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간절한 소망 말하기
[인터뷰] 쌍용차, 살아남은 자의 슬픔 ②
본문
[미디어 충청]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이 50일을 넘기고, 70미터 굴뚝에 오른 노동자들은 지금도 두 명이 남아 농성을 이어 온지 70여 일이 다가온다. 그러나 사측은 정리해고를 철회하지 않고 있고, 정부는 뒷짐 진 상태에서 경찰이 공장을 봉쇄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사측이 갈라놓은 산 자와 죽은 자, 그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사형선고와 같은 정리해고를 사이에 두고 서로 건너편에 서있는 두 사람. 그들은 정말 얼만큼 다르고 얼만큼 같을까.
소위 말하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정리해고 명단, 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의외로 서로 다른 갈림길에 서있게 된 그들은 길대로 갈라지지 않고, 같은 길을 선택했다. 정리해고 명단에 오른 자는 어쩌면 다른 선택이 길이 없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너는 명단에 들어갔다. 너는 죽었으니까 희망퇴직 신청하는 것이 좋다’ 그러더라구요. 사실 그때 심정이야 말로 다 못하죠. 밥을 먹다가 그 전화를 받았는데,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하루 종일 와이프에게 말도 못하고 멍한 상태로 지냈어요. 앞이 깜깜해지고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그런 느낌이었요. ‘내가 왜 해고 대상이냐’고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고, 나중에 어떻게 되든 간에 너무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짐을 싸들고 파업대오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산 자’ 역시 그들과 같은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말했다. “살아남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때 공장 안에 있었는데,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직장에게 ‘너는 살았다’라고 전화가 왔죠. 처음 가족들 얼굴이 생각나면서 안도의 한 숨을 쉬었죠.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내가 해고자 명단에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누가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였거든요. 한 마디로 살아남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희망퇴직과 정리해고, 다른 입장 같은 시선…
이번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두고, 노조와 사측이 정반대의 입장으로 대립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인력을 포함한 구조조정이 선행 되지 않으면, 자금을 투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사측 역시 지속된 경영악화로 인원감축은 어쩔 수 없다며, 900여명의 파업 노동자들 때문에 협력업체를 포함한 2만 명이 같이 죽을 수는 없다고 주장 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위기 때 마다 나오는 고통분담론도 여전하다.
“제가 해고자 명단에 올라간 것도 너무 억울했지만, 한 달을 넘게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동료들의 다른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일하던 수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근태도 좋았는데 정리해고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징계도 받고, 근태도 안 좋았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살아남아서 밖에 있습니다. 같이 일했으니까 그 속사정을 다 알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답답하고 억울한 겁니다. 누가 잘 나서 살고, 누가 못나서 죽은 겁니까? 도대체 그 기준이 뭐냔 말입니다.”
“정리해고 기준이 엉망진창인 것도 문제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사측은 경영상의 이유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2004년 매각 때부터 지금까지 경영진과 자본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상하이 자본의 기술유출과 업무상배임과 관련해 고소고발도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2006년부터 희망퇴직도 받고, 자연퇴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규인원을 채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 자본은 기술과 돈만 빼갔지 신차개발 등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노동자가 모든 걸 책임지고 해고되어야 합니까? 근본적인 경영의 문제는 쏙 빼고, 노동자만 때려잡겠다는 것이 바로 지금 정리해고입니다.”
살벌한 현실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서있는 곳은 분명히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 않았다.
'죽은 자'였지만, 아픈 아내와 육아 때문에 공장 안의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가 동료들의 얘기가 나오자 창밖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죽은 자'와 함께 한 '산 자'의 기억…
파업 초기에는 소위 ‘산 자’들의 적지 않은 수가 공장 안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을 것이고,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위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과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연습하던 기억도 나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서로 억울한 심정을 나누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산 자’였지만 다른 동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맘이 많이 아팠습니다. 첫 날에는 눈물을 보이는 동료들도 있었어요.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내가 잘려야 하냐?’고 하소연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정리해고는 기준도 명분도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한 번은 저와 같이 공장 안에서 함께 하던 ‘산 자’인 동료가 그러더라구요. ‘어차피 이번 구조조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가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가르지 않고 함께 한다면, 우리 다 같이 살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함께 일해야 하는 데, 그 때 떳떳하게 동료들과 함께 서고 싶다’구요. 저도 같은 맘이었습니다.”
형제가 ‘산 자’와 ‘죽은 자’로 마주선 경우도 있다. 그 난감한 상황은 실제로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졌다.
“저는 동생과 같이 회사에 다녔는데, 동생은 살았고, 저는 죽었습니다. 동생은 사측의 관제데모에도 참석했었습니다. 그날 새벽까지 계속 전화해서 ‘형, 괜찮은 거지? 다치지는 않았지?’라고 걱정을 많이 해줬죠. 그렇게 동생이 전해주는 주변 얘기들을 들어보면, 사측에 의해 동원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 관리직이 강력하게 충돌을 야기하고 부추기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동생이 제게 무척이나 미안해합니다. 동생이 잘 못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죠. 처음엔 동생이 저와 같이 들어가서 싸우겠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부모님도 계신데, 둘 중에 하나는 남아야 하지 않겠냐고 제가 말렸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섰던 아픈 기억…
“파업 30일을 넘기고 나서 용역과 구사대가 공장 안으로 들어왔어요. 연구동이 있는 언덕에서 직원들이 떼로 몰려 내려오는데, ‘아, 정말 이 거 말고는 답이 없는 걸까?’하는 생각에 너무 답답했어요. 저 속에 내가 아는 얼굴도 있을텐데, 그렇게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마치 훈련된 군대처럼 밀려오는데… 그 때야 실감이 나더라구요. 정말 이제는 장난이 아니구나.”
그들이 충돌했을 때 세상은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결’만 부각 된 밖에서의 시각과는 다르게, 그 충돌의 기억은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너무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또 다른 인터뷰 과정에서 그 때 ‘산 자’ 입장에서 관제데모에 참석한 한 노동자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관제데모에 참석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들도 너무 고생이 많다’며 걱정하는 분위기가 많았어요. 저 역시 우리가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지,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정문을 뚫고 들어가서 충돌이 있고 나서는 ‘이제 파산 수순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관제데모에 동원 된 ‘산 자’들 역시 자신도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공장 안에 있던 사람들도 안타까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정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이 그저 눈앞이 깜깜했어요. 실제로 용역과 구사대가 공장 안으로 들어와 충돌이 일어나니까 서로 죽일 놈이 되는 거더라구요. 솔직히 우리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째든 용역들만 따로 몰기도 하고 애를 썼는데, 나중엔 노동자들 끼리 싸움이 붙으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우리가 한솥밥 먹던 동료가 맞나?’ 싶었어요. 서로를 이렇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거든요. 그런 극단적인 대치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 일 이후로 안에 있던 동료들도 ‘산 자’, ‘죽은 자’ 구별 없이 다들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료들 보다, 우리를 이렇게 극한 대치상황으로 몰고 간 사측과 공동관리인들이 더 싫어졌습니다. 그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한 짓은 우리 노동자들을 이간질 시키고 싸움을 부추긴 것 말고는 한 것이 없잖습니까.”
함께 하지 못하는 자의 슬픔…
인터뷰에 응해 준 두 노동자는 한 달 넘게 공장 안에 있다가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때, 그들을 짓눌렀을 고민의 무게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 아니라, 이제는 안에서 싸우고 있는 자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로 나뉘고 있었다.
“아내가 사정이 있어서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계속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간병은 고사하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나왔어요. 이유야 어째든 함께 싸우다가 혼자 나오게 되니까 너무 미안했어요. 뒤 돌아서는 제 뒤통수가 너무 부끄럽고 고개를 들 수 없었어요. 당분간 와이프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좋아진다면, 언제든 다시 함께 할 겁니다.”
“한 달 넘게 동료들과 함께 잘 버텼는데, 시간이 갈수록 솔직히 부담이 많이 생겼어요. 회사의 강요에 대한 심적인 부담감이 컸어요. 직장은 계속 전화해서 ‘너는 산 자니까 그냥 나와라. 계속 있으면 너의 고용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손해배상도 때리고 징계도 내릴 수 있다’고 압력을 계속 가했거든요. 게다가 저 혼자 벌어서 가족 모두가 먹고 사니까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더 버티지 못했어요.”
“그렇게 5~10년 동안 함께 일하던 형님들과 동생들이 다 남아있는데, 그들을 뒤로하고 나왔습니다. 그 때, 동료들이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지금 나간다고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너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한 거다. 괜찮다.’ 그렇게 돌아서면서 정말 제 맘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휴~”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생계…
요즘 생계는 어떻게 꾸려 가시냐는 질문에 두 노동자는 쉽게 말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째 임금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나 밖에 있는 노동자나 할 것 없이 그들 가정의 생계는 거의 바닥을 치고 있다.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아내는 아픈데 돈은 없고……. 결국 적금 들었던 거 깨고, 번듯한 내 집 한 번 마련해 보겠다고 총각 때부터 넣었던 청약통장도 해약했습니다. 그렇게 버텨왔는데, 이제 그나마도 바닥이 보입니다.”
“여러 가지 보험 들었던 것 다 해약하고, 아이들 학원 다니는 것도 줄였죠. 그리고 대출받고, 마이너스 통장 만들고… 그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르바이트를 하든 뭘 하든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끝까지 가야하는가…
미디어충청 기사의 댓글을 보면,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을 빨리 내쫓아야 한다는 글이 많다. 뿐만 아니라 테러 수준의 폭력적인 댓글도 거리낌 없이 올라 온다. 쌍용자동차의 정상화가 900여 명의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어려워지고 있다는 판단인 것이다. 실제로 사측은 단수와 가스공급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일부 직원들은 회사가 노조에게 양보안을 제시하면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대부분이 관리직일 겁니다. ‘만약 회사가 양보안을 제시하면 집단 사표를 내겠다’고도 하던데, 그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해온 짓이 있으니, 여기까지 와서 다시 함께 갈 엄두를 못 내는 거죠. 그동안 이간질과 각종 술수, 그리고 온갖 악날한 짓을 다 해서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다시 함께 살기는 자기들도 부담스러울 겁니다. 저항했던 노조와 노동자들을 다 잘라버려야 나중에 자기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거죠.”
“900여명을 반드시 자르겠다는 사측은 그 900여명을 자르지 않으면 회사가 정상화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철회 된 그 이후가 싫고 두려운 겁니다. 삼일회계법인이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3~4년 뒤에는 다시 정리해고 한 인원만큼 다시 채용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미 1700여 명을 희망퇴직 시켜놓고, 900여 명을 더 자르지 않으면 회사가 정상화 되지 않는 다는 것은 숫자 놀음일 뿐입니다. 단지 끝까지 정리해고를 철회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될까봐 이고, 또 이후 마찰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리자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은 다릅니다. 누가 이간질 하고 싸움을 부추겼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서로에게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죠. 서로 처한 입장이 달라 어쩔 수 없이 마주섰었지만, 서로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밖에 있는 동료들이 전화해서 ‘다친 곳은 없냐?’며 걱정해준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우리 노동자들은 산 자든 죽은 자든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화…
정리해고를 놓고 노동자들과 사측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 아직 쌍용자동차의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파업 50일을 넘긴 지금 노동자들은 어떤 희망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들은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사는 길을 바라고 있었다.
“이제 파업 50일을 넘깁니다. 부디 정부와 사측이 경찰병력과 용역을 투입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노조의 자구안과 올바른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산 자든 죽은 자든 모두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힘겹게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누구만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같은 소망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뤄질 수 있는 방안으로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부가 왜 이렇게 수수방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 상상 못할 큰 피해 발생할 것이 뻔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가 끝까지 나서지 않고, 경찰병력과 사측 뒤에 숨어만 있는다면 달리 최악의 상황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쌍용자동차의 채권은 산업은행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입니다. 결국 쌍용자동차의 현 상황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경찰병력의 투입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회사를 함께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자'가 '안에 있는 자'에게…
살았지만 '죽은 자들'와 함께 했던 그는, 희망퇴직과 정리해고가 너무도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에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는 없었다. |
“한국이 인권이 있는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도 끊어 버리고, 가스도 끊겠다고 하고, 경찰병력으로 완전히 공장을 고립-봉쇄 시켜놨습니다. 비록 저는 ‘산 자’이지만, 열심히 투쟁해서 반드시 승리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데, 회사의 협박과 가정문제로 어쩔 수 없이 나왔습니다.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정말 너무나 미안한 심정입니다. 정말 힘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승리하는 날 함께 싸운 모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안에 있는 노조나 동료들은 절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부와 사측이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노조와 회사 정상화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거나 용역과 경찰을 투입해 힘으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그들이 먼저 백기를 들 일은 없을 겁니다. 제발 정부가 이 상황을 책임지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쌍용자동차 상황의 진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안에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돌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힘 빠지는 일이겠습니다. 비록 밖에 있지만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함께 있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사죄 받고 싶습니다.”
너무나 간절한 소망 말하기…
두 노동자가 쌍용자동차 모든 노동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뷰 마지막에 그들이 소망하는 ‘함께 사는 길’을 위해, 간절한 이야기들을 털어 놓았다.
“사측의 압박에서 두려워 떨면서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쌍용자동차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진정한 정상화의 길이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해주실 바랍니다. 사측의 강요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는 그런 출석체크에도 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응하니까 사측은 더욱 더 악날하게 나오고, 그렇게 쪽수를 채워주니까 관리자들이 더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산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을 더 내쫓아야만 된다’는 사측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노동자들만의 희생을 요구하는 회생안은 진정한 정상화의 길이 아닙니다. 사측이 주장하는 것이 정말 유일하고 올바른 정상화의 길인지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같은 노동자인 동료들에게 미운 감정이 없습니다. 아마 밖에 있는 동료들도 공장 안에 있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노동자들이 함께 해서, 현장에서 웃으며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를 작성하던 중인 11일 아침, 경찰병력이 공장 진입로를 확보하기 시작했고, 사측 직원들은 다시금 공장 주변을 애워싸고 공장봉쇄에 나섰다. 잠시지만 조용했던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에는 다시금 급박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 함께 사는 길은 불가능한 걸까?
인터뷰에 응했던 두 노동자의 간절한 소망이 거센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하다.
작성자박원종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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