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예산제 국내 도입 가능성과 방향
본문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서울센터)는 2014년부터 사람중심계획(PCP)을 기반으로 한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함께걸음에서는 올해 1월부터 이 시범사업의 내용을 담은 ‘개인예산제도 기획연재’를 이어왔으며, 지난달 11일 간담회를 열어 개인예산제도의 국내 도입 가능성과 방향 등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간담회에는 비마이너 김도현 발행인, 서울시립남부장애인종합복지관(이하 남부복지관) 송주혜 국장, 서울센터 박찬오 소장, 백미 팀장, 사단법인 함께가는서울장애인부모회(이하 서울부모회) 박용연 감사, 성공회대학교 김용득 교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조문순 국장이 발언자로, 성공회대학교 이동석 외래교수가 사회자로 참여했다.
개인예산제, "발달장애인 탈시설의 원동력 될 것"
시범사업을 진행한 서울센터의 백미 팀장은 그동안의 소감을 밝히면서 ‘발달장애당사자를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개인예산제와 기존 복지서비스와의 큰 차이이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업에 참여한 한 분 한 분의 놀라운 변화를 몸소 느꼈다. 혼자서는 밥을 차려먹지 못해 굶어죽을 거라 평가되던 당사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직접 밥을 차려 먹게 되고, 가족들 사이에서 소외돼 외딴섬처럼 지내던 당사자가 조금씩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달장애인의 복지제도에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는 없었다. 서비스는 일방적이었고, 취업을 위해서는 개인의 흥미 또는 재능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직업훈련이 이뤄졌다. 시범사업을 통해 당사자 개인의 욕구를 측정하고 이에 맞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니, 당사자에게 동기부여가 됐고 주체성과 책임감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진 만큼 그들의 의사표현이 더 확실해졌다는 점도 성과로 볼 수 있다.”
시범사업 참여기관이었던 남부복지관의 송주혜 국장 역시 “이번 시범사업에서도 초반에 부모님들께서는 기능위주 교육이나 치료 위주의 계획을 짜려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당사자의 욕구가 중심이 돼 계획이 수립됐다”고 덧붙이면서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지역사회 안에 뿌리내리기에 좋은 제도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센터의 박찬오 소장은 개인예산제가 발달장애인 자립에 무엇보다 효과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제도 확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설 내 장애인 인권유린 문제가 계속되고, 아무리 탈시설 운동을 이어가도 결국 이들은 시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도리어 발달장애인 부모님들은 사비를 들여 시설을 짓기도 한다. 이는 발달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 생활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짧은 시범사업을 하면서 사람중심계획과 개별유연화에 기반한 지원이 있을 때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 수 있다는 걸 확신했다.”
개인예산제도 논의 시기 적절한가
하지만 개인예산제도가 국내에 적용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들은 많아 보인다. 비마이너 김도현 발행인은 국내에서 개인예산제도가 쟁점으로 논의되기에 적절한 시점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개인예산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우리의 현실을 봤을 때 지금 상황에 개인예산제가 쟁점이 되기에는 시기상조다. 현재 발달장애인의 기본적인 소득보장이나 주거 등의 문제조차 해결되지 않았고, 발달장애인에게 지원되는 사회복지 지원규모 총량 자체가 현저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개인예산제도를 실시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이 지적에 대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조문순 국장은 “개인예산제의 논의가 예산확보 논의를 반드시 지고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예산확보 과정에서 다른 장애인은 기존 체제 시스템의 피해를 그대로 껴안을 수밖에 없다. 현행체제 안에서 유연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편 박찬오 소장은 개인예산제를 추진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단순히 복지 예산의 총량을 늘린다고 발달장애인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발달장애인 활동보조시간이 아무리 늘어나도 결국 무기력한 당사자의 삶은 그대로다. 그런 맥락에서 장애인 복지관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장애인 복지 서비스의 확대가 아닌 잠식이라고 본다. 장애인 복지 예산은 발달장애당사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확대돼야 한다. 미국, 일본 등의 복지 선진국이 그랬듯이 국내 장애운동은 현재 최고의 절정에 와 있고, 앞으로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지금 개인예산제를 이슈로 끌고 가지 않으면 이 논의를 확장시키는 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다. 사람중심계획 이념에 대해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고 더 나아가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시키기에도 지금이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본다.”
개인예산제 현금지급 방식 문제 없나
개인예산제도의 서비스 보장방식 중 하나인 현금지급제(Direct payment)를 둘러싼 우려도 제기됐다. 김도현 발행인은 “개인예산제와 현금지급제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하면서 “국내에 현금지급제를 도입했을 때 예상되는 이점이 사실상 많지 않기 때문에, 개인예산제도가 반드시 현금지급방식으로 이뤄질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개인예산제의 현금지급 영역이 아직까지 소득의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도 추가로 지적했다.
이에 백미 팀장은 최근 방문한 미국 미소네타 주의 개인예산제도를 예로 들면서 개인예산제도의 다양한 모델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미소네타 주의 개인예산제에도 현금지급, 바우처 등 여러 모델이 존재한다. 그들 역시 시행착오를 거치며 선택 영역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예산제도의 현금지급방식은 현금만을 달랑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현금지급이 되기까지의 계획수립 단계와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엄연히 소득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김용득 교수는 개인예산제 현금지급을 통한 소비활동이 단순한 소비인지 복지 서비스 이용인지 구분하는 것은 철학적 문제라면서 “밥을 사먹는 행위는 생계를 위한 목적이지만 어떤 사람에겐 사회성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이 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이후에 모델은 다양하게 설계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백미 팀장은 시범사업 과정에서 경험한 현금지급 방식의 이점을 나누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한 당사자는 계획 수립 과정에서 ‘가족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한 달에 한 번 가족외식을 하기로 예산을 짰다. 이 당사자는 집안에서 항상 의존적이고 고립된 존재였는데, 시범사업을 통해 처음으로 주체적인 입장이 돼 가족들을 위해 소비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가족 내 당사자의 입지도 완전히 바뀌었다. 현금의 중요성보다도 이러한 방식이 당사자에게 많은 변화를 준다는 걸 느꼈다.”
박찬오 소장 역시 현금지급 방식을 통해 일어날 부작용을 언급하면서도, 그보다 이 방법이 가진 장점이 더 크다고 강조하면서 백미 팀장의 의견에 보충했다. “현금지급제의 큰 장점은 용처의 확대다. 산책을 싫어하던 당사자가 현금이 생기니 동네 카페를 이용하게 되고, 자연히 외부활동이 늘었다. 용처를 확대하는 만큼 부작용도 있지만 그보다 부가적 효과는 더 크다.”
이에 김도현 발행인은 “현금, 소비로서 얻은 단기적 효과에는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이런 위험을 줄인 개별화 계획의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개인예산제도가 본격화된다면 박찬오 소장은 개인예산제도가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서비스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발달장애 유형에 한해서라도 제도화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예산제는 그동안 선택에 어려움이 있던 발달장애 당사자들이 선택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 살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때문에 개인예산제는 우선적으로 발달장애 당사자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 주장과 관련해 김용득 교수는 국내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다면, 활동보조서비스 등 현재 운영되고 있는 장애인 복지제도에 이 제도가 어떻게 녹아드는지에 따라 논의의 방향이 전혀 달라질 것이라며 △기존 활동보조서비스제도를 개편하면서 발달장애 영역을 축으로 한 개인예산제도를 포함시키는 방법 △기존 활동보조서비스제도에서 발달장애 영역을 분리한 후 별도의 개인예산제도를 운영하는 방법 △기존 활동보조서비스제도와 발달장애인 개인예산제도를 함께 운영하는 방법 등을 제시했다.
서울부모회 박용연 감사는 “본격적인 개인예산제도 논의에 앞서 신체장애 위주의 장애등급 판정체계가 우선적으로 개편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해결돼야 부족한 발달장애인 서비스 총량 문제가 해결되고 개인예산제도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비스 지원 주체와 선정 기준은?
이번 시범사업에는 지역 자립센터뿐만 아니라 복지관까지 참여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도 최근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이 같은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동석 교수는 “시범사업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다면 여러 기관 중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는 어느 곳이 될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박찬오 소장은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 서비스 대상인 당사자와의 소통이 가장 원활하고 신뢰관계가 탄탄한 곳이 가장 좋은 중개기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백미 팀장은 선정 기관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점검이 필요하다고 덧붙이면서 “미소네타 주의 경우에도 지원 기관이 한 번 선정됐다고 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단위로 재인증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한편 김용득 교수는 바람직한 예산관리와 운영을 위해 서비스 기관의 이원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예산제도의 설계 이후 중심을 잡아주는 일종의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필요하다. 예산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중심체계 역할과 당사자의 욕구를 끌어내고 계획 수행을 돕는 지원체계 역할이 별도로 운영돼야 투명한 운영이 가능하다. 사실상 지역에 분포돼 있는 발달장애인센터가 중심체계 역할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이는데 전혀 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찬오 소장 역시 실제로 시범사업을 하면서 역할분담의 중요성을 체감했다면서 김용득 교수 발언에 의견을 덧붙였다. “시범사업 첫 회기에 사람중심계획에 집중한 나머지, 서포트 단계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첫 회 사업운영 결과를 통한 반성을 초석으로, 2회차 시범사업에서는 서포트 단계에도 많은 신경을 썼고 결과적으로 성과도 좋아졌다. 예를 들어, 캐나다의 경우 당사자의 욕구를 끌어내고 측정하는 역할과 서포터의 역할이 완벽히 분리돼 있다. 두 역할의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이외에 ‘개인예산제도’ 용어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예산’은 자기 주도적 삶의 한 요소이지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제도가 가진 목적이 왜곡돼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짧지 않은 간담회 진행 과정에서 개인예산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세부 주제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개인예산제도. 그만큼 논쟁의 여지 또한 산적해 있지만, 앞으로의 꾸준한 논의를 통해 발달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얼마만큼의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