 결정 중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첼로를 배우기로 한 것입니다. 그 많고 다양한 악기들 중에 왜 하필 덩치도 커서 들고 다니기도 어려워 보이는 첼로일까요? 안 그래도 시각과 청각이라는, 어쩌면 음악을 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할 수도 있는 감각에 장애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이 지구상에 ‘첼로’라는 악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27살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시각과 청각에 장애를 가지게 되면 정보접근에 어려움이 있게 됩니다. 다양한 악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도, 첼로라는 악기가 어떤 것인지는 물론 어떤 소리가 나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막연히 배우고 싶던 첼로
첼로라는 악기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영화 ‘굿바이’를 통해서입니다. 이 영화 덕분에 첼로를 배울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오케스트라 첼리스트였던 남자 주인공이 납관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납관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 남자 주인공의 아내나 친구가 그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고인을 배웅하는 일에 정성과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거나 쉬는 날에는 아내가 없기 때문에, 또는 직업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인해 혼란스럽고 힘들 때마다 첼로를 연주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주제를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를 신경쓰지 말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주목했던 것이 바로 첼로입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의 대사도 듣지 못하는데 첼로의 소리를 들을 리가 없죠. 비록 소리는 듣지 못해도 고뇌와 외로움 등의 감정으로 힘이 들 때마다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뭔가 힐링이 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할 때는, 정말이지 어떤 곡을 연주하고 있고 그 곡이 어떤 멜로디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기 마련인데, 시청각장애로 인해 불편하고 힘든 점은 얼마나 더 클까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고 좌절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장애로 인한 차별이나 잘못된 인식으로 괴로울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남자 주인공과 완벽히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저도 괴롭고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달래고 싶다는 정말 ‘막연한’ 생각으로 첼로를 배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을 할 당시 저는 수험생 신분으로 고가의 첼로 구입은 물론, 레슨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면 분명히 “공부나 하지 뭐하러 첼로를 배우려 하노?” 하면서 난리가 났을 게 말하지 않아도 뻔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1년 동안 비밀리에 돈을 모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모이자, 당시 활동지원사에게 첼로를 지도해줄 선생님을 찾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첼로 레슨을 하시는 선생님 네 분의 리스트를 전달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 연락을 드렸는데,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저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유일 수도 있고, 심지어 저조차도 예상했던 답변이었는지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연락을 시도했던 선생님에게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고 해도 무방할 심정이었습니다.
레슨을 하겠다는 마음은 거의 포기했으면서도, 메일을 보내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는 저의 손가락들은 첼로를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춤을 추며 타이핑을 쳤습니다. 시각과 청각에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정말 첼로를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을 보내놓고 ‘이번에도 어렵겠다고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동안 모아둔 돈을 어디에다 쓸지 고민했던 생각이 나네요. 그만큼 저도 음악을 하는 데에 시각과 청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정말 배워보고 싶었어요.
선생님한테서 답변이 왔습니다. 메일 잘 읽었다고 하시면서 첼로는 마음과 영혼으로 연주하는 악기라고,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 수도 있지만 같이 열심히 잘해보자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핑돌았습니다. 정말 첼로를 배울 수 있게 되었구나! 그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생생한 첫 레슨
대망의 첫 레슨시간, 레슨하러 가는 길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설렜는지 모릅니다. ‘영화에서도 첼로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지?’ ‘선생님이 좋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시각과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날 텐데 제대로 이해하고 의사소통이 될까?’ 이런저런 걱정도 되었지요.
레슨하기로 한 교회에 제가 먼저 가서 기다렸습니다. 곧 오신 선생님은 저에게 다가와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듣지 못하니까 손바닥에 좀 적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메일로 제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은 드렸지만, 사실 초면에 바로 손바닥에 글씨를 적는 방법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손이라도 신체적인 접촉이고, 또 남녀 간이라면 더욱 부담스러운 면이 있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바로 이해하시고 제 손바닥에 적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첫 마디는 “많이 기다렸죠?”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죠.
자리에 앉아서 제가 준비해간 노트북으로 소통을 했습니다. 저는 말을 하고, 선생님은 하고 싶으신 말을 노트북 한글파일에 타이핑을 쳤습니다. 간단한 소개와 앞으로 레슨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 후, 기다리던 첼로를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프트케이스를 열자 싱그러운 나무내음이 코를 가득히 찔렀습니다. 정말 기분 좋아지는 이 내음, 이제 앞으로 나와 동행할 녀석이라는 생각에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첼로의 각 부위에 대한 명칭을 배우고 첼로를 가슴에 안고 바르게 앉는 자세를 배웠는데요. 이때 선생님의 분주한 움직임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첼로의 어느 부위를 가리킨 후 그곳의 명칭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기 위해 노트북 앞으로 가서 타이핑을 치고, 다시 일어서서 첼로의 어느 부위를 가리키는 행동을 반복하셨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어쩜 이렇게 소통하는 방법을 잘 이해하실까요? 괜히 혼자 마음속으로 울컥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선생님과 함께라면 어느 누구라도 정말 열심히 배울 것입니다. 그렇게 첼로 각 부위의 명칭과 기본적인 자세, 활잡는 법을 배운 뒤, 첼로의 줄을 활로 그어 봤습니다.
제 생애 처음으로 활을 첼로의 줄에 얹고 켤 때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느낌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정말 강렬했습니다. 영화에서나 동영상으로는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이 나와도 아무런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제가 직접 활을 잡고 첼로를 켜니까 묵직한 진동이 전달됐습니다.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그 진동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러니까 첼로를 켤 수 있겠다는 저 혼자만의 벅찬 성취감에 활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율이 퍼져나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와인을 마실 때 목구멍을 넘어간 와인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짜릿한 전율처럼 말입니다.
쉽지만은 않은 도전
너무 좋은 선생님, 그리고 새 첼로와 그렇게 첫 레슨을 시작했지만, 역시 시청각장애인으로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레슨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왼손으로 정확한 음정을 짚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 활을 잡고 첼로를 킬 때, 왼손으로 정확한 음을 짚어야 되는데 저는 하나도 음을 구별해내지 못했거든요. 활을 그을 때나는 진동에 거의 의존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보자들처럼 저도 처음에는 첼로에 스티커를 붙여놓고 음정을 인지하면서 레슨을 했습니다.
첼로는 현악기라서 주변 온도의 변화나 약간의 충격에도 금방 줄이 풀리는 등 변화가 잘 일어나서 관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레슨을 가기 위해 첼로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버스를 타면 아무리 조심해도 여기저기 쾅쾅 부딪칩니다. 더구나 저의 손에는 노트북도 들려 있어서 혹시 첼로에 충격이 가지는 않을까 신경이 정말 예민해지곤 했습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으로 첼로의 줄이 조금이라도 풀리거나 하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저로서는 음정 조율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지금은 튜닝기를 이용해 혼자서 제법 음정을 조율할 수 있게 됐지만, 첼로가 정말 제 몸의 분신이나 되는 것처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역시 노트북 화면이나 악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점입니다. 첼로를 안고 연주하기 위한 자세를 잡으면, 바로 앞 책상에 놓인 노트북에 아무리 글씨를 크게 써도 정확히 읽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노트북에 타이핑을 치면 저는 첼로를 안고 있던 자세를 풀고 일어서서 노트북 화면으로 가까이 가서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첼로를 안고 자세를 잡아야 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할 때에는 두 발의 위치, 첼로가 가슴에 와 닿은 정도, 핀의 길이, 활을 잡은 오른손의 각도 등 신경써야할 부분이 정말 많기 때문에 자세를 잡고 대화하고 자세를 잡고 대화를 하니까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보를 보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레슨할 곡을 정해주시면, 악보를 제대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통째로 다 외워야 했습니다. 그냥 계이름을 다 외우는 게 아닙니다. 어느 부분의 박자가 몇 박인지, 쉼표는 얼마만큼 쉬는지 등 정확한 박자뿐만 아니라 각활(한음 한음을 활로 각각 연주)과 슬러(두개 이상의 음을 한 활로 이어서 연주)까지 다 구분해서 외워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악보를 맨눈으로 보면서 외우자니 눈도 너무 아프고 머리도 복잡해져서 저만의 아이디어를 만들었습니다. 빈 문서에 먼저 그 곡의 계이름을 다 적고, 각 계이름에 해당되는 박자, 쉼표, 각활이나 슬러 등을 제 나름대로의 ‘기호’로 만들어 입력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 밥 먹거나 운동하거나 할 때마다 계속 그걸 보면서 다음 레슨 때까지 외우곤 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제대로 듣지 못하니까 저만의 세계(?)에서 멜로디를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즉 아무리 악보를 외운다고 해도, 악보만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멜로디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멜로디를 느낄 수 있게 그 곡의 흐름을 맞춰 제 어깨나 팔을 터치해달라고도 하고, 궁금한 곡을 폰으로 들으면서(사실은 듣지 못하지만) 폰으로 전달되는 진동으로라도 멜로디를 느껴보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설리번 같은 첼로 선생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첼로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배울 수 있도록 선생님의 지도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칭찬을 해주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자 레슨이 아닌 날에도 ‘카톡’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고 싶은 말을 ‘말’이 아닌 ‘글’로다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그것도 대화가 아니라 무언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타이핑을 치면서 하려는 말을 전달하고, 제가 음정 하나라도 잘못 짚었거나 자세가 잘못 됐으면 가까이 와서 바로잡아준 뒤 다시 타이핑을 쳐서 방금 전 잘못된 내용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레슨을 받으면서, 선생님이 정말 설리번 선생님 같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비장애인도 졸업하기 쉽지 않다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엄청난 노력 못지않게 설리번 선생님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역시 시청각장애로 수업내용을 전달받기 쉽지 않았던 헬렌 켈러에게 설리번 선생님은 수업내용을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적어주기도 하고, 촉수어를 통해서 통역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노트북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손바닥 필담이나 촉수어로만 그 어려운 대학수업내용을 통역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설리번 선생님도 시각장애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던 첼로 연주를 지금도 즐겁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뿐만 아니라, 제가 가진 장애를 잘 이해하고 지도해준 선생님의 너무나 훌륭한 마인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김서영님의 댓글
김서영 작성일기사 감사합니다. 제 블로그에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