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권리가 아니다-인권의 언어와 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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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
인권운동을 하면서 많이 한 활동 중 하나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찰과 공권력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경찰은 정부나 기업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된 집회나 시위를 어떻게 해서든 제한하려고 했다. 갑옷 같은 옷을 입은 전투경찰이 불심검문과 통행제한을 하고 때로는 해산명령까지 하는 경우는 큰 집회가 있는 도심에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집회참가자들을 향해 무작위로 카메라를 들이밀며 채증을 하고 그 채증 사진을 근거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나 일반교통방해 위반으로 벌금을 부과하기 일쑤였다. 헌법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허가 받아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는 문구가 떡하니 박혀 있으나 문구일 뿐이었다. 경찰의 행태를 보면 대한민국이 집회시위가 보장되는 곳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인권운동은 주로 시민들의 집회시위 권리를 가로막는 국가권력을 문제 삼았다.
퀴어퍼레이드를 막는 혐오세력
최근에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주체가 공권력이 아니라 민간인이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누구도 우리들의 집회에 대한 권리를 막을 권한은 없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래선 안 된다. 특히 집회 방해자들이 혐오세력일 때는 큰 문제다.
지난 5월 23일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극우기독교세력들이 퀴어퍼레이드를 막아섰다. 보수적인 도시 대구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린지 10주년이라 하니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구퀴어문화축제를 축하하러 왔다. 그래서인지 꽤 규모가 크고 즐거운 축제였다. 문화행사를 끝내고 퀴어문화축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행진(퍼레이드)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파더앤마더 러브유(father and mother love u)’라고 쓰인 옷을 입고 온 기독교 목사와 신자로 구성된 동성애혐오세력이 행진차량 앞에 열을 지어 막아섰다. 그들이 들고선 피켓에는 ‘탈동성애’, ‘동성애는 치료될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혐오발언을 당당히 하는 것도 불쾌한데 우리의 집회와 행진을 방해하다니, 그 뻔뻔함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신고된 집회를 막는 것은 집시법 위반이다. 집회 방해 행위는 법에 명시된 불법행위다. 그런데도 저렇게 행동하는 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일 게다.
행사참여자들이 경찰에게 왜 이들의 행동을 방치하냐고 항의하자 그때서야 경찰이 그들 옆에 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행진 길을 가로막으면 안 됩니다. 비켜주세요” 그런데 몇 번의 말을 하더니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그 말이 조치의 전부였다. 경찰이 우리를 막아설 때하는 조치는 없었다. 집시법 위반이라며 사람들을 방패로 밀어붙이고 끌어내고 하던 경찰의 물리력은 없었다. 그 흔한 사진 채증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 어떻게 정권이 바뀌어도 보수단체들과 그렇지 않은 단체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사라지지 않는가 싶었다. 경찰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법을 동성애 혐오세력들이 위반해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속이 탔다.
차별대우에 화가 난 몇 명이 경찰에게 따졌다. “경찰 선생님, 이 사람들은 집시법에 나온 집회방해죄에 해당하는 법을 위반했는데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기다려보세요.” 태평한 경찰의 말에 더 속이 끓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은 법 운운하며 항의하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법의 한계를 잘 아는 내가 법을 들먹이다니! 하지만 ‘법 좋아하는’ 경찰들을 움직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항의해도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극우기독세력은 자리에 앉아 어깨를 맞잡고 막았다. 결국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사람들만 행진하기로 했다. 행진차량은 이동을 못하고, 참가자들은 원래 코스대로 대구 시내를 돌았다. 아무리 혐오세력이 막아서도 퀴어퍼레이드를 막을 수 없다는걸 행진으로 보여주니 시원했다. 혐오를 이기는 무지개빛 사람들이라니! 자랑스러웠다.
집회신고와 혐오할 권리?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일을 또 마주해야 했다. 바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 조합원의 분향소를 대한문에 설치할 때였다.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이하 태극기본부)’의 사람들이 대한문은 자신들이 집회신고를 한 장소라며 막아섰다. 그들은 박근혜의 지지자들로 작년 박근혜 퇴진 운동을 하는 동안 박근혜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청과 대한문에서 태극기집회를 계속했던 무리들이다. 지금도 대한문에 몇 개월 째 집회신고를 내고 천막 3동을 설치하고 박근혜의 무죄를 주장하는 집회와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대한문은 자신들이 투쟁한 역사적 장소이자 거점이었다.
반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도 대한문은 상징적인 장소였다. 2012년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 계속 자결하자 더 이상의 노동자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며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싸웠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물었고, 시민들이 이들의 투쟁에 힘을 모았던 곳이 바로 대한문이었다.
완전한 복직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과 2009년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노동자들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없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2018년 또 한 명의 쌍용차 노동자가 힘들어서 자결했다. 그게 바로 30번째 희생자, 고 김주중 조합원이다. 죽음의 확산을 일으킬 수도 있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서울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국가폭력과 기업의 책임을 세상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분향소를 설치하려 하자 태극기본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집회신고를 한 장소’니 나가라고 했다.
그냥 나가라고 한 것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시체장사 하냐, 왜 여기에 분향소를 만드냐!” “그냥 여기서 죽어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로 희생자와 동료들을 모욕했다. 세월호참사 유가족을 조롱하고 희롱하던 이들이니 거침없이 망자와 그의 동료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었다. 말이 아니라 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향소를 부수겠다고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둘러싸고 폭력까지 행사했다. 사람들을 가두고 오고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집회신고 했으니 사람들을 혐오하고 모욕하고 감금해도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집회신고가 혐오할 권리나 폭력행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참다 참다 새벽에 그들에게 혐오와 물리적 폭력을 그만두라고 마이크를 잡고 경고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타인을 혐오할 권리는 없습니다.” “집회신고를 했다고 동료를 잃은 노동자들을 모욕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당장 폭력을 멈추십시오!” 그러자 집회신고가 혐오허가증인 양 의기양양 했던 그들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자 보고만 있던 경찰들도 조금 적극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그래서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약칭 자유권 규약)에서도 증오선동과 전쟁선동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명시한 것이 아닐까.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온갖 권리의 이름으로 폭력과 혐오를 행사하는 주류세력들이 있을 테니까.
인권의 언어와 말의 힘
일련의 과정을 보며 깨닫는다. 법의 언어는 인권의 언어를 담아내기 어려운 좁은 그릇이고, 혐오를 멈추는 것은 결국 혐오에 대항한 적극적 외침이구나! 혐오세력들은 ‘합법’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혐오는 권리가 될 수 없다’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외치자 혐오발언의 목소리는 멈칫하더니 작아졌다. 힘을 잃었다.
‘합법 여부’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인권의 언어다. 거기서 말의 힘이 나온다. 모두가 존엄한 존재이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걸 당당히 선포하고, 이를 짓밟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사람을 움직인다. 가해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나 목격자도, 방관자도 움직이게 한다. 권리의 탈을 쓴 폭력과 혐오의 민낯에 속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인권의 편에 서도록 도와준다. 애매한 태도는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인간존엄을 짓밟는 행위라는 걸 깨닫지 못하게 한다. 깨닫더라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자신감을 높인다. 우리의 외침이 인권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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