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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의 인권이야기] 경계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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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나는 10년 째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건물에서 살고 있다. 이 건물의 1,2층은 지적 장애인들의 일터인 ‘함께 사는 세상’, 3,4층은 위기가정쉼터(이하 쉼터), 5층은 청소년 그룹홈 ‘행복한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은 ‘행복한 우리 집’ 옆의 사택이다. 내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산다는 것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이곳에 살고 있을 뿐이다. 아파트나 연립의 여러 세대 중의 하나이듯 그저 이웃들이 공동체생활을 할 뿐 우리 집은 평범한 가정집이다. 그런데 큰 애 하늘이가 학교에 들어간 후, 나는 이곳에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학교에 들어간 후 하늘이 가장 많이 물었던 말은 “다른 애들도 그래?”였다. 다른 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대해서 하늘은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급식을 시작하기 전, 간식을 싸가야 할 때, 다니던 씩씩이 어린이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떡과 과일을 넉넉하게 쌌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온 하늘은 자기만큼 많이 싸온 애가 없었다고 울었다. 하교길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간식을 싸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리가 너무 떨어져있어서 혹은 거기까지 가서 나눠주기가 부끄러워서, 그리고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은 다른 애들보다 많이 싸온 간식을 남겨왔고 그것이 부끄러웠던 거다.

잘게 쪼개어지는 세상

하늘이 학교에 들어간 지난 1년 동안 나는 매일 하늘의 등하교를 함께 했다. 하교 시간에 운동장에 서있으면서 다른 엄마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곤 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우리 학교는 아파트 단지 아이들이 다니는 옆 학교에 비해 학생 수가 적다는 것, 그리고 학기가 끝나면 옆 학교로 3~4명은 전학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주었던 엄마는 자기도 미리 주소를 옮겨놓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늘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 놀이터 때문에 가끔 옆 동네에 놀러가곤 했었다. 우리가 주로 가던 곳은 임대아파트 단지 놀이터였는데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 사이에는 큰 길이 나있었고 말뚝도 박혀있었다. 말뚝은 나중에 뽑혔는데 분양아파트 단지 안에서 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뚝이 있던 자리에는 차단기와 작은 부스가 설치되어 관리인아저씨가 들어가는 차량들을 하나씩 살피신다.

내가 사는 곳은 국회단지, 개발이 되어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선 아파트단지의 바로 옆이다. 지금 우리 동네에는 재개발조합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 덕분에 전세가와 월세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언제 개발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곳이다. 개발이 되면 우리 동네도 그렇게 쪼개질까? 하지만 어쨌든 우리 동네는 가난한 사람들과 있는 사람들이 길이나 말뚝으로 나눠지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늘을 받드는 동네’ 봉천동을 하늘과 가까워지게 만든 것은 계단과 비탈길이었다. 이제 그것들은 모두 깎여나가고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사진 출처 : 성유숙) 차별에 대하여

하지만 그렇게 어우러진 국회단지 안에서도 ‘함께 사는 세상’은 섬처럼 놓여있다. 사는 동네가 어디인가 만으로 한 사람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 도시에서 이 건물은 게토와 같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만 이 곳을 방문한다.

어느 날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느릿느릿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고급 옷과 고운 화장 때문에 손님인 듯, 아마도 3층에서 자원봉사하시는 듯 그렇게 보이는 분이 나를 보고 "힘드시죠?" 한다. 그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가졌다기보다는 마치 아나운서의 목소리인 듯 혹은 연기를 하는 듯 경쾌하면서도 과장된 친밀감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경쾌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힘내세요.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죠. 자~ 화이팅~ 해보세요"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TV 속 연예인들이 하듯이 힘껏 쥔 주먹을 끌어내리며 화이팅~ 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뻘쭘해진 그녀는 내 아이들에게 "얘들 좀 봐~ 어른보고 인사도 안하네. 나 몰라?" 했다.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고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 힘내세요~"하며 내려갔다. 정말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 날 나는 약간의 모멸감을 느꼈다. 나보다는 내 아이들에게 했던 행동들 때문에 유쾌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모멸감은 그 사람의 오해를 바로잡으면 금세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봉사활동의 ‘대상’이 되는 3,4층 쉼터 분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일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그런데 내가 만약 쉼터 입주자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따라가다 문득 차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멸시와 냉대만큼 동정과 친절 또한 차별이 될 수 있다. 도움 받는 이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없는, 혹은 도움 받는 이와 스스로를 평등한 자리에 두지 않는 도움은 일방적인 적선에 그칠 경우가 많다. 평등하지만 다른 자리, 그저 그렇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가난이라든지, 장애라든지, 성적 취향이라든지, 한 부모 가정이라든지…그런 식의 다름이 특별하게 취급되지 않는 세상. 내가 바라는 세상.

    나의 네 번째 영화 <My Sweet Baby>는 세 아이와 함께 걸어온 나의 10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계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하지만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후, 이제사 나는 세상에 섞여가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직업은 항상 경계에 서있다. 누군가를 지켜보고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렇게 ‘삶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이제 나의 삶을 산다. 현재 나의 태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눈치 보기’다. “다른 애들도 그래?”라고 묻는 아이처럼 나 또한 ‘다른 부모들은 어떤가’를 살피며 그렇게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내가 특별하게 보여서 아이가 특별해질까 봐, 내가 튀어서 아이가 튈까 봐 그래서 아이가 외톨이가 될까 봐 조심조심 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태도는 대부분 한심하다.

함께 집에 오던 하늘의 같은 반 친구 엄마가 '함께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아, 여기 사셨어요? 급식비 안내겠네요?"라고 말하자 발끈하며 "저희는 내요. 제 남편은 여기서 일. 하. 는.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한 날, 나는 돌아서서 내 비겁함을 부끄러워했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My Sweet Baby>에 쓰려고 하늘의 공개수업을 촬영하던 날, 하늘 바로 뒤에 서있던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카메라를 꺼내서 하늘의 뒤통수만 겨우 찍었다.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하늘의 얼굴을 찍을 수 있었는데 괜히 다른 부모들이나 담임한테 튀어서 하늘이 불편해질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심한 나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일상의 잔물결에서 감동의 실마리를 찾아내라’는 오정희 선생의 말을 가슴에 품은 내가, 세 아이 때문에 오후 여섯시면 시계바늘처럼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내가, 다행히도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말을 아끼리라 결심한다. 일상의 잔물결을 거스르는 일은 쉽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리라 믿는다. 경계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자리, 그 시작을 잊지 않겠다.
작성자류미례 (다큐멘터리 감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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