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성을 무너뜨릴 앎
본문
얼마 전,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을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평화활동가에게 들은 미얀마의 현실은 매우 열악했다. 군부독재시기에 학교가 거의 없어져 어린이청소년들이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고 했다.
군사작전으로 인해 학교나 도서관이 파괴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 정보를 얻게 되면 군사정권에 대항할 것으로 생각해 책을 없애고 도서관도 없앴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따비에’라는 단체에서 미얀마에 도서관을 만들고 책을 보급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따비에는 버마(과거 미얀마의 국호)에서 평화와 행복과 안녕을 상징하는 나무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활동가들이 도서관을 지었지만, 정작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버마어로 된 책이 없었다고 했다. 군사독재정권이 출판 제한을 엄격하게 해 책이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 동화책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미얀마어로 쓰여진 동화책을 만들어야 했다. 한국에 있는 동화책을 번역하더라도 그걸 책으로 보급하려면 저작권이 있어야 하고 인쇄할 출판사가 있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손이 가는 일이었다. 최근 정권이 바뀌었지만 교육현실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아 할 일이 산적해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이동도서관처럼 책을 갖고 전국을 도는 행사도 했다고 했다.
앎, 저항의 힘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평화를 만드는 일은 참 여러 방법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인권과 평화가 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참, 한국의 현실과 닮아있구나 싶었다. 버마는 영국에서 1948년에 독립했다. 그러나 바로 군부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1988년에 군사정권이 무너졌지만 새로운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군사정권은 1989년 나라이름을 미얀마로 바꿨다. 그러다 얼마 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간정부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여전히 교육, 보건보다 국방에 많은 예산을 쓰고 있어, 어린이의 40%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고 한다.
평화란 사람들의 힘에서 나온다. 평화를 염원하는 연결된 힘 말이다. 연결이 되기 위해선 세상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기 위해선 ‘누군가 일궈온 삶의 지혜’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지혜를 모아둔 것 중 하나가 책이 아닐까. 사람들이 그 지혜에서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까 독재정권은 두려웠을 것이다. 책을 통해 사람들이 연결될까 봐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독재정권은 민중들이 ‘지식을 얻어 자신에게 대항할 힘’을 만들 수 없게 하려고 책을 차단했다. 책도 없애고 도서관도 없애고 학교도 없앤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회적 소수자들이 책-지식-앎에 접근하는 걸 두려워하던 일은 비단 군사독재정권만이 아니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은 ‘책 읽는 여자들’에게도 들이닥쳤다. 책을 읽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종교재판으로 불태워진 건 여자와 책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그래서 세상을 알게 된 여자는 위험하다.
책 읽는 여자는 책을 통해 다른 세계를 알게 되니 위험하다. 그저 여자는 남자와 종교에 종속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마땅한데,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다니! 그런 삶이 아닌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그래서일까? 18세기 페미니스트였던 울스턴 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에서 남녀 불평등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양육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상성’을 무너뜨릴 앎
장애인의 교육권 현실도 군부독재 정권의 치하에 있던 미얀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2014 장애인 실태조사’를 보면 한국의 장애인 수는 27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장애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이하가 41.4%라고 한다. 한국인 90% 이상이 고졸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불평등은 매우 심각하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미얀마나 중세시대처럼 장애인들의 앎이 두려운 걸까? 장애인들이 무엇을 알게 될까 두려운 걸까? 장애인들이 어떤 힘들과 어떤 연결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장애인들의 교육권을 외면한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먼저 기득권 세력이 누려온 이익이나 질서가 깨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장애인의 권리를 외면함으로써 장애인시설이나 인력확보에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비장애인 중심으로 성장을 강조하면 생길 이윤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자신들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 인권의 주체라는 점을 사유하고, ‘평등한 세상’을 상상하고 그런 평등을 원하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사회와 개인의 삶이 바뀌게 되는 걸 원하지 않기에 장애인의 앎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게다.
앎, 즉 자신의 존재와 세상을 사유하는 힘은 또 다른 힘을 만들어낸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장애인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면서 즐겨 쓰던 정상성의 논리가 사실은 ‘배제의 기술’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장애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게 아니라 주입되는 것이라는 앎을 얻은 장애인들이 정상성이라는 규정과 기준에 균열을 낼 힘을 갖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신체나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당연한 일로 여기며 순응하던 장애인들이 반기를 든다면? ‘장애인의 몸과 정신’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라며 저항할 때 다른 정상성의 기준도 무너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정상성’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적인 기준이며, 이러한 차별로 자신을 원망하고 이등시민화하는 사람으로 내면화하던 다른 소수자들(젠더, 인종, 출신국가 등의 기준으로 배제된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을 해체하고 ‘평등’을 요구하며 연결될까 두려울 것이다. 장애인이어서, 성소수자여서, 이주민이어서 권리를 제한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불평등의 사회를 흔들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이성애 중심의 성적지향에 대한 편협한 기준도, 비청소년 중심의 기준도 무너지면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단이 사라질까 두려울 것이다. 모두에게 필요한 평등한 교육이란 그렇다면 한국처럼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제도에서 장애인에게 평등한 교육을 보장하라는 것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 김상봉 교수는 <다음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에서 한국의 학벌사회에서 학교교육은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노예교육인 까닭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데 서툴다며 한국의 교육은 창조의 주체가 아닌 혁명의 대상이라고 질타했다. 공공성과 시민성, 개별성과 일반성이 실종되고 시장성과 경쟁성만이 남았다고 했다. 장애인들도 (대학입시라는) 시장에서 경쟁력 있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교육권의 전부는 아니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학습능력’ 있는 장애인이거나 그에 부응할 수 있는 ‘장애유형’만이 대상이 되는 것에 한정되어선 안 된다. 물론 1995년 장애인특별전형제도나 2008년 5월부터 시행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으로 장애 학생이 있는 모든 대학에 장애 학생지원센터 설치가 법제도화됐다고 하지만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니 지원을 확대할 필요성은 여전히 강조돼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장애인교육권 보장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무늬만의 장애인통합교육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입시 위주의 초중등 교육에서 장애인학생들을 꺼려하는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장애인교육권 확보를 위해 특수교사나 편의시설 확보를 위한 재원마련은 필수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장애인교육권의 내용과 방식도 적절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체 교육제도가 변화돼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장애인교육권 확보가 가능하다. 입시 위주 학교교육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비장애인학생들이나 교사들은 장애인학생들과 함께 교육받고 어울리고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부담을 느낀다. 그것을 감지한 장애인당사자나 부모들은 통합교육을 포기하게 된다. 무늬만 통합교육이고 실제 수업은 분리해서 받으니.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대학입학’을 못 하면 ‘실패자’, ‘낙오자’로 낙인찍는 ‘학력과 학벌 중심의 사회’이기에 학생들조차 이러한 분리를 원하기도 한다. 선생들도 입시 위주로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식의 만남이 바뀌려면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와 ‘장애인교육권’ 확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학습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든 아니든 공부를 하는 방식, 앎을 얻는 방식, 앎은 나누는 방식도 다양해지지 않을까. 앎이 주입이 아니고 사유이자 즐거움이 되려면 ‘앎의 과정도 다양’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들장애인야학처럼 제도권 교육이 아닌 다양한 교육의 장은 소중하다. 비제도권 교육의 확대라는 공공성 측면만이 아니라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하는 교육은 앎의 방식과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성원 모두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교사든 학생이든 말이다. ‘교육이 만남과 자유의 능력을 주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초중등교육뿐 아니라 고등교육, 평생교육 보장과 비제도권 교육의 장 지원 등 장애인들이 교육을 받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선택지가 넓고 다양해져야 한다.
그렇게 확보된 교육권으로 다른 세상을 향한 앎을 키워나가면 좋겠다.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분의 위계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앎, 비장애인을 꿈꾸지 않고 비장애인이건 장애인이건 그것이 신분이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앎 말이다. 정상성을 깨는 앎,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평등교육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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