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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내 인생의 롤모델

중증장애인직업재활 공모전 수기부문 최우수작 ‘내 인생의 롤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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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지역아동센터에 입사했었을 때의 일이다.
학교만 졸업했지, 실무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큰 도움을 주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선생님은 한쪽팔과 다리가 불편했지만, 늘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롤 모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출근 첫날, 우왕좌왕하던 나를 보더니 한마디 하셨다.

“첫 직장이겠네요.”
“네.”
“지역아동센터는 선생님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해요, 모두 정서적으로 힘들 수 있는 아이들이니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시고 소신껏 신념 있게 아이들을 대하셔야 합니다. 다른 실무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아가실 거구요."
“노력하겠습니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한다는 건 상당히 추상적이고 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출근시간부터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는 행정적인 업무를 배웠다.
처음에는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숙달될 수 있는 업무였다.
오후쯤이 되자, 아이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사무실을 지나면서 나를 한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었다. 첫만남인데 어떻게 해야할 지 약간은 긴장해 있는 나에게 선생님은, “ 아까도 말했다시피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도 선생님을 대하는 게 달라질 거예요, 편하게 풀어줄 때와 아닐 때를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초등 저학년에서 중학생까지 고르게 아이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저학년따로, 고학년 따로 첫인사를 했다.
“어디사세요~”
“몇살이세요~”
부터 중학생들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물어대는 통에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저녁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힘드시죠.”
물 한 잔을 건네며 빙긋 웃는 그 선생님은 곧, “이게 다 내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그닥 힘들진 않을 거예요. 처음 한 일주일간은 탐색전인 거 아시죠? 너무 어렵거나 쉽게만 보여서도 안 되구요.“
“네.”
선생님의 말씀대로 일주일간은 아이들과 나와의 탐색전이었다.
마음을 크게 열지 않는 아이들에게 약간은 나를 노출도 하면서 즐겁게 다가가 도록 노력한 결과, 아이들은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저녁에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열심히 하셔서 그런지 아이들이 선생님을 잘 따르더군요. 약간 질투 나는데요~"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렇죠. 그리고 얘기는 안 드렸지만 처음에는 좀 자신이 없었어요. 인간관계라는 게 손에 잡히지 않아 막막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주신 것은 선생님이셨잖아요, 감사드립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설명해 드린 것을 실천한 것은 선생님이구요.”

선생님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대할 때의 나의 태도는 나날이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늘 도움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던 나도 선생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행정업무였다.

한쪽 팔이 불편했던 선생님은 “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왼쪽 팔이 좀 불편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요.”

늘 도움을 받는 듯했던 나는 솔직한 선생님의 말씀에 더 기뻤다.

출근 첫주를 무사히 보내고 시간은 흘러 월요일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기관장님이나 다른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조금 더 일찍 와서 청소를 해놓는다는 선생님은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쳐보였다.
“주말에 좋은 곳에 다녀오셨나봐요. 기분 좋아보여요.”
“그렇게 보여요? 사실은 주말에 봉사활동 중이거든요. 학교 다닐 때부터 해온 일이라 이제 사람들과도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가슴 속에서부터 깊이 벅차올라요.“

나는 그 선생님의 말에 실천하는 삶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봉사활동은 학교 다닐 때 이후로는 해보지도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지역아동센터는 방학 중 아이들을 데리고 프로그램을 하는 일이 많은데 그 날은 연을 만드는 날이었다.
연을 다 만들고 나서 연살에 소원을 적는 시간이 되자 그 때까지 연을 만드느라 조용했던 아이들이 시끌시끌해졌다.

-키 크게 해주세요.
-예뻐지게 해주세요.
사춘기 아이들답게 외모에 신경쓰는 소원이 있는가하면
-00대학에 가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벌써 목표를 잡아놓고 전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나와 선생님도 하나씩 만들었는데 나는 만들다가 실패한 아이 에게 줘버려서 아쉽게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완성하고 소원을 적을 수 있었다.

“선생님도 소원하나 쓰셔야죠?”
“그래야죠?”
연살에 조그맣게 무언가를 쓰던 선생님은 아이들이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이들 소원을 흐뭇하게 보다가 문득 선생님의 소원은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져서 힐끔 보니,
-긍정의 힘을 믿을 수 있길
하고 쓰여져 있었다.
나는 밑에
-이미 긍정의 힘을 믿고 계신 것 같아요^^
하고 썼다.

시간은 흘러 연말이 되었다.
실무자인 나와 선생님은 학부모님들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다.
지금껏 해오던 프로그램 중에 해놓은 그림과 미술용품으로 강당을 꾸미고 행사 순서까지는 계획을 잘 세웠지만 장기자랑 시간에는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 때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이 와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프로그램 하는 모습을 연극으로 꾸미면 어떨까요?” 하셨다.
“그거 좋겠네요,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학부모님들에게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시나리오를 공동작업하고 곧장 연습에 돌입했다.
“생활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리는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하도록 하자”
연습 일주일째가 되어도 연극이라는 형태 자체에 긴장을 해서 자꾸 잊어버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대사처리도 매끄럽고 연기도 자연스럽게 하는 아이가 있었다.

마침내 연말 행사 날이 찾아왔다.
겨울이라서 어둠이 일찍 깔렸지만 학부형님들과 아이들로 인해서 북적거리는 강당은 한낮을 방불케 했다.

축사와 프로그램 소개를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아이들의 장기자랑 시간이 되었다.
센터에 와서 숙제부터 하고 강사님이 오시면 프로그램을 하고, 질서정연하게 밥을 먹는 장면과 주말프로그램을 하는 모습.
연습할 때보다 훨씬 안정되게 잘 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해져서 속으로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극을 포함한 연말행사를 무사히 끝내고 조촐한 직원모임자리에서 “선생님 두분, 시나리오 짜고, 말썽쟁이 아이들 데리고 연습하고… 고생 많으셨어요.”

열심히 준비한 만큼 값진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퇴근하는 길에, “오늘처럼만 뿌듯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자 “그렇죠?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저는 한번 잘했다고 좋아하고, 한번 못했다고 실망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평이하게, 무난하게 생각하죠. 그래야 다음에 실패해도 덜 실망하고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줄어들거든요. 그리고 세상은 한 번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역시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른 선생님이셨다.
한 번 잘했다고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좋아할 필요도 없고, 한 번 못했다고 세상을 다 잃은 냥 슬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인생은 한번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계속 같이 일했으면 더 배울 것이 많았을 선생님.
지금은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한 번씩 안부인사를 하곤 한다.
지금도 그 선생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의 직장에서의 롤모델이자 인생에서의 롤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그 선생님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해 노력한다.

작성자함께걸음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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